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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쟁이다! (6.25전쟁 사진집) 05
7월 하순 :
내가 그 산을 보았을 때는 이미 공격이 시작되고 24시간이 지난 후였다. 가을은 아직 산허리를 드레스처럼 휘감고 있는 논과 콩밭의 초록빛을 얻게 만들지 못했고, 여름의 해도 산봉우리로부터 뻗어 내린 계곡들에 펼쳐져 있는 얇은 안개를 뚫고 그 힘을 과시하고 있을 때였다.
자그마한 검은 빛을 띤 제비 한 마리가 내 옆을 지나 논 위로 낮게 스치듯 날아가 아주 작은 벌레를 잡아 바로 앞에 있는 미루나무 위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햇빛이 산마루와 내 주변의 들판을 비추어 훈훈하게 느껴졌고,
심지어 전쟁이 멀어진 것 같았다.
얼마 후 난 미루나무가 서 있는 시내를 가로질렀고, 풀들로 덮인 깊은 진흙탕 속에서 땅을 파헤치고 있는 한국군 포병들을 보았다. 그들은 한국전쟁 동안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17연대의 포반 병사들이었고, 지금은 산 정상 주변과 거기에 있는 적의 토치카에 75밀리 야포로 직접사격을 할 수 있는 포진지를 파고 있었다.
모든 작전 상황도와 포병 지도에 그 고지의 높이는 626m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산들이 지나갔으나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전쟁이 진행 중이나 목표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여러분이 명령을 받고 그 언덕 위에 있는 순종적인 한국군 징집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될 만큼 운이 나쁘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탄약통을 지고 그 산속으로 전보다 더 높이 구불구불 올라가는 시골 농부들의 긴 행렬과 비틀거리며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한 무리의 부상병들이 평화의 환상이 거짓임을 산 아래 계곡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 응답하듯 차례대로 두 번의 기관총 일제사격 소리가 정상으로부터 아래로 울려 퍼졌다. 이 626고지는 위태로운 부산 방어선에 연결되는 중심축에 해당하는 최전선이었다.
부상자들을 위한 구호소로 이용되고 있는 자그마한 농가 가까이에서 나는 군대의 경고를 모르는 채 자기 집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던 말없이 긴장한 얼굴의 한 시골 여자를 붕대로 감싸주고 있는 두 명의 위생병을 발견했다.
공산군의 폭탄 한 발이 그녀의 머리 안으로 파편을 박히게 했다. 지금 그녀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끄떡없다는 태도로 쪼그리고 앉아서 위생병이 강철 파편조각을 제거하려 애쓰는 동안 그녀에게 바싹 달라붙어 있는 어린 아들에게 아침 젖을 먹이고 있었다.
붕대를 감고 오두막의 벽에 가까이 기대어 서 있는 그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몰라 보였다. 그때 그녀의 이웃이 다가와 내 어깨너머로 그녀에게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불행한 소식의 충격으로 그녀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고,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그녀의 눈은 일그러졌다. 그녀의 또 다른 아들이 조금 전 폭발로 인해 사망했던 것이었다.
구호소 남쪽에 있는 콩밭 가에 낯익은 인물이 나타나 세밀하게 포대의 포상설치 상태를 살펴보고 서 있었다. 그는 17연대가 속해있는 국군 수도사단의 미 군사고문단 대표인 프랭클린 패리스 중령이었다. 그는 예정보다 하루 이상 늦어진 지금 공격을 앞당길 수 있는 어떤 해결책을 찾기를 바라면서 '기계(지명)'에 있는 사단사령부로부터 도착했다.
군사고문단의 기능이 자문 역할로 엄격하게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패리스 중령이나 그의 보좌관 또는 육군본부에 있는 그의 상관까지도 어떤 것이 한국군들이 전선에서 사용할 가장 좋은 방법인지 단지 제안만을 할 수 있었다.
각 고문관은 그 역할을 국한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게다가 "민감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다치게 하지 말 것"을 분명히 하는 지침까지도 받았다. '끝장날 때까지 질질 끄는 형태의 전쟁'의 시대에 거의 전체가 경험이 없는 신생 군대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특히 전술적인 면에서 가장 폭력적이었고 복잡했던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여했던 베테랑들에게도 달성하기 어려운 명령들이었다.
