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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순 목사
요즈음에 ‘예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열린 예배’, ‘워십’, ‘예배갱신’ 이라는 말들일 것입니다. ‘열린 예배’라는 것은 미국의 한 교회에서 새 신자들이 거부감이 없이 예배드리게 하려고 시작한 ‘구도자예배’라는 것이 오늘날 무엇이든지 가볍게 하려는 풍조와 맞아떨어져서 유행하게 된 것이고, ‘경배와 찬양’이란 것도 부담스런 설교 보다는 흥겹고 감정을 터치하는 음악을 주로 원하는 신세대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운동이며, ‘워십’이라는 말은 본래 ‘예배’ 라는 말인데, 요즘에 유행하는 ‘워십’ 이라는 것은 복음찬송 곡에 맞춰 춤추는 것을 ‘워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배갱신’이라는 것도 좋은 말이긴 한데 성경적인 예배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아닙니다. 요즘 예배갱신운동의 핵심은 성찬식을 중시하자는 것인데, 그들은 성찬의 떡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면서, 목사가 그것을 높이 쳐드는 것을 예수의 몸을 우리의 구속 제물로 바치는 제사라고 하는 카톨릭 신학을 전파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 워십, 예배갱신, 이런 단어들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가장 ‘성경적인 예배’와 ‘그 능력’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돈 버는 것일까요? 건강유지를 위해서 운동하는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곧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이 땅에서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만들어 생명을 주고 삶의 기회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4:23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애써 찾으시고 그에게 큰일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예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절차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생명을 받아서 누리는 우리가 만나는 절차인 예배는 생명의 통로인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육체도 회복됩니다. 또한 예배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무능했던 사람이 유능해집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자기 사명과 갈 길을 깨닫게 합니다. 사명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자기가 생명 걸고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힘차게 그길로 출발합니다.
지난주일 예배드리러 와서 설교를 들은 성도 중에 한 분은, 신앙문제로 시어머니와 많은 충돌을 겪었고 그것 때문에 너무나 고통 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의 갈 길을 찾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힘들게 하는 시어머니를 자기가 모시고 사랑으로 섬겨서 그분의 영혼을 구원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시댁을 구원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험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감으로서 시댁가문을 미신과 불화의 환경에서 구원하겠다고 눈물로 단단한 결심 했습니다. 참 장한 일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효과입니다. 예배는 생명이요, 예배는 능력이요, 예배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배의 이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에서 예배가 무엇인가? 어떻게 바른 예배를 드릴 것인가를 배웁시다.
본문 5:1에 보면,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예배가 무엇인가가 들어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서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드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오기는 하지만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그동안 바른 예배 드리셨습니까? 예배에 성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자신의 예배를 한번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오기만 해도 변화를 받을 수가 있을 것이고 능력으로 무장될 수 있는데, 말씀이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참석했는데 왜 설교가 안 들릴까요? 사람의 마음이 부패해서 자기에게 이로운 것은 잘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기심이 가득해서 자기 말만 상대에게 주입하려고 하지 남의 말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고, 그래서 예배는 참석해도 듣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 마시면서 하는 대화를 들어보셨습니까? 고함치듯이 큰 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가 자기 말 좀 하려고 하면 얼른 가로채서 자기말만 되풀이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술 취한 사람들만 그럴까요? 국회에서 대정부질문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국회의원은 꽤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많은 준비를 해가지고 와서 대정부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각종 자료와 논리를 동원해서 멋진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정부 측 사람이 나와서 답변을 하려고 하면, 제대로 듣는 의원이 없습니다. 답변을 하는 사람의 입을 막고 자기 질문만 하거나, 심지어 질문만 하고는 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남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는 우리들의 본성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옷을 입지 않았거나, 전기나 자동차나 TV같은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화인류학자들은 야만인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목소리가 큰사람이랍니다. 문화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목소리가 낮아집니다. 둘째는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둘이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한 사람은 들어야 하는데, 야만인은 서로 제말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야만인의 특징입니다. 셋째는 감정주의입니다. 야만인은 깊은 생각을 할 줄 모르고 그때그때 감정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에 주먹이 먼저 나갑니다. 이것이 야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IT의 세계 최강국하면서 우쭐대지만, 우리는 야만인처럼 들을 줄을 모르고 감정만 앞서는 사람들입니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생각도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문명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듣는 훈련이 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인정을 받고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예배자가 되면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봅시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찬양은 한 시간 이상 하고, 말씀은 오 분 듣는 미국의 신식예배가 한국에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말만 하는 우매자의 제사입니다.
