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김중석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원님 재판처럼 무서운 게 없습니다.
“나의 범한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고해성사처럼 두려운 게 없습니다.
“바른대로 말하면 용서할게요.”
숨김없이 불랍니다
뭘 불라고?
어디까지 불라고?
서릿발 추궁에
속절없이
저린 오금
양심의 털끝이
죽비 되어
고백을 후려칩니다
네 이놈,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겠느냐!
파도
김중석
때리지 마라 애잔하다
울지 마라 애달프다
일렁이지 마라 애틋하다
부서지지 마라 애절하다
포효 마라 두려웁다
밀려오고 밀려가지 마라
너 힘들고 나 힘들다
태초에 바다 있어
보기에 좋았다니
세파일랑 거둬가고
백사 포말 가득 품은
피안의 길손 되어
수평선 여명 위로
찬란한 일출 솟아주렴
삶과 죽음의 임계선에서
김중석
삶이 죽음의 문턱을 막 넘으려는 순간
난도질한 육신에 매달린 5mm 물관 줄에
다시 생명의 피가 돌았다.
생사의 임계선을 지나
기쁨과 슬품
절망과 희망
사랑과 미움이
DNA 나선 위서 춤추고
오랜 삶의 터전에는
국경선이 그어지고
분단선이 갈라지고
고통과 시련의 철조망이 저며 온다
찬사와 비난
성공과 실패
영고와 성쇠는
이내 항룡의 눈물 흘리며
야위어진 긴 신음 뱉어 낸다
여명과 석양, 햇빛과 노을이 젖고
수평선과 지평선마저 아득해질 무렵
숱한 번민과 고뇌의
임계선에서 허덕이던 인생은
아득한 천애 향해
지친 몸 이끌고
갈지자로 걸어간다
새 생명 기약하는
부활의 여정이다
지방은 살쪄야 산다
김중석
지방이 빠져간다
지방이 처져간다
지방이 사라진다
떠나는 지방
메마른 지방
늙어가는 지방
지방이 빠지니
폐만 늘어간다
폐가 폐점 폐업 폐교 폐촌-
서울은 고도비만
지방은 영양실조
고향살이 애달프고
타향살이 고달프다
지방이 3대 영양소란건
삼척동자도 안다
지방이 많아야
내 삶이 살고
지방이 늘어야
내 고향이 살고
지방이 넘쳐야
내 나라가 산다
지방아 졸지마라!
지방아 쫄지마라!
지방아 깨어나라!
지방이 살찌고
지방이 불어나면
지방은 활력 찾고
지방은 살아난다
시작노트
건망증과 기억할 놈(記者)
서울행 청춘열차를 놓칠까봐 허겁지겁 승용차에 올라탔다. 춘천역에 도착해 택시비를 건네려 주머니를 뒤졌는데 아뿔싸, 지갑이 없다. 서둘다보니 양복 윗도리를 사무실에 두고 왔다. 사정하면 봐줄라나 기사를 쳐다보니 헐, 우리 회사 직원이다. 와이셔츠 바람에 회사차를 타고 온 걸 깜빡 했다. 며칠 전엔 택시비로 명함을 지불하더니만.
명절 때 신세진 분을 찾아 토종꿀을 선물했다. 배웅을 받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려 버튼을 누르려는데 손에 묵직하니 뭔가 들려있었다. 내가 못살아, 토종꿀을 도로 갖고 나오다니.
시외버스 검표원이 다가왔다. 주머니를 다 뒤졌는데 차표가 없다. 설마하고 가방까지 훑었는데 못 찾았다. 기사와 승객 눈총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표를 다시 사러 갔다. 매표원이 혀를 차며 하는 말, “ 엄청 급하셨나봐요? 돈만 내고 냅다 뛰어가시더라고요.” 럴수럴수 이럴 수가.
핸드폰을 잃어버려 단골 대리점을 찾았다. 창구 여직원이 “또 오셨네요?”라며 키득댄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란다. 고민 고민하다 아예 허리 벨트에 핸드폰 끈 줄을 매달았다. 전화를 받으면 줄까지 주~욱 달려온다. 한동안 신사체면 구겼지만 실속은 차렸다.
일본 여행도중 온천 김을 뿜어내는 족욕 체험장에 들러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팬티마저 반쯤 벗는 순간 일행들이 기겁하며 제지했다. 아뿔싸. 딴 생각 한참 하다 동네 목욕탕인줄 착각했던 모양이다. 하마터면 해외토픽에 날 뻔했다.
돼지꿈을 꾸고 난 뒤 간만에 로또복권을 샀다. 핸드폰으로 검색해 당첨번호를 메모지에 적어놓았다. 화장실을 잠깐 다녀와서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에 나온 당첨번호를 훑어보았다. 오 마이 갓! 6개가 다 맞았다. 1등이다. 조상께서 무슨 음덕을 쌓으셨기에 814만분의1 확률인 로또 행운이 내게 오다니.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힘든 직장 그만두고 늘그막에 편히 살려나보다. 흥분을 억누르며 지갑 갈피에서 복권을 꺼내 하나하나 맞춰보았다. 이런 젠장. 달랑 두 개만 맞았다. 꽝이다. 이런 한심한 놈을 보겠나. 복권은 제쳐두고 핸드폰당첨번호와 컴퓨터 당첨번호를 맞춰보다니.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돼지고긴 이제 꼴도 보기 싫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춘천행 밤 11시 막차에 올라탔다. 막 떠나려는데 검표원이 급히 올라오더니 잘 못 탔다며 빨리 내리라고 했다. 몇 분만 늦었으면 포항행 고속버스는 나를 싣고 남으로, 남으로 새벽을 달리고 있었을 게다.
수심이 하도 깊어 병원을 찾아갔다. 젊은 의사가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갑자기 물어보는 바람에 순간 맙소사, 드디어 내 이름마저 까먹고 말았다.
가볍지 않은 건망증에, 칠순의 나이에 시마(詩魔)까지 무시로 괴롭혀대니 탈모에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까마귀 고긴 입에 대본 적도 없는데 돌아서면 이내 까먹고. 기억의 창고는 갈수록 비어간다.
이를 어쩌나! 일흔 넘은 건망증과 인지장애의 임계선-.
그 좋다던 아이큐는 버그난 컴퓨터처럼 너덜거리고, 인지장애 수준에서 어쭙잖게 뽑아보는 시어, 반평생 넘게‘기억할 놈(記者)’되라고 살아온 직업적 뻔뻔함과 부끄러움 물리치고 데면 글면 자판기를 두드린다.
시어와 정신이 혼미해도 까먹지 않는 경구는 하나 있다. 조선의 대기자 연암 박지원의 일갈이다.
“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어디다 쓰겠는가?”
판사나 의사, 교수처럼 현학적으로 쓰지 말고 초등학생도 알아먹게 쉽게 써라. 병아리 기자 때부터 귀 따갑게 들었던 말이다. 그래, 난 수치스런 시인보다 평생 기자가 제격이다. 아름다운 언어, 현란한 어휘보다 메시지 있는 글, 뼈있는 글이 어울릴 것 같다. 이름부터 가장 강한 금속 텅스텐, 딱딱한 쇠(金)짱(重)돌(石)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