그 산은 실제로 높진 않았지만, 범위가 넓었고 또 구불구불했다. 계곡에서 바라 보았을 때 그 산은 야생의 관목으로 뒤덮인 편자처럼 보였는데, 그 뾰족한 굽 날들이 계곡을 가로질러 오른쪽 아래로 휘어지고, 구호소와 포대가 있는 좁은 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공격 2일차 아침에 한국군들이 그 산의 두 굽 날의 언덕을 차지했고, 반면에 공산군은 산봉우리와 정상 주변을 감시할 수 있는 토치카를 차지했다. 산봉우리와 산 정상 주변을 차지함으로써 공산군은 이론적으로는 산 전체와 계곡 바닥까지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2일차 아침에 그들은 분명히 포병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깊이 참호를 파고 들어가 있는 소규모의 수비 병력만을 정상 부위에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한국군 포병들은 전혀 전력 손실을 입지 않고 적의 목표에 직접사격을 할 수 있었고, 구호소의 사람들과 보급 트럭의 이동, 그리고 탄약의 추진보급이 적 사격에 대한 추후의 염려도 없이 야지와 도로를 따라 이루어 졌다. 그것은 공격을 위한 교과서적인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그 전날, 동해안의 포항 바로 북쪽의 모래언덕 지대에 있던 한국군 3사단과 함께 공격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떤 사진도 찍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한국 군인들이 매시간 막 밀고 나아갈 듯이 사격을 했었던 박격포와 기관총들을 침묵시키고, 미 해군과 공군의 타격을 기다리면서 모래언덕을 따라 파놓은 참호 안에서 거의 빈틈없이 촘촘히 앉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관심을 잃어버린 나는 8사단이 새로이 재편성되어 경험 없는 부대로 채워졌다는 핑계를 받아들였다. 나는 3사단의 좌측에 있는 전설적인 17연대가 속해 있는 수도사단 쪽으로 장비를 옮겼다. 17연대는 빛나는 전투 성과들을 거두었다고 보고 되었고, 바로 그날도 산허리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282명의 적을 사살했다는 단신이 전해졌었다.
패리스 중령과 함께 공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 있을 626고지의 긴 남쪽 능선을 오르기 바로 직전에 나는 우연히 내 마음속으로부터 밀려오는 모든 오래된 의심들이 일어나는 보고를 들었다. 분명히 내가 연대 지휘소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산의 북쪽 능선을 공격했던
그 장교는 자기 부하들이 정확하게 계획대로 목표를 탈취했다고 보고했었다. 그런데도 사실은 그때 산 정상 부근 천 야드 이내에는 아직 활동하고 있는 한국군이 없었다. 그 연대장은 목표를 탈취했다는 희소식을 사단으로 보고했고, 사단은 군단으로 보고했다.
바로 그 순간에 한국군 지휘부의 긴급 요청에 응답하여 미 공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고폭탄과 소이탄을 달고 산을 선회하고 있는 전투폭격기들이었다. 그들은 평상시의 간결한 질문으로 어디를 폭격하기를 원합니까?" 하고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국군 지휘부는 허위보고를 감추고 또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산은 그들의 것이고 폭격이 더는 필요치 않다고 비행기들과 무선으로 교신했다. 패리스 중령과 나는 오전 중반쯤에 남쪽 능선을 장갑차를 따라 올라가서 626고지의 마지막 공격을 위해 측면지원을 제공하고 있는 기관총 사수들의 전방 진지에 마침내 도달했다.
깊고 오히려 넓게 조치한 골짜기가 우리를 산 정상 부위와 토치카로부터 분리했다. 바위와 덤불 가운데 누워서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끔찍한 열기로부터 조금이라도 탈출해보려고 애쓰며, 우리는 쌍안경으로 반대편 능선을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놀랍고 기쁘게도 한국군들이 멀리 아래 관목 숲 지대를 통해 쏜살같이 목표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래쪽의 흔들리는 그림자들로부터도 위쪽의 토치카로부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오 직전에, 한국군들과 함께 공산군들의 사계청소로 거의 불모지가 되고 돌투성이의 가파른 둥근 언덕에 도달하기 전에 있는 촘촘한 수목 지대를 기어오르고 있을 때, 갑자기 적막함을 깨뜨리고 산 정상에 섬광과 함께 모든 것들이 난무했다. 계곡 아래로부터 대포와 박격포들이 적이 있는 산 정상 부근에 쉬지 않고 포를 쐈다.
