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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문서를 정리하면서
멕시코 선교지에서 소임을 하고 계시는 정 말지나 수녀님께서 방문기를 써 보내주셔서 여기 기재해본다.
1992년 4월7일 따스코 게레로주 방문기
새벽 3시에 살며시 일어나 마고자매와 함께 준비된 우리차를 타고 시외버스 정유장을 향해 달렸다.
도시의 얼굴도 마치 잠을 덜 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계산 착오로 우리는 그곳의 대기실에서 아침 7시까지 기다려야했다.
TAXCO로 가는 첫 버스가 아침 7시에야 있기 때문이다. 차에 오르자 평소에 닦은 실력대로 눈 한번 뜨지 않은 채 TAXCO 까지 푹 자고 왔다.
9시 30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베타니아 피정의집으로 들어가는 차를 타니 얼굴이 작고 순수하게 생긴 여학생 한명과 그의 할머니가 반가와 했다.
그들도 베타니아 피정의집으로 우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운전사가 옆에 앉아 아침식사로 (토르타)라 부르는 빵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굽이굽이 산언덕을 돌아 약 반시간 후에 목적지에 닿았다.
산 꼭대기도 하얗고 가는 나무 십자가가 보이는데 아담하게 지은 봉쇄수도원 강당에서 아이들을 면접할 계획이었 다. 우리 학교에 입학하기위해 오는 졸업반 아이들을 만나야했다. 갈멜 수녀님들은 한결같이 넓고 풍성한 앞치마를 해 입으셨는데 그 색깔이 퍽 다양하고 야해서 나는 남모르게 조금 웃었다.
2층에 있는 대기소는 참 깨끗하고 조용했으며 성체가 현시되어있는 성당에는 아주 늙으신 수녀님 한 분이 돋보기를 쓰신데다가 머리까지 숙여 손바닥만 한 책을 코끝에다 대고 읽고 계셨다.
그 곳은 정말 오래 머물러 기도하고 싶도록 해 주었다.잠시 후 아이들 한명 한명이 모여들고 우리는 곧 그들과 그들의 부모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모두들 순수한 시골 소녀였다. 형제들이 보통 8명에서 10명 정도 되었다. 그 중에서 6명이 입학 하기로 결정되었다. 적은 숫자지만 우리는 이 낮선 땅에 씨앗을 뿌리는 중이다.
6명이 소년의집 증인이 되면 다음에는 60명 정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수녀님들의 배려로 소박한 점심을 먹고 그분들이 소개해주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신부님들을 찾아 터벅터벅 시골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쳤다 싶을 즈음에 성담 문 앞에 닿아 신부님 숙소의 문을 두드리니 방금 공소에 갈 채비를 마치신 신부님께서 시간을 내어주셔서 우리 학교의 설립 목적과 아이들이 받을 혜택들을 설명하고 신부님은 본당 내에 있는 아동들 중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아 보내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5월 중순에 다시 들르겠다고 말씀드리고 이곳 따스코에 있는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를 만나 같은 약속 일자를 정했다.
알타미라노로 가는 길
이곳 사람들의 말로 밤에는 따스코에서 8시간 걸린다는 알타미라노에가는 버스를 타기로했다.
어둠이 깔린 무렵 버스정류장 가까이 있는 성당을 들어가니 머리가 하얀 신부님이 마침 회의 중인 본당의 십자가 학교 학생들에게 우리를 소개해주어 약 40명의 지도자 앞에서 가난한 아이를 찾는데 협조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챨코의 우리 집에서 신선한 초봄을 살고 있던 우리는 어느새 한 여름인 이 새 지방에서 탁하고 더운 시외버스를 타고 더욱 남쪽에 자리한 알타미라노로 향했다.
밤 10시에 출발한 우리는 새벽 2시 30분에 목적지에 닿았다.
우리는 계속 시간의 착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고아처럼 우리는 버려지고 차는 훌쩍 떠났다.
한 길가에서는 음식을 다 팔았는지 희미한 전등아래 포장마차에서 여인들 둘이서 그릇과 솥, 이동용 가스를 챙기고 있었다.
