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0.(금) 오후 1시 30분 편집부 사무실
특집 역사 소설 작가의 서랍
차별과 소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
- 윤혜숙, 정명섭
<부분 발췌>
윤혜숙 역사소설은 한 줄을 쓰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찾아 읽어야 하잖아요. 방대한 자료 속에서 딱 맞는 것을 찾는 노하우 좀 공개해 주세요.
정명섭 영업 비밀인데요. 하하. 많이 보는 것밖에 없어요. 『미스 손탁』(서해문집, 2018)을 예로 들자면 손탁 여사와 손탁 호텔에 대한 자료는 있어요. 하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 전체를 이해해야 하거든요. 손탁 호텔이라 부르지만 그 시대에는 손탁 빈관이라고 불렸어요. 아무나 숙박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대한제국 황실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만 추천장을 들고 가야 머무를 수 있는 빈관이었어요. 고위 관료나 외국 귀빈만 이용 가능했겠죠.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 때 종군기자로 왔다가 머물렀다는 추측이 있고요. 을사늑약을 체결하러 왔던 이토 히로부미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고요. 그런 정치적 역학 관계와 대한제국 시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려울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IT 환경이 좋잖아요. 조선 시대를 보고자 한다면 조선왕조실록 사이트나 색인으로도 들어갈 수 있고요.
윤혜숙 번역이 엉망이고 어렵지 않나요?
정명섭 오히려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이 번역이 잘 되어 있으면 우리 경쟁자가 열 배는 늘어났을 거예요. 하하. 우리가 왜 여기 들어와 있는지 생각해 보자구요. 틈새시장이잖아요. 하하. 제가 왜 역사소설을 시작했는데요. 스티븐 킹이 다른 이야기는 다 써도 조선 시대 괴담은 안 쓸 거 아니에요. 조선실록 논문이 어렵다고 하는데 풀어써서 내용이 길어진다면 과연 볼까요? 옛날 자료들은 번역본이 있다는 자체를 굉장히 행복하게 생각해야 해요. 조선왕조실록, 고려사는 네이버 지식백과에 고려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다 들어 있어요. 원본과 번역본 모두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역사 데이터베이스라는 사이트가 있어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가 모두 검색이 돼요. 국회 전자도서관, 네이버와 마찬가지로 논문자료까지 모두 볼 수 있어요. 글쓰기가 어려운 건 당연해요. 자료 조사의 함정이라면 찾다 보면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요. 말씀드린 1차 자료들을 보시는 게 더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윤혜숙 처음 집필 시절과 현재를 비교해 볼 때 자료 보는 비중이 글 쓰는 비중보다 줄었나요?
정명섭 자료 보는 비중이 예전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아졌어요. 개인 문집 번역본을 보기 위해 다른 자료를 보는 경우도 더 많아지고요.
윤혜숙 봐야 할 자료가 늘어서 공부 방법이 달라졌나요?
정명섭 학회 또는 세미나에서 발행되는 간행물과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질문하기도 하고 답변에 대한 추가 자료 조사를 하기도 해요. 선생님께서 예전보다 자료 조사가 줄었다고 여기시는 것은 익숙해져서일 거라 생각됩니다.
