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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김소월, <가는 길> 일부) 이렇듯 절묘하게 우리의 전통적 율격인 3음보를 활용하던 시절은 차라리 행복했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박목월, <윤사월> 전문). 간략한 7·5조에 기대어 봄날의 애틋한 정취를 짧게 노래하던 시절도 먼 옛날이 되었다.
시를 쓰게 되면 누구나 행과 연을 구분하게 되고, 그에 따른 리듬의 변화에 민감해진다. 문학수업 시간에 귀가 닳도록 듣게 되는 그놈의 내재율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내재율은 정형시의 율격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시의 내부에 숨어 있는 리듬을 말한다. 이 보이지 않는 리듬은 시와 시 아닌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형식적 잣대가 되기도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만 모든 자유시가 내재율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창작자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김우창은 “어느 시대에서나 진정 잘 된 시에서 적절한 음악의 형식은 발견되어야 한다”고 했고, 이형기는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소리를 예술적으로 조직한 구조물이 시”라면서 시의 음악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의미(내용)와 소리(형식)의 유기적 결합이 운율의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근대 이후 대부분의 창작자는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을 확보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주제나 소재와 같은 내용의 형상화를 고심하는 동안 리듬에 대한 배려는 뒤로 밀쳐두는 일이 빈번해진다. 시인들은 형식을 낯설게 변화시키는 일을 내심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설혹 과감하게 기존의 형식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하더라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한다. 그렇게 현재의 형식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낀 존재, 그가 시인이다.
시의 리듬이 발생하는 지점은 행갈이, 연의 나눔, 음절과 음운의 반복·고저·장단·강약, 문장 부호의 배치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시의 행과 연은 외형적으로 시와 산문을 가장 잘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행과 연을 활용해 무엇을 쓴다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자 시인에게 내린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시에서 이처럼 중요한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시지 않으면 시인으로서 낙제다. 당신이 시를 쓸 때 아무 의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과 연을 바꾸었다면 지금부터 자중하라. 관습적인 행갈이는 당신이 쓰는 시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관습화한다. 시의 호흡에 따라 적당히 행을 바꾸면 된다고, 행갈이에 특별한 규칙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빨리 그 나쁜 생각을 버려라. 행갈이에 ‘적당히’란 없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한 채의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계도면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수행할 인부와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확보해야 하고, 충분한 공사기간이 있어야 한다. 시가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행을 바꾸거나 연을 나눌 때에도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과 의도 없이 절대로 행을 당신 마음대로 바꾸지 마라. 시의 리듬을 고려해 행을 바꾸었다고 구차하게 변명 좀 하지 마라.
예컨대 최근에 당신이 10편의 시를 썼다고 치자. 그 시행의 길이가 다 고만고만하고, 각각의 시의 길이가 모두 비슷비슷하다면 당신의 시작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라. 그때 당신의 리듬은 기계적인 리듬이어서 아무도 당신의 리듬에 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리듬뿐만 아니라 시의 내용도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
사라져 버렸어