몇 발의 포탄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같은 적 토치카 바로 위에서 직접 터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능선을 따라 모든 기관총 사수들이 내내 귀를 찢는 듯한 사격을 했는데, 예광탄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반대편 산허리에 부딪혀 번쩍였기에 그 궤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어떤 대응 사격도 없었다. 그런데 경고도 없이 적의 박격포가 산 정상 부근의 은폐된 진지로부터 발사되어 한국군들이 오르고 있는 수목들 사이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국군들은 토치카를 향해 계속해서 기어 올라가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공산군 박격포수들이 사거리를 줄여 한국군 머리 바로 위에 포탄들을 쏟아 부었다. 패리스 중령과 나는 쌍안경을 통해 공산군들이 진지에서 똑바로 일어서서 언덕 아래로 수류탄을 연속 투척하고, 그 수류탄들이 공격하는 한국군 가운데서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패리스와 나는 단 한 명의 한국군도 방향을 돌려 언덕 아래로 후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국군들은 모두 수목 사이에 있는 제법 큰 호박돌이나 작은 바위들 가까이에 몸을 숨기고 어깨를 잔뜩 굽히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군을 지원하는 포나 기관총들은 한국군들이 626고지 정상 부근에 적과 너무 근접해 있어서 아군의 피해 없이 사격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멈춰야만 했다. 공산군들은 한국군들이 조금 아래로 물러나 참호를 파자마자 곧 사격을 멈췄다.
폭발음의 메아리가 계곡 속으로 사라지고, 산은 조용해졌다. 나는 사진을 찍기엔 너무 멀리 있었고, 한국군 부대가 사살했다고 보고한 공산군 282명의 어떤 증거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래 골짜기를 지나 참호 속에 있는 한국군 바로 뒤에 다다를 수 있는 먼 후면을 오를 생각으로 능선 옆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내가 626고지 옆을 지날 때 해가 산 아래로 지기 시작했다. 나는 종전의 전투에서 너무 심하게 부상을 입은 한국군 병사들이 스스로 휴대하지 못하고 떨어뜨린 소총들을 등에 지고 구부정하게 이동하는 지게꾼들을 여러 번 만나며 지나쳤다.
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보고했던 적군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 기관총들이 바로 앞에서 사격을 개시했고, 수류탄들이 가까이에서 터졌다. 박격포 포탄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마다 머리 위 나뭇가지 가까이에서 폭발했고, 나는 30여 분 동안이나 두 개의 돌무더기를 방패삼아 몸을 눕히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울부짖음이 능선 쪽에서 들렸는데 나보다 운이 좋지 않은 누군가가 박격포탄에 맞은 것 같았다. 일제사격이 잠시 그치자마자 나는 다시 관목 숲을 지나 산의 최정상 부근을 향해 뚫고 올라갔다. 내가 첫 번째로 본 한국 군인은 머리를 교통호 아래로 두고 왼쪽 다리와 넓적다리가 박살난 채로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동료 두 명이 덤불로부터 천천히 나와 산 아래로 그를 운반하기 위해 어린나무들과 덩굴을 엮어 임시 들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들것을 만드는 동안 그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눈이 부시는 햇살을 가려주기 위해 나뭇잎으로 그의 눈을 덮어주었다.
식량을 수송하는 보급대가 전선의 장병들에게 가는 도중 아무 말 없이 부상병과 그의 동료들을 조심스럽게 지나쳐 갔다. 나는 이들을 따라나섰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발목이 부서져 말없이 고통을 삭이고 있는 또 다른 부상병이 길을 따라 있는 담에 기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동료는 식사를 마치고 누군가 이 부상병을 한참 아래에 있는 기지까지 같이 운반해 주기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을 향해가는 길은 공산군의 포화가 그들에게 떨어지기 전에 숨을 곳을 찾기에 충분히 빠를 수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지역에 박격포 포탄이 꽤 많이 떨어졌으나 인명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산허리를 따라서 252명의 적이 사살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나는 단 한 명도 보진 못했다.
산 정상 근방의 토치카로부터 백 야드도 채 떨어지지 않은 전방 진지에서 한국군 병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저녁밥을 분배받고 있었다. 병사들이 식사하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는 양쪽의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한국인의 계약'과 같은 무엇이 아마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는 두 개의 수통을 보았다. 나는 어떻게 한낮의 무더위에서 이것들이 남아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내가 능선을 올라 그들 곁을 지나갈 때 부상병들이 내 다리를 잡을 때 내가 적어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마침내 산 전체에 한국군 병사들이 산재해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만족한 듯이 상부로부터의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단 한 명의 한국군 장교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그들은 정찰 중이거나 아니면 좀 떨어진 통나무에 앉아 식사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분명히 지휘자가 전혀 없는 것 같았고 적의 박격포 공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다 같이 모여 있었다. 아무도 해질녘의 공격에 다시 토치카를 타격할 의도를 갖지 않은 것 같았으나 그들은 최대한 토치카 가까이 접근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그렇게 했다.
한국군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나는 모든 미군 보병 중대에 그들 100명씩 편입시키려는 소문에 가까운 제안이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군인의 보통 수준의 리더십과 전우애 정도만 가지면 저 한국 군인들이 분기하여 북으로 반격해 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또한 후퇴하며 지쳐버린 미군들이 피난민들에 대한 폭력 행위로 야기되는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답을 찾는 계기가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내가 산에서 내려올 때는 거의 해 질 녘이었으나 그렇게 어둡지 않아서 구호소에 이르는 길이나 골짜기로 가는 통로 등을 가리키는 좀 더 어두운 빛깔의 표시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구호소에는 부상병이 오기를 기다리는 위생병들은 없었다.
