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무력을 행사하여 포로들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탈출시켰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전가하고 있으나 사실은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휴전협상에
있어서 미국측의 성의를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공산 측은 "미국은 꼭두각시 한 명도 통제하지 못하나? 이승만이 휴전협정을 지킬 것이라고
무엇으로 보증하나? 이승만을 끌어와 협정에 서명시키라"는 등 성화를 부렸다.
어렵사리 타결된 포로 송환 협정문을 책상 서랍에 다시 넣어 둔 채 양측은 이제 상대방이 아니라
이승만과 협상해야 하는 제2의 협상 국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제야 세계는 이승만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결코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미국만 믿고 있다가 이승만의 한방에 휴전은 물 건너가게 생겼잖은가. 이승만이
언제 또 무슨 '휴전방해' 돌발 행동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단독 북진' 주장도 허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유엔참전국들은 미국을 붙잡고 “이승만을 없애든지 달래든지
휴전을 마무리하라"고 다그치며 흔들었다.
훗날 중공 마오쩌둥은 말했다.
"정작 무서운 적은 미국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이승만이었다."
1953년 6월 2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동란 발발 3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은 역설하였다.
중공군은 휴전협정 조인 전에 한반도에서 반드시 전면 철퇴해야 하고, 한미 방위조약도 휴전협정
조인 전에 반드시 조인되어야만 한다. 휴전 후 진행하겠다는 미국 제안의 정치회의는 3개월
이내로 끝내야 하며, 만일 통일문제 해결에 실패하면 단독으로 통일전쟁을 할테니 국민은
단결하라.
이에 화답하는 '휴전 결사반대', '단독 북진통일', 시민들의 함성이 하늘을 울렸다.
지난 연초부터 이승만은 전국적인 휴전 반대 시위를 강화하였다. 부산 정치파동 때처럼
방방곡곡의 지방의회 조직을 총동원, '국민의 힘으로 목표 달성'을 위하여 국제심리전까지
구사하였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은 "부모가 죽은 것처럼" 울부짖고 통곡하다가 실신하기도
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하였다.
아이크 특사 로버트슨은 도쿄에서 클라크를 만난 뒤 6월 25일 그밤에 서울에 들어왔다.
마침내 한국 대통령은 한국전쟁 3년 만에 전쟁 종결권을 한 손에 틀어쥐게 되었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돼야 한다. 판문점 휴전 합의들은 전면 파기하고 유엔군은 다시 북진해야 하며, 압록강·
두만강에 태극기 휘날리는 날 통일도 한미 방위조약도 동시에 쟁취해야 한다.
"미국과 소련이 갈라놓은 우리 국토를 미국의 힘으로 통일시키는 순간이 곧 휴전이다."
이승만의 선언이다.
- 인보길 저,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