박노해의 시 <지문을 부른다> 일부이다. 우리는 그동안 박노해가 현장노동자 출신의 시인이라거나 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이 노동자의 당파성과 미래를 향한 진보적인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에만 주목해왔다. 물론 박노해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여기에 세 번 등장하는 ‘없어’에 사정없이 꽂혀버렸다. 주민등록증 갱신을 위해 지문을 찍다가 노동자로 산 덕분에 문드러지고 사라져버린 지문을 어쩌면 이렇게 선명하게 부조할 수 있는가! 인용 부분의 첫 번째 ‘없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충격과 놀라움이 있고, 두 번째 ‘없어’에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의 까무러치는 비명이 있고, 세 번째 ‘없어’에는 절망으로 들끓는 복잡한 심리가 투영되어 있다. 또한 ‘없어’의 뒤에 붙은 쉼표 하나하나는 시의 호흡을 가파르게 하면서 앞에서 터져 나온 ‘아’라는 감탄사를 뒤로 계속 밀어붙이는 구실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없어’는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이외에 자본주의 시장에서 노동자의 존재란 없다는 각성까지 환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중 한 부분을 행갈이와 쉼표 없이 적어보자.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어떤가? 행갈이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단 한 글자, 혹은 두 글자라도 그게 하나의 시행이 되려면 시의 전체 흐름에 힘을 가하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 만약에 전체 20행의 시가 있다면 한 행은 이십분의 일의 언어 밀도와 생각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김춘수는 <시의 이해와 작법>에서 시행 구분의 원리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제출한 적 있다. 그는 일본 시인 기다조노 가즈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의 각 행은 ‘사상의 분량’ ‘의미의 분량’ ‘이미지의 분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계산된 의도 없는 시행 바꾸기가 시를 얼마나 허약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시가 잘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써야 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형식을 변화시킬 만한 에너지를 행 바꾸기에서부터 찾아라. 습관적으로 바꾸고 나눠왔던 행과 연에 변화를 도모하라.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를 바꿔보라. 시의 길이를 지금보다 길게 늘이거나 대폭 줄여보라. 모두들 긴바지를 입는 겨울에 시인은 반바지를 입고 뚜벅뚜벅 바깥으로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시행이 산문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리듬이나 이미지보다 전체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오규원 <현대시작법>)고 했다. 행갈이가 애매하고 지겨워지면 아예 행을 무시한 산문시로 건너가 보라. 거꾸로 산문시가 구태의연하다고 느껴지면 다섯 줄 이하의 짧은 시로 건너가 보라.
문장의 빛깔과 무늬를 문채(文彩)라고 한다. 시의 문채는 행과 연의 배치, 어휘의 선택 등을 통해 나타난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시에 대폭 도입된 ‘양행 걸침’ 형태는 시의 형식과 내용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그것을 선도한 것은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이다. 이 양행 걸침 기법은 한국시에 고질적으로 스며 있던 관망과 관조의 태도를 일시에 혁파하였다. 행갈이의 변화가 한국시의 질서 전체를 역동적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 파급력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와서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아버지는 저리
화가 나실까 아버지는 목이 말았다 물을
따라 드렸다 아버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자꾸 그러세요 엄마가 말했다 얘, 내버려
둬라 본디 그런 양반인데 뭐 아버지는
돌아누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 당겼다 ― 「꽃피는 아버지」 부분
진술과 대화가 행을 걸쳐 뒤섞여 있다. 만약에 얌전하게 행을 나누고 소설처럼 대화 부분에 큰따옴표를 붙인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 시가 자아내는 긴장미와 박진감은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일상의 한 부분을 문장으로 옮겨다 놓은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 「어느 푸른 저녁」 부분
장석남의 다음 시는 시행의 배치가 언어의 빛깔을 어떻게 채색하는지 잘 보여주는 시다.
마당에
녹음(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 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 장석남, 「마당에 배를 매다」 부분
저녁별을 ‘몇 포기’라고 표현한 것은 앙증맞도록 아름답다. 깊은 밤이 아니고 저녁 무렵이므로 그 별은 징검다리 ‘끝에’ 간당간당하게 걸려 있는 듯 보일 테고, 개수가 많지 않고 ‘몇’일 뿐이므로 연필 깎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떠서’ 세상을 가물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시행을 건너갈 때마다 조심스러워하는 언어의 빛깔이 마치 어린아이의 아슬아슬한 묘기를 보는 듯하다.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풍경과 문채(文彩)가 성공적으로 어울려 시행 배치의 미묘함을 일깨워주는 시다.
오랫동안 시작 활동을 멈추었다가 좋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세 시인이 있다. 서정춘, 위선환, 신현정이 그들이다. 이 시인들의 시가 왜 좋은가? 다른 것 다 제쳐두고, 행과 연부터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문채가 다르다. 오랜 시간 장인으로서의 내공이 개성적인 형식을 낳았다.