아는 사람도 갈 곳도 없는 너무 이른 새벽에 거리에선 우리들처럼 모퉁이 길을 돌아 고삐 없는 당나귀 3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당나귀를 ‘부라’라고 부르는데 멍청하고 둔한 사람들에게 그 표현을 쓰기도해서 우리는 이중으로 BURRAS가 되어버려 서글프게 웃었다.
거리에서 무작정 있기는 너무 불안해서 대성당 공원에서라도 밤을 새워야겠다고 생각하여 저만치 서 있는 택시기사한테 물으니 성당 바로 옆에 수녀님들이 살고 있다고 가서 문을 두드려 보라고 했다.
가장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차마 못할 것 같았으나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한 번의 벨이 울린 후 곧 어느 수녀님의 음성이 들렸다. 짧고 애절한 우리들의 설명을 들은 후 금새 문이 열렸고 갈색 수도복을 입은 야윈 수녀님이 서둘러 문간방을 정리해 지친 우리를 쉬게 해 주셨다.
그 수녀님의 이방인에 대한 열린 마음과 재빠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애덕의 본이 될 것이다.
낯선 이들에게 친절했던 그분들은 이곳 알타미라노 교구에 온지 약 7년이 되는 글라라회 관상 수녀회 수녀님이셨다. 세상에 나가 굳이 성소자를 찾지 않아도 현재 회원이 19명이고 지원자가 줄을 잇는 축복받은 공동체였다.
새벽기도 후부터 전 형제들이 각자의 몫을 하여 분주히 오가고 한분은 쉬지 않고 제병을 만드시고 그 분은 계속 바느질을 하시고 어느 분은 빨래를, 설거지를, 청소를 하는 모습이 퍽 아름답게 보였다.
그 안에 침묵과 평화가 감돌았다.
미사 후 수녀님들이 준비한 계란 요리에 고추와 토마토를 갈아 만든 양념장과 토스트를 먹었다.
이곳 주교님의 배려로 외곽지대에 있는 신학교에서 오전 10시에 아동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 낫선 땅에서도 지극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황송했다.
4월은 황무지 계절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다한다.
이곳의 4월 또한 너무너무 건조해서 자기들끼리도 불을 일으킬 것 같았다.
물기도 서늘한 바람도 없는 신학교로 가는 길을 건널 때 초등학교 3학년 까지만 공부하고 염소를 먹인다는 소년하나가 조그만 당나귀를 타고 자기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그 아이가 참 부유하게 보였다.
나도 철부지처럼 당나귀 한 마리를 가지고 싶어졌다.
그 부라라는...
아이들과의 면접
소신학교에서는 약 30여명의 젊은이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나무 우거진 정원 뒤에 있는 강당에서 우리는 순진한 어린이 8명을 면접하고 입학결정가지 내렸다.
너무너무 더웠다. 거리에서 파는 수박을 갈아서 얼음과 설탕을 넣은 물이 먹음직하게 보였다.
이곳의 잠잠한 더위는 필리핀의 것보다 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에는 주교님 비서 신부님을 만나고 그리고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닭 장사를 하고 “닭고기” 라는 별명을 가진 아저씨가 자기 짐차에 우리를 태워 오후 수업이 있는 세 초등학교와 성당 한 곳을 방문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음날은 (알투로)신부님의 도움으로 다른 아저씨 한분이 약 10년을 사용한 것 같은 하얀 고물 자가용을 가져와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친절보다 더 뜨거운 더위 때문에 옷이 젖었다 말랐다 했다. 정오였었다. 초등학교 세 군데를 방문하고 흥분한 그녀들과 직접 이야기 한 후에 그 다음 가는 길인데 차에 기름이 떨어졌다.
멋쩍게 웃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위로하고 우리 수녀 두 사람이 차 뒤 꽁무니를 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금새 이곳 소 도시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겨우겨우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운 후 서너 개의 학교를 방문하고 나니 하교시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수녀원으로 돌아오면서 그 운전해준 아저씨께 한국에서 보내주신 작은 일단자리 묵주를 감사표시로 드렸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한결 같이 친절하신 수녀님은 우리의 오후 계획을 물으셨다.
