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1-9, 49-51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 / 한서노회
오늘 설교말씀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입니다. “우리로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의 고백입니다. 성도는 늘 이기는 살아야 합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던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져서는 안됩니다. 졌더라도 다시 이겨야 합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최후의 승리자가 어떤 자입니까? 전반전에 져도 후반전에는 이기는 자입니다. 전반전에 4:0, 5:0 7:0으로 져도 좋습니다. 후반전에 4:6으로 5:7, 7:11로 이기며 됩니다. 마지막 5분까지 지더라도 마지막 5분 동안에 이기면 됩니다. 최후에 이기는 자가 진짜 이기는 자입니다. 최후에 이기면 진 것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내가졌던 삶, 실패했던 경험, 잘못했던 것들이 다 이기면 가리어지게 됩니다. 내가 승리하면 이전에 잘못들은 다 묻어집니다. 승리하면 지난날의 실패들이 오히려 빛이 됩니다. 승리가 실패를 보석처럼 빛나게 만들어 줍니다. 승리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2003년도는 승리의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본문이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회개는 언제나 승리자로 만듭니다.
회개는 누구에게든지 승리의 삶을 약속한다! 회개를 붙잡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승리자가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유혹에 넘어져서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하고, 잘못 된 줄 알면서, 안가야 되는 줄 알면서도 그 잘못된 길을 내가 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나는 바르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잘못된 길을 왔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연약합니다. 앞을 분별하지 못하고, 분별해도 그 길을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사람을 양에 비유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금방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 양입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 그저 앞에 있는 먹이만 보는 것이 양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을 가다가 아 이것이 잘못된 길이구나 깨닫는 것이 은혜이고, 내가 이 길에서 돌이켜야지 하고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회개하는 곳에는 언제나 승리가 따릅니다. 회개하는 곳에는 언제나 은혜가 머뭅니다. 새 힘이 솟습니다. 거룩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생깁니다. 언제나 회개는 승리를 몰고 옵니다.
회개는 축복의 삶을 가져온다! 오늘 유다 지파는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업을 받았는데 너무 많아서 시므온 지파에게 기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축복이 차고 넘쳐서 자신의 그릇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남의 그릇도 가득 채우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2003년 여러분의 가정에 유다지파에게 임한 그 잔이 넘치는 축복이 가정마다 사업마다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유다의 전반부의 생은 실패하는 생이었습니다. 유다는 이방여인과 결혼을 한 자입니다. 아들이 셋 있었는데 그 셋이 다 바른 가치관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유다 보다 먼저 천국에 갔습니다. 그들이 악해서 천국에 데려간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다는 아내가 죽자 위로 받기 위하여 거리에 나갔다가, 거리의 여자와 잠을 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자기의 며느리였습니다. 자기 인생에 부끄러움을 남기는 순간이었습니다. 인생을 허점으로 얼룩진 삶을 산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모르고 잠을 잤는데 알고 보니 며느리였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의 인생을 유다처럼 부끄럽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점 투성이 일수 있습니다. 축구로 말하면 7:0일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이라 할지라도 축복의 생이 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생을 축복으로 바꿉니다. 나만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 손들도 축복이 되고, 이웃도 축복이 됩니다. 내 잔이 넘치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내 잔을 채울 뿐 아니라 남의 잔도 채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내 안에 있는 죄! 갖고 있으면 그 죄가 내 삶을 망치지만, 회개하면 그 회개가 내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회개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유다의 전반부에 실패의 생이 후반부에 축복의 생으로 바뀌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자손 중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된 것도 회개입니다. 영향력을 끼치는 생이 됩니다. 지도력을 발휘하는 생이 되었습니다. 회개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둘째, 선으로 악을 이기면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두 번째 선으로 악을 이기면 반드시 승리자가 됩니다. 악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갈라지게 됩니다. 악을 만났을 때 악으로 악을 갚으면 패자가 되고, 악을 만났을 때 선으로 악을 이기면 승자가 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을 만납니다. 너무도 억울해서 반드시 어떤 행동을 취하고 싶은 때를 만납니다. 뭔가 보복을 가하고 싶은 유혹의 때를 만납니다. 그 때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 때입니다. 온유로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에게 그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시므온은 우리처럼 외국에서 살았습니다. 본토인들 속에서 이것 저것 눈치보면서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시므온에게는 디나라는 여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여동생을 현지인 추장 세겜이라는 사람이 좋아하여 데리고 가서 강간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시므온이 듣고, 시므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울분이 올라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지금 그 지방 추장의 집에 있습니다. 여동생의 의사에 의하여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추장의 세겜의 뜻에 의하여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세겜은 본토인이고, 야곱은 유목민입니다. 시므온은 우리를 무엇으로 보고 이런 일을 하나 하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경우를 만났을 때,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분명히 저쪽에서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계속 잘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시므온은 응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진정으로 내 여동생을 원한다면 할례를 받아라 라고 말하고, 할례로 인한 고통이 있을 동안에 쳐들어가서 그 촌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대량 학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 동생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만났을 때 악으로 악을 갚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사람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악한 방법에 의하여 손해를 받았거나, 악한 방법으로 부당한 대우를 당하게 되면, 나도 악한 방법으로 대우해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집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시므온에게 그런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이 악을 만났습니까? 반드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반드시 성서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않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괴롭습니까? 그 괴로운 마음을 이기려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축복하십시오! 그 사람의 진정한 행복을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를 적으로 대할 지라도 여러분은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형제로,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십시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마음이 들지라도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왜 그래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축복의 삶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항을 만났을 때, 참고 인내하는 온유! 