윤혜숙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뽀이들이 온다』(사계절, 2013)나 『계회도 살인사건』을 쓸 무렵에는 전기수나 계회도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주변적인 상황, 일제강점기의 변사나 조선 후기 화원이나 수장 문화를 더 많이 공부했던 것 같아요. 시민 강좌에서 계회도라는 걸 처음 들었는데, 그때 충격은 지금도 생생해요. 확실히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과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더라고요. 자료 조사를 끝내고 써 가는 내내 공부가 부족해서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많았어요. 알면 알수록 더 알아야 할 게 점점 많아지잖아요? 역사소설가로서 늘 고민스러운 지점은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것만큼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 부분인데요.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명섭 최근 우려되는 것은 역사가 특히 근대사가 이념화되는 것이 걱정스러워요. 대표적인 예로 세월호 참사가 그렇구요. 역사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역사가 역사인 이유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최근엔 근대사를 자신의 입맛대로 가공하거나 원하는 대로 짜깁기하여 악용하는 사례들이 점점 늘어나 굉장히 부담스럽고 걱정스럽죠. 청소년 역사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고 기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윤혜숙 매우 공감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유튜브로 공부하고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얻죠. 이런 시대에 종이책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책과 점점 멀어지는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정명섭 텍스트를 이해하는 속도나 능력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한자를 포함한 경험이 풍부한 세대가 유리했겠지만 지금 세대는 유튜브라는 막강한 도구가 있어요. 한자를 모르는 십 대도 영상물을 통해 더 쉽게 접근하고 나름의 가치관을 형성하기에 충분하지요. 이미 제 책은 다른 작가의 책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와 경쟁을 하는 시대입니다. 굉장히 불리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것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유튜브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정보라든지 입맛대로 정보 가공이 능수능란하거든요. 예로 십 대 중반의 청소년이 여성 혐오론자가 되어 있다거나, 서울 사는 친구가 특정 지역 친구에 대한 차별의식을 드러내는 경우도 매우 많지요.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윤혜숙 이런 시대일수록 텍스트가 더 유용하지 않을까요? 책은 검증은 물론이고 기준이 정해져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쓰인 거잖아요. 정제되지 않은 인터넷 정보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능력은 독서를 통해서 기를 수 있다고 봐요. 다른 얘기로 넘어가 보죠. 역사소설의 매력 중 하나가 장르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인데요, SF, 좀비, 추리, 탐정 소설 등 어떤 장르를 쓸 때 가장 재미있으세요?
정명섭 쓰는 건 다 재미없어요. 하하. 쉬운 것도 없어요.
윤혜숙 덕후시잖아요?
정명섭 덕후는 즐길 때 덕후죠. 돈을 벌어야 하면 덕후가 아니죠. 하하. 좀비를 소재로 쓰는 창작자의 입장일 때는 분리가 됩니다. 다양한 장르를 썼던 것은 등단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호기심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전략적 결정 과정에서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장르 간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추세이고 저는 애초부터 그런 경계선이 존재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가님 작품 이야기 좀 해 볼까요? 『뽀이들이 온다』, 『계회도 살인사건』과 곧 나올 『괴불주머니』(근간 예정) 등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라고 봅니다. 초기 역사물이 왕, 궁궐, 전쟁으로 시작하여 미시사로 들어가서 여성을 다루는 게 보통의 패턴이라면, 선생님께서는 그런 과정 없이 마치 핀셋으로 집어낸 듯 바로 계회도며 전기수로 들어가서 놀라웠습니다.
윤혜숙 늘 하던 대로 드라마 보고 강좌 쫓아다니다 보니 운 좋게 얻어걸린 거죠.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게 뭐지?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면 좀 집요하게 파고드는 정도랄까? 『뽀이들이 온다는 드라마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에서 전기수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계회도 살인사건』은 사진이 없는 시절, 화공의 손을 빌려 그림으로 만남을 기록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어요. 앞으로도 누구나 쓸 수 있는 이야기보다는 차별성 있는 소재로 저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많이 다룬 소재의 이야기는 전작과 차별화하려면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죽어라 써도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전작의 위상을 뛰어넘기 힘들더라고요.
정명섭 네. 작가님은 늘 강원도 출신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얘기하시는데요.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이 작가님의 집필 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궁금합니다.
윤혜숙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지방과 서울이 20년 가까이 차이가 났었어요. 시골 아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놀이를 하면서 놀았어요. 근현대사 사건도 엄마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보고 들은 게 많아요. 어릴 때 고무줄놀이하며 불렀던 노래, 콩기름으로 교실 바닥을 닦던 일, 서울 옷 공장에 취직한 동네 언니들, 아버지가 겪었던 사북사태 등등 그런 건 몸으로 배우는 역사잖아요. 강원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았다면 저 역시 역사가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작가로서는 복 받은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정명섭 저는 한숨이 나옵니다. 군 생활 생각나서요. 하하. 여러 차례 강의나 세미나 등으로 강원도에 갈 때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요. 특히 영월 동강이요. 강원도 작가라서 혜택 받은 일도 있지 않나요? 『메밀꽃 질 무렵』(단비, 2018)과 『다시, 봄 봄』(단비, 2017)때 우선 청탁이 들어간 거로 아는데요.
윤혜숙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대표 단편인 「봄 봄」과 「메밀꽃 필 무렵」 이어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강원도에서 출생한 작가여야 한다는 거였고, 성인 소설가들 틈에 청소년 소설가로 참여했던 건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첫댓글 읽다보니 긍적적인 사고가 좀더 새로운 시각으로 글을 쓰게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되네요
두분 대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