우리는 그 곳 알타미라노에서 10시간 거리에 있다는 똘리파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너무 멀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중간 지점인 게레로 주의 중심 도시인 칠빤씽고에 가기로 했다. 약 6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오후 1시에 직행버스가 있다는데 우리는 막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수녀님이 미리 연락해서 1시 버스가 5분간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갑자기 긴 갈색 수도복에 흰 수건으로 얼굴만 동그랗게 내 놓은 수녀님들이 뛰기 시작했다. 대문간에서 서둘러 인사를 하니 수녀님 두 분이 따라 나오셨다.
요구루트 2개, 오렌지 한 봉지, 이것저것 들고 나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들이 부산을 떤 이유를 알았다.
한 길을 막 벗어났는데 청년 한명이 밥을 담은 비닐봉지를 주면서 수녀님이 보내셨다고 했다.
이 극성들을 우리는 형제애라고 부를 것이다.
정말 버스가 길거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들어 답례하고 우리는 덥고 긴 여행을 시작했다.
오후 5시에 게레로의 중심도시 칠빤씽고에 도착했다.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NEXICO로 들어가는 버스시간을 물어본 후 무작정 주교관 성당을 찾아 갔다. 안내실에서 2층에 있는 신부님들 사무실로 올라가 보라고 했다.
여러 개의 문들 중 하나를 두드리니 쉰이 넘게 보이는 키가 작은 신부님이 나오셔서 우리 방문 사정을 들어주셨다.
방금 미사를 마친 다른 신부님들도 올라 오라고해서 우리는 연거푸 4분의 신부님들도 만나고 또 하루저녁 묵어갈 장소도 청했다. 주임 신부님의 허락으로 에우티비오 신부님의 사제관 가까이 있는 작은 방문을 열어주셨다.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신문지와 소복이 쌓인 먼지, 그리고 녹이 쓴 간이침대가 아무렇게나 놓인 것이 숨을 꽉 막히게 했다.
우리는 서둘러 청소를 하고 쓰레기들을 버린 후 대충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준비했다.
도시 중심에 자리한 이 성당은 크고 아름답게 지어졌으며 성당 한 켠에는 성체가 모셔진 또 다른 방이 있어 열심한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에우티미오 신부님이 집전하는 성시간에 참석해 우리도 모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조배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내 안에 있는 엄숙한 얼굴을 향한 어떤 할머니가 장궤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어떤 젊은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분심이 든 나도 그 분을 쳐다보니 아무런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마치 귀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이 그 여자 가까이 다가가 얼굴에 있는 작은 뽀드락지를 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눈을 꽉 감아버렸다. 이곳에서는 웃을 일이 너무 많았다. 성 시간 후 사제관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의 정겨운 방으로 돌아오니 밤 10시였다.
시장 거리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에 잠을 깨니 새벽 5시, 우리는 밤새 벼룩의 밥이 되었음을 아침에야 알았다.
어느 은퇴 여 교사가 이곳 빈민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기 위하여 오셔서 우리와 함께 언덕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이에 비해 제법 높은 구두를 신은 이 친절한 선생님은 잘 걷지 못하셔서 우리끼리 두시간만에 끝낼 정도의 일을 천천히 그분의 팔을 부축하여 걸어서 5시간 걸려서 끝내었다.
급한 나의 성질은 여름 햇볕아래 있는 나무이파리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오후에는 서둘러 그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그분을 떠나보내고 택시운전사의 도움을 힘입어 우리끼리 돌기 시작하였다.
3개의 본당을 방문하여 신부님들과 약속 날짜를 정하고 산동네에 있는 어느 의사선생님의 도움도 청했다.
오후 4시에 길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에오니 신부님들이 한결 같이 눈을 흘기셨다.
