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은 1494년,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 식당에 최후의 만찬 그림을 의뢰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께서,
제자들 중 배반할 자가 "한 명" 있다고 말씀하신 직후, 각자 반응 모습을 정지 화면같이 구성했다.
~당시 상황 재현해 보기 (영화 시나리오 형식으로 구성)
1.예수님 폭탄 선언. "이 중에 나를 배반할 자가 있다" (카메라 ~얼굴을 close up) ~약 3초
2.베드로, 주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제자에게, 누군지 물어보라고 눈짓 ~약 2초
3. 이에, 그 제자가 예수께 질문; 주님, 그게 누굽니까? (감히, 어느 놈이,,,) ~약 3초
4.예수님 답변; 내가 빵을 적셔 줄 바로 그 사람 ~약 3초
5.빵을 소스에 적심 ~약 4초 (카메라~ 빵을 close up)
6.빵을 유다에게 건넴 ~약 2초
7.유다에게 가서 볼일을 보라 말하심 ~약 3초 ~제자들, 아직 상황 파악 못함.
8.유다가 빵을 받아 들고 곧장 나감. ~약 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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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예수께서 "배반자" 언급 직후 유다가 나가기 전까지 약 20 여 초 동안 제자들이 쇼크 먹은 표정과 동작을 묘사 (맨붕 상태)
예수님 일행은 그날 저녁, 예루살렘 어느 집 2층 식탁에서 마주보고 앉았을 텐데, 그런 장면을 마치, 6각 입면인 종이 상자를 (3D) 6면의 평면으로 펼치 듯 (2D), 식탁 가운데를 쪼개서 모두가 정면 쪽으로 향하게 펼쳤다.
그 덕분에, 실제 그대로 그렸다면 뒷머리만 보였을 일부 제자들도, (식사 모임 때 사진 찍으면 뒤 꼭지만 나오는 친구가 있듯) "헤쳐 모여" 로 모두 얼굴 앞면이 다 나오는 "순간 포착"같이 잡았다.
그건 어쩌면 입체적인 사물을 평면으로 분해해서 그린 피카소 비슷한 형태 같은데?
사실 "최후의 만찬" 은 누구라도 그리기 까다로운 주제였을 듯,,,
얼굴이 모두 보이게 식탁을 옆으로 길게 펼쳐 그리지 않으면 극적인 효과를 내기 힘든 구도다. 그래서 당시의 실제 상황 재현보다 보여주기 위해 구도를 새로 잡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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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나리자"를 그릴 때,
몸은 1/4 (22.5도) 정도로 약간 비틀면서, 얼굴만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는 생동감을 준다. (요즘은 셀카도 그렇게 찍는게 대세?)
그런데 고대 이집트의 벽화는, 얼굴과 발은 옆을 향하는데, 가슴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얼굴과 몸을 다 빈치와는 거의 반대 개념으로 그렸다.
그건 다소 부자연스런 구도이긴 해도, 당시 화공들 생각에는, 얼굴은 앞모습보다 옆모습이 더 입체적이고, 가슴은 옆모습보다 정면을 표현하는 것이 풍부해서, 부분 별로 가장 좋은 각도로 그리다 보니, 몸과 얼굴이 90도 틀어지게 그리는 기법을 만들어 낸 것 아닐까? ~ 하고 나름 추측을 해 보는데,,,
요점은, 그들도 인체를 그리기 편한 대로 편집해서 그렸다는 말씀이다.
주제가 약간 바꿨지만, 사실 3D인 물체를 2D인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그 자체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동시대의 경쟁자인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한 수 아래로 친 것은,
3D를 3D 그대로 똑같이 표현하는 것은 거저먹기? 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dead mask 경우, 죽은 사람의 얼굴을 석고로 뜨기만 하면 된다. 또 그는 대리석 가루를 잔뜩 묻히며 작업하는 방식도 싫어했다.)