이 온유는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진리입니다. 온유하지 못하고 보복하는 삶은 땅을 빼앗깁니다. 시므온은 동생이 간강 당하는 것을 보고 참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보복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보복하였습니다. 그 결과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삶에 가져다 준 것이 무엇입니까?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온유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12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곱은 12아들을 축복하면서 시므온을 축복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49장 5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5-8) 보복하는 행동이 가져다 준 삶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보복하고 싶은 일이 일어났을 때, 참으십시오! 도리어 축복을 비십시오! 진정으로 축복하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축복하는 삶은 복을 약속해 주지만 보복하는 삶은 복을 약속받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스므온 지파가 기업을 받는데, 독립적인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다른 지파는 다 독립적인 기업을 받는데, 시므온 지파만은 유다지파가 받은 기업 중에서 일부를 받습니다. 제비를 뽑았을 때 하나님이 유다지파 중에 일부를 주라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복하는 자에게 큰 기업을 맡기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시므온처럼 살지 마십시오! 유다와 다윗처럼 사십시오! 우리 왕징식구들은 다 온유로 사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는 번성하고 강한 자는 멸종한다! 온유한 자, 참고 인내하는 자의 자손이 번성합니다. ‘양육강생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약한 자, 온유한 자가 살아남아서 땅을 차지 합니다. 지질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 확인된 것으로는 사람들이 이 지구에 있기 전에 큰 짐승들이 지구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맘모스와 공룡 같은 큰 짐승들이 지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사납고 무섭고 강했습니다. ‘약육강생’이 진리라면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납고 무섭고 강한 짐승인데, 그들은 지금 없고 약하고 힘없는 것들만 남아 있습니다. 사납고 무섭고 강한 짐승들이 땅을 차지하여야 하는데, 그 짐승들은 지금 박물관에서 뼈만 볼 수 있게 되었고, 약하고 힘없는 것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개는 이리와 같은 종류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리 가운데서 어떤 종류가 성질이 변하여 온순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개라는 말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강한 이리가 땅을 차지할 것 같은데 이리는 차츰 차츰 멸종하여 가고 있고, 개는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해 가고 있습니다. 팔라오에 가면 주인 없는 개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들이 이리처럼 강하면 그대로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하고 힘없는 것들이 땅을 차지합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가 ‘내가 잘못 했습니다.’ ‘그가 나보다 더 의롭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회개하는 것! 약한 것 같지만, 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험악한 세상 어떻게 사나’ 하지만, 그것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약한 유다 자손은 번성하여 졌지만, 강한 스므온 자손은 번성하지 못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1차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 나옵니다. 시므온 지파 숫자는 유다지파와 단 지파를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지파였습니다. 처음 59,3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22,200명으로 줄어듭니다. 오늘 본문은 22,200명이라 말합니다. 수가 가장 적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강하다 자랑하다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내가 강한 것이 자랑일 수 없습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온유한 자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약하고 힘없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은 능력이 나타납니다. 강함이 강한 것이 아니라 온유가 강한 것입니다. 왕징가족들은 약함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약하고 힘이 없는 자로 보일 지라도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온유한 자라는 것을 알고,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입니다.
셋째, 신앙의 양보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합니다!
그 공동체의 지도자는 공동체가 보이는 자이다! 하나만 더 합시다. 신앙의 양보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만듭니다. 오늘 분문 49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그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되”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모든 12지파들에게 기업을 나누어주기를 마쳤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되”라고 말합니다. 제일 마지막 기업을 받은 자는 여호수아 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입니다. 자신은 제일 나중에, 제일 마지막에 기업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업을 차지한 후에 기업을 받았습니다. 지도자로서 신앙의 양보를 한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양보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양보해야 될 때를 만납니다. 그 때 양보는 어리석은 것 같이 보이지만,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내 양보가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양보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속옷을 달라고 할 때, 겉옷을 주는 것, 오리를 가자고 할 때 10리까지 가 주는 것, 오른 뺨을 칠 때 왼뺨을 돌려 대 주는 것, 약한 것이 아닙니다. 참 승리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양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기 위하여 양보하는 것은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비결입니다. 창세기 13장에는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롯에게 축복을 해주어서 두 집에 양이 너무 많아져서 같은 장소에 두 집이 살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신앙의 양보를 합니다. “우리는 서로 골육이 아니냐. 우리가 서로 싸워야 되겠느냐. 너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너가 우 하면 나는 좌하리라 너가 좋은 것을 택하라” 신앙의 양보를 합니다. 롯은 좋은 것을 택하여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쁜 것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롯이 간 후에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보라.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너는 종과 횡으로 걸어 보라. 네가 밟는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 주겠다!” 나의 작은 양보 하나까지 하나님은 보십니다. 사랑의 양보, 신앙의 양보,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반드시 갚습니다. 양보를 크게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50절을 한 번 읽읍시다.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의 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 여기 중건하다는 원어적 의미는 ‘처음부터 새롭게 짖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딤낫세라는 황무지로서 전혀 개발되지 않은 곳이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모든 지파가 건축된 성읍을 차지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산지를 구했습니다. 황무지를 구하였습니다. 좋은 것들을 백성에게 양보합니다. 양보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는 양보하는 자의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외쳐야 합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회개하는 삶!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양보하는 삶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삶에 승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