우리가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정이 많은 이분들에게 음식은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저녁미사는 그 곳에서 조금 올라가서 공원 뒤쪽에 자리한 성 마태오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했다. 그 성당에서 청소년 사업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친절하고 진지하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미사 후 우리는 지난밤에 준비한 감사의 말들을 적은 작은 카드들을 신부님께 드리고 우리 집을 향하여 출발 했다. 그 곳에서도 맥시코로 가는 차가 매진되어 두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오후 6시에 집에 도착하니 모두들 반가워했다.
찹찹하고 맑은 우리 집의 공기 또한 새롭게 느껴졌다.
하느님은 성모상의 장미 밭에 더 많은 꽃을 피우시고 나무와 잔디위에 초록색을 덧칠하셨다.
저녁의 짧은 회의 후에 내일 있을 뿌에블라의 방문도 마고자매와 내가 가기로 했다.
본당 신부님이 직접 우리 집에 와서 보고 자기본당에 있는 아이들이 공부하고 싶다며 모여든다고 전화하셨단다.
아후아까 틀란 인디안마을 방문
아침 6시에 묵상 기도만 끝내고 우리는 성당을 빠져 나와 쁘에블라로 향하였다.
이 지방은 찰코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고산지대로서 침엽수가 빽빽이 고속도로가를 장식하고 있는 푸르고 역사 깊고 아름다운 곳이다. 신부님이 일러준 성당에서 우리는 길을 안내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지주일이라 성당을 둘러싼 길목에서는 인디안들이 엮어서 만든 아름다운 빨마 가지들이 줄줄이 널려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발을 하고 허름한 큰 청색 겉옷을 입은 작은 소녀가 갈대같이 길쭉한 연두 이파리위에 활짝 핀 백합 하나를 꽃아 코 앞으로 세워 들고 가는 모습이 예뻤다. 성당 안을 기웃거리다가 4, 5명의 수도자들이 작은 수첩 같은 것을 들고 신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옆의 젊어 보이는 수녀님께 몇 가지를 묻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게 되었다. 그 수녀님은 목을 바로 세우며 자기 수녀원을 짓는데 원조가 필요해 본당 신부님의 허락 하에 티켓을 팔게 되었다고 했다. “이만 페소밖에 안 해요”
‘맙소사 이만 페소면 이 나라 노동자들의 하루일당보다 높다.’ 나의 생각이다.
수녀님은 또 덧붙여 “운이 좋으면 냉장고도 탈 수 있고 텔레비도 탈 수 있어요 ” 한다. 또 슬며시 감초영감 기질이 나와 한마디 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에서 할 일이 아니지요 특히 표를 파는 것은요. 마치 중세 교회가 면죄부 때문에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것처럼 이것도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나의 이 말에 수녀님은 하루를 잡친 얼굴을 하셨다.
나는 예수님께만 보이도록 혀를 잠깐 내밀고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어떤 사람을 찾아다녔다.
결국 한 시간 후에 우리는 가지고 있는 주소를 따라 우리끼리 찾아보기로 했다.
아후까를란 성당을 물으니 한 시간 반을 산속으로 들어 가야한다고 했다.
도로공사가 한창인 황토길을 지나 한참을 가니 인적이 전혀 없는 깊은 산이다. 이 산에서 저쪽 산으로 이어진 끝없는 길, 안개가 여전히 산 허리에 걸린 곳을 지나는 기분은 신비로웠다.
간간이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는데 그곳은 누군가가 잘 닦아놓은 초원 같았다. 운전수의 말이 그것도 자연적으로 있던 것이라 했다.
이제부터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길가를 조심스레 걷고 있던 인디안 가족더러 차를 타라고 권했으나 수줍어하면서 올라왔다. 웃고있던 그의 아내와 6살 먹은 터벅머리소년은 전혀 서반아어를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했다. 나는 속으로 고생하며 서반아어를 배웠는데 이 산골짝에서는 쓸모가 없구나 싶어 억울하게 생각했다.
드디어 저 쪽 산 중턱에 큰 스페인식 성당이 보였다.