그런데 조각도, 후세에는 특정 인상을 강조하거나 추상적으로 바뀌면서,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반면, 그는 "모나리자"를 그리면서,
3D를, 2D로 완벽히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죽는 순간까지도 가지고 다니면서 고쳤고,
~완성 시한을 정해두지 않고 다듬고 또 고치다가 미완성으로 남겼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런 그의 (무모한?) 도전을 높게 평가하는 건 아닐지.
"미칠 수 없는 곳에 손을 뻗고, 갈수 없는 곳에 도달하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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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들이 동굴이나 암벽에 그렸던 대상은,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꼭 잡아야 했던 야생 동물과, 그 동물을 잡던 사람, 사냥 도구, 또 가두어 둘 울타리 등에 관심이 쏠렸다.
당시 조각은 ~ 깎을 재료와 도구를 쉽게 구할 여건이 못되,
또 그런 고차원적인 작업은 생각조차도 못했을 수도 있어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그림" 을 그렸을 것이고, 조각은 시간이 한참 더 흘러 등장 했을 듯.
그 뒤 이집트, 그리스 등, 문명 사회에 와서는 신, 사람, 동물, 마차 등, 관심 대상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2D인 그림보다 3D인 조각이 더 사실적이라는 걸 알고 선호했을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남자들은 벌거벗은 몸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올리브 기름을 발라 뽐내며 단련했고, 문명의 산물인 양 조각으로 전시했다. (과다 노출증?)
추측 건데 선사 시대에는 먹을 수 있는 곡식, 열매 외, 태초부터 있었던 숲, 강 같은 (생존에 별 도움이 안되는) 자연에 대해서 예술적인 인식은 별로 없었을 것 같다.
그 뒤로 먹고 사는데 여유가 생기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에 눈을 돌려 멀고 가까운 풍경의 거리감을 표현하려 고심하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원근법이란 걸 생각해 낸 것 아니었을까? 하고 나름 추측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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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식탁을 배치 할 때 사람 간격은 통상 60cm 정도로 설계한다.
"최후의 만찬" 경우, 주님이 식탁 가운데 앉고 제자들이 양쪽, 또 건너편에도 앉았다고 가정하면, 식탁 전체 길이는 6~7명 × 60cm/1인 으로 계산할 때 약 4m 정도, 또 중앙에 앉으셨다면 한쪽 가장자리까지는 약 2m 정도로 추정 할 수 있는데,
그 정도 거리에서는, 또 2층이라 바깥 소음이 차단되었다면, 예수님이 "배반자" 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모두 다 들었을 듯.
주님께서는 빵을 유다에게 주어서 그가 범인이라고 알리긴 했지만 즉시, 그에게 "할 일" 을 하려 가라고 지시했고, 그 빵을 먹지도 않고 들고 바로 나가버리는 유다를, 제자들이 가로막고 자초지종을 따지기는 좀 애매한 상황이었을 것.
그러니까, "밀고" 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놓친 것.
유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고발을 하려 간 것은 빵을 받는 그 순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가서 그렇다는 것인데, 그 의미는, 마음 속에 유혹을 받아 들일 틈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지?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
"정말 구세주 맞나? 그럼 로마 군인들이 잡아가도 기적을 발휘해서 끄떡없이 벗어나실 까?"
하고 꼭 한번 시험을 해 보고픈 마음?
무모한 간 보기, 불행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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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당의 수호 성인 김제준 이냐시오.
사위에게 밀고를 당해 포졸에게 끌려가셨는데, 제자에게 배반당한 예수님과 비슷한 심경이셨을까?
또 한번 배교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순교 하심은, 마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정하고,
또 나중에 로마를 떠나 도망치다가 다시 돌아온 모습과 오버랩 된다.
그 분이 우리 성당 수호성인 이신 건 어떤 의미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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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저는 미술사 전공이 아니고, 그저 조금 아는 자료와 추측으로 쓴 것이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를 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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