왕상3:9에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하고 제안하셨을 때, 솔로몬이 무엇을 구했는지 아십니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라고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로운 마음” 이라고 번역된 “레브 쉐미즈” 라는 단어는, 본래 “듣는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마음’과 ‘지혜’는 같은 말입니다. 잠언15:31에는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듣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자요, 말씀을 듣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여러분,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 고르는 비결을 알려드릴까요? 우선 예수 믿는 사람을 골라야 하지요? 그럼 믿는 사람이라고 다 1등이냐? 아닙니다. 그중에서 1등을 골라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앞자리를 골라 앉아 열심히 말씀을 들으며 적는 사람은 1등 신랑, 신부 감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무엇을 하더라도 잘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릴 때도 뭔가 늘 분주해 보이고 예배시간도 늦는 총각이나 처녀는 좋은 배우자감이 못됩니다. 예배가 우선이 아닌 사람은 우선순위가 잘못된 사람이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배시간에도 들락날락 하는 청년은 정서가 불안한 사람이고, 뒷자리를 골라 앉는 사람은 무언가를 숨기는 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올 용기가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잘 생겼을 지라도 1등 신랑, 신부 감은 아닙니다.
우리 한가람 청년들은 다 1등 신랑감, 1등 신부 감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2절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라틴말로 ‘코람데오’ 입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기본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비결이 없습니다.
행2:46-47을 보면 초대교회의 신앙생활 단면이 나타나는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앞에 나아와야 그 다음에 뭔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씁니다. 주일날 예배시간이 가까워지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게도 하고, 갑자기 몸이 찌뿌둥해서 오늘은 하루 쉬고 싶다는 생각이 나게도 하고, 마음속에 시험이 들어 누가 미워져서 교회에 가기 싫게도 합니다. 대체 무슨 큰죄를 지었다고 교인끼리 미워하는 마음을 며칠씩 몇 달씩 품습니까? 그것이 본심입니까?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하려고 사단이 준 생각이라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영의 장난입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 대부분의 도시 교회들은 예배를 1.2.3부로 나누어 드리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본래 주일예배가 한번이었고 주로 11시에 드렸습니다. 왜 주일 예배가 11시 인지 아십니까? 그 시간이 가장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도 그 시간은 제일 중요한 시간이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도 그 시간은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을 주님 만나는데 쓰겠다는 의지의 반영이 주일 낮 11시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그 시간이 가장 정신이 맑고 깨끗한 첫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시간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가장 좋은 시간은 드리겠다. 제일 중심 시간을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하는데 사용하겠다는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금년에는 예배 시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에 왔으면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건들건들 거리면서 와서 내가 심방 왔던 목사님 체면 세워주기 위해서 왔다는 식으로 적선하듯 앉아 있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일입니다. 샌들을 질질 끌고 오는 일도 고쳐야 하고, 자기 직장에서 상사에게 나갈 때도 입을 수 없는 옷을 입고 와서 예배하려고 하는 자세도 고쳐야 합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교만한 자세로 오려고 합니까? 하나님께 올 때는 옷차림부터 조심하고 아주 조심스런 마음으로 와서,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이 바른 예배를 위한 첫 번째 자세입니다.
둘째,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마 15:8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는 하나님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으로는 교회에 와서 예배한다고 앉아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지적입니다.
어떤 성도가 세상을 떠나가는 마지막 시간이 되어서 목사님이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숨이 넘어가기 전에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했답니다. “목사님, 저는 수 십년간 교회를 다녔지만 한 번도 설교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작심하고 잠을 자거나 수첩을 꺼내서 열심히 사업설계를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니 당장에 떠오르는 말씀이 없어 두렵습니다.” 실화입니다.