구호소가 있던 오두막은 어두컴컴했고 비어 있었다. 분명히 두 발의 박격포 포탄이 대대 지휘소가 있던 마을 가까이에 떨어졌다. 대대장은 즉시 전부 철수해서 길을 따라 1마일 후방에 지휘소를 신속히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
능선 위에 있는 병사들과의 모든 접촉이 끊어졌다. 부상자들은 이제 아주 거칠고 간단한 의무조치를 받으려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1마일을 더 걷거나 기어서 와야만 했다. 밤이 산 위로 올라왔고, 626고지는 아직 적군의 수중에 있었다.
패리스 중령이 못쓰게 된 구호소 가까이에 나를 위해 남겨놓은 지프를 타고 '기계(지명)'로 돌아가기 위해 막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길은 논 사이로 뚫린 모래 오솔길 같았다.
모든 것이 공산군에게 유리해졌다. 특히 한국군과의 통신선이 너무 과도하게 확대되는 바람에 모든 교신이 단절되었다. 사단 지휘소에서 나는 패리스 중령이 그의 보좌관과 함께 심각하게 토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에 실시하기 위해 제시된 작전 계획들을 지도에 표시해 놓으며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그 사무실의 반대쪽에 있는 방의 분위기는 유쾌하지 못했다.
수도사단의 사단장인 백인엽 대령이 느리고 민감한 목소리로 자기 참모들을 세워놓고 꾸짖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알 필요가 없었다. 나는 먼저 그의 이글거리는 눈과 경멸에 찬 얼굴을 보았고, 다음에 어둑어둑한 어둠을 뚫고 탁자를 가로질러 굳은 얼굴을 하는 그의 부하 장교들을 보았다.
분명히 이들이 지난 이틀간의 형편없는 공격 같지 않은 공격의 책임자들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한국군에서 최고의 공격 전술가로 알려진 사단장에 의해 질책을 받고 있었다. 젊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인 백 대령은 역시 젊은 군대인 한국군에서 거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전쟁이 막 발발했을 때 그는 지금은 자기 사단의 예하에 있는 17연대의 연대장이었다. 그가 이끌었던 전투에서 너무나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그는 한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승진을 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최고 부대인 수도사단 전체의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또한 백인엽 대령은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쇄도해 내려올 때 그들과 싸운 전투에서 부상을 세 번이나 당했다.
전쟁이 일어난 그 날에 17연대는 옹진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공산군이 침공한 첫날 옹진반도는 서울이나 후방과의 모든 통신이 끊겼다. 그때 백 대령은 다른 한국군 지휘관이나 미군 지휘관과는 아주 다르게 이 전쟁에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그 무엇 인가를 했다. 그는 38선을 넘어 공산군을 향해 북쪽으로 공격을 명령했고, 해주시의 핵심부를 점령했다.
그는 침략자들을 공격하여 북으로 퇴각시킨 유일한 한국군 장교였으나 그의 연대는 완전히 적에게 포위되었고, 이번에는 포위를 뚫고 아군이 있는 남으로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연대병력을 데리고 적의 중심부를 공격하여 38선을 다시 넘어온 후 2500명의 연대병력이 다시 북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함으로써 한국군 수뇌부의 전 일반 참모들을 매우 놀라게 했었다.
지금 그의 사단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퀴퀴하고 후미진 옛 교사에서 그는 자기의 지휘소로 온종일 넘쳐흘렀던 작전상황에 대한 진상을 감춘 허황한 보고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내가 아직 산의 능선에 있을 때인 오후 늦게야 백 대령은 직접 진실을 알게 되었었다.
그들이 공격의 실패를 그에게 감추려고 한 것도 충분히 잘못된 사실이었지만, 그들 바로 위에 적들이 있고, 고립되어 후방의 지원을 위한 어떤 직접적인 접촉도 끊어진 626고지 주변 전방 진지에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한 부상병들을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격노케 한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17연대 병사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 그들은 그를 사단장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싸웠고 그들과 함께 피를 흘렸다. 회의실에 있는 누구도 그가 발을 구르고, 아직 멜빵끈을 걸친 왼팔을 휘두르고, 붕대 감은 오른 손으로 문을 잡고 흔들 때, 그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았다.
얼어붙어 있던 참모들이 흩어져 어둠 속으로 나갔다. 전조등이 켜지고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은 전방으로 출발했다. 나는 패리스가 불참했기에 내가 한국군 스타일의 마지막 군법회의에 입회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