허드레
허드레
빨랫줄을
높이 들어올리는
가을 하늘
늦비
올까
말까
가을걷이
들판을
도르래
도르래 소리로
날아오른 기러기떼
허드레
빨랫줄에
빨래를 걷어가는
분주한 저물녘
먼
어머니
― 서정춘, 「기러기」 전문
이 시는 한자어 하나 없고, 종결어미와 마침표도 없고, 시행의 몸매는 가을 들녘의 깡마른 수숫대 같다. 행의 배치는 박목월이나 박용래를 연상시키고, 대구의 기법은 한시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서정춘의 연금술은 “자기 체험의 본질적 형해(形骸)가 드러날 때까지 깎고 또 깎는” 내용과 더불어 한 행에 2어절 이상을 배치하지 않는 형식의 절제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실현되고 있다.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버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 신현정, 「바보사막」 전문
사막이라는 극지로의 여행은 상상의 여행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막을 간다는 것,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그러다가 사막 한가운데서 낙타를 죽이고 굳기름을 꺼내먹는다는 상상에 이르게 되는데, 이 난데없는 부분을 읽으며 우리는 묘한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이유가 뭘까? 현실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옹졸한 우리의 처지를 이 시가 호기롭게 혁파하고 있기 때문이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칼을 높이 쳐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륙적 상상력 가까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신현정의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이 이 시도 한 행을 한 연으로 처리하는 대담한 기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행에서 행으로 넘어가는 속도를 절반으로 늦추면서 독자에게 은근히 행간을 채워 읽을 것을 주문한다. 시가 마련한 공간 속으로 독자를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놀이터를 마련해 놓고 마음껏 놀아 보라는 식이다.
기러기 몇 마리가 한 줄로 날아서 임진강을 내려왔다
기러기들의 아랫배가 강바닥에 스치고 닿았다 강바닥에서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놀 들고 전신이 물들자 여자는 말없이 누워주었다
훌훌 벗더니 제 몸 위로 강을 끌어올리고는 얇다랗게 말갛게 유리판같이 얼었다
여자는 가린 것 없이 들여다보였지만
어떡할까,
나는
망설이다 말았다
내가 다 벗고, 맨살로, 놀빛 비낀 겨울강의 살얼음판 위에 엎드릴 것인가
강이 녹고 여자도 녹아서 흠뻑 젖을 무렵 햇살 환한 날 다시 찾아가서,
무겁고 울퉁불퉁한 내 몸을 보여주고
한 번 더 누워주겠느냐고 물어보려 한다 ― 위선환, 「해동기」 전문
강의 결빙과 해동의 시간을 한 사람의 여자에 비유해 묘사하고 있는 시다. 풍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때는 행의 길이를 산문처럼 길게 늘이고, 화자의 심리를 그릴 때는 아주 짧은 시행을 선택하고 있다. 행의 길이를 조절하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있는 경우라 하겠다.
달팽이 약전/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는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 뿐인 生이 있었다
-적(寂) / 위선환-
늦은 가을에 비추는 햇살이 기울고, 요 며칠 사이에 시든 풀잎들은 누웠거나 무심해서 자주 밟히는 무렵이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손짓을 하며 저 사람에게 물었고, 저기에 있는 저 사람은 조아리며 그 사람에게 물었지만, 거기에 있는 그 사람은 대답을 하지도, 다른 누구에게 묻지도 않았다. 미리 눈여겨본 하늘이 조용했던 것,
비 1 - 이성복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 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ㅡ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ㅡ 뭔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ㅡ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ㅡ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뒤란 / 조성국
잗다라서 먹잘 것 없어도
열매가 맺혔다
손 안 타고 자란 포리똥 물앵두 돌뽕나무 곁가지들
땅바닥에 이끌리도록 휘늘어지고
화라지를 쳐주지 않아서
삭정이로 묵은 채 모여 살았다
어둑시근하니 묵은 누룩 냄새가 피는 그늘에서
참새 혓바닥과 같은 여릿한 잎사귀이랄지 희맑은 꽃 이파리도
함께 어울려 지냈다
응달진 데에서
웅크리고 혼자 울던 홀앗이 어미의 서늘한 눈물방울 어리듯
이슬 맺혀 처진
은방울 꽃대가 가슴을 짓눌려 오긴 했으나
구탱이로
뒷구탱이로 밀려 눌린 것들은 언제 봐도
남 같지가 않았다
첫댓글 네네 네네네
나는 시교실에서
유치원에서 대답만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