여러분, 이런 교인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 앉아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습니다. 평상시에는 읽지도 않는 성경을 왜 설교시간에 읽습니까? (죠 뤠이스는 예외)
어떤 사람은 설교시간에 이것저것 뒤적입니다. 누구는 옆에 있는 가족과 필담을 나누고 누구는 잠을 청합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자세입니까? 마음이 떠난 자세요, 축복과 능력이 나타날 수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답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고후 4:4에 보니까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악한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마13장에도 사단이 말씀을 빼앗아간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18-19절에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라는 말씀입니다.
악한 마귀가 마음을 혼란케 해서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얼핏 들은 것도 딴 생각 하게 해서 지워버리고, 어떻게 하든지 말씀을 못 듣게 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교회에는 와서 앉을 지라도 말씀은 듣지 못하고 헛걸음만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방을 가보면, 그 성도가 주일날 말씀을 받고 가는 성도인지 말씀을 듣지 못하고 앉아만 있다가 가는 성도인지 척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낼까요? 심방 예배를 시작해서 이제 말씀을 들을 시간입니다. 말씀에 집중해야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되면 따르릉 전화벨이 울립니다. 기가 막히게 시간을 맞춥니다. 아니면 다른 손님이 오거나, 아이가 그 시간에 맞추어 울거나, 어떻게 하든지 말씀에 집중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 경우는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에도 사단이 항상 뒤흔들어서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예배가 허사입니다.
그럼, 사단이 왜 그렇게 결사적으로 말씀을 못 듣게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구원과 축복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나옵니다. 롬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영원한 구원이 말씀에서 나옵니다. 세상을 이기는 지혜가 말씀에서 나옵니다. 말씀을 들어야 인격이 변화되고, 말씀을 들어야 능력이 생깁니다. 말씀을 듣다가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어야 인생이 바뀝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지 못하니 오래 믿을수록 교만하기만 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걸고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은 성령이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이나 영적인 질병이 치료되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자기의 문제가 진단되고,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문제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하고 어떤 방해가 있어도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고 와서는 다른데 마음 두지 말고 말씀 듣기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들은 말씀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러쿵저러쿵 반론을 생각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조용히 설교를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저건 아닌데’ 하면서 속으로 도리질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로서 이보다 더 나쁜 자세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평가해 보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참으실 수 없는 죄악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주여 말씀하소서, 제가 그대로 실행하겠나이다.” 라고 고백하며 들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말씀이나, “너희는 땅에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 잠잠하라.”는 말씀은 어줍잖은 생각으로 하나님 말씀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제 생각, 제 계획, 제 야망 다 접고 주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지 그 말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앞에 나올 때는 주실 말씀에 대한 갈급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점쟁이한테 점치러 갈 때는 왜 갑니까? ‘뭐라고 말할까’ 하며 점괘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돈 들고 가는 것 아닙니까? 하물며 하나님 앞에 가면서 말씀에 대한 기대감이 없이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올 때 ‘오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하는 기대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
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이라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결단입니다.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는 행동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다음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을 정말로 만난 사람은 두가지 결과를 냅니다. 하나는 회개이고, 하나는 결단입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화로다 나여,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으니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가서 내 말을 전할꼬”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결단을 하였습니다.
눅 5장에 보면 갈릴리에서 고기잡이 하다가 주님을 만나게 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했다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히자 당장 한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를 했고,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자 즉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결단한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예배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는 절차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육체가 회복됩니다. 예배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무능했던 사람이 유능해지고 아무 일도 감당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단한 일을 하게 됩니다.
또한 예배는 우리에게 자기 사명과 갈 길을 깨닫게 합니다.
목적이 없이 살았던 사람이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자기가 생명 걸고 가야할 길을 발견하고 그길로 나서게 됩니다. 바르게 드린 예배는 삶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올바르게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권세를 주어 축복의 근원을 삼아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그러십니다. 예배에 성공해서 쓰임 받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