꾸불꾸불 돌아가니 장날인지 광장에 천막이 처지고 사람들이 모두 갈색얼굴, 흰 목면옷을 입은 인디언들이었다.
이조시대의 장날, 그 텔레비에서 보았던 흑백의 모습이었다. 언덕을 돌아 성당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고유의 복장을 하고 미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달 공주가 된 우리
본당신부님은 인디안 출신으로 검은 피부에 활동적으로 보이는 분이셨다.
얼마 후에 성지주일 미사와 예절이 시작되었고 등에 업힌 아기와 손을 잡은 어린이까지 700명은 될 듯이 보였다.
성당은 언덕위에 지어졌으므로 약 50미터의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 밑에서부터 예절은 시작되고 우리는 성당 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이크로 퍼져나가는 사제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준비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군중 속에 있었다.
그의 갈색머리는 등 부분에 보라색으로 한번 묶여져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의 손에는 일제히 빨마가지들이 들렸고 그 자연스러운 흔들림과 끊임없이 모여드는 검정치마를 입고 두 가닥 머리를 길게 땋은 여인들의 모습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과 같았다. 사제는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우리 마을에 받아드리자” 고 하셨다.
행렬이 흔들거리며 성당으로 들어서고 사람들은 조용조용 호산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신부님은 하얀 수국 한 송이를 들고 성수를 흠뻑 적셔 군중을 향해 뿌렸다.
그 꽃에 가득하던 거룩한 물이 푸르르 푸르르 우리위에 떨어졌다.
미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제단에 서신 신부님이 우리일행을 부르셨다.
그 비좁은 사람들의 틈을 빠져 앞으로 나가니 우리에게 인디안 풍습 중에 친구로 받아드린 사람에게 꽃을 주는 것이 있는데 우리도 오늘 그 꽃을 받아야한다고 하셨다. 웃음을 곧잘 보내왔던 한 여인이 노란 들꽃을 엮은 꽃관을 우리머리위에 씌워주시고 하얀 글라디오라스 2가닥을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영낙없이 촌스러운 성녀들이 되어버렸다.
막시 자매는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고 나는 맞은편에 깃발들을 들고 앉은 족장들을 바라보며 멋쩍어했다.
잠시 관을 벗어 의자에 놓으니 미사가 시작되었다. 수백 명의 인디안들 앞에 앉아 미사참례하며 나는 부끄럽고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신부님께서는 우리 쪽을 보시더니 작은 목소리로 원주민을 화내게 하지 않으려면 그 꽃관을 다시 쓰라고 하셨다. 딴 세상에 온 우리는 억지춘향이처럼 그 노란 꽃 관을 다시 머리에 얹었다.
엄숙하고 아름다운 미사는 끝났다.
우리들의 어렵고 힘든 배역도 끝났다. 신부님의 소개로 벌써 많은 아이들이 우리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먼저 학부형들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아동들은 개인 개인으로 한명씩 면접을 했다.
형제가 열 두명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순진하고 수줍은 그들과의 면접을 끝내고 나오니 오후 6시,우 리는 그때서야 손을 씻고 신부님의 친척이 해주신 콩을 넣어 만든 닭고기요리와 파파야 코코낫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점심삼아 먹었다.
개구쟁이였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신 신부님께 감사인사 드리고 어두운 산길을 조심스레 내려와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였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우리가 온달공주 되는 모습을 보시며 천국에서 웃으실 아버지 신부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수녀님, 제가 짬내어 수녀님들께 최대의 사랑으로 사랑을 담아 이야기를 부활 선물로 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늘 하나로 살며,
정 말지나 수녀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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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부님 선종하신 그 해, 남겨진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봅니다.
성인조사에서 그분이 남긴 수도회의 수도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가 유력한 증거가 된다고 합니다.
문서 정리를 잘 해 주신 수녀님 덕분에 멕시코의 초창기 모습을 읽을 수 있어 참 고맙습니다.
창설신부님의 선교지를 향한 열정은 성령의 불처럼 뜨겁기만 합니다.
그 제자들인 수녀님들은 그 정신을 따라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 하느님의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