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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미학과 미적 진보의 콜라보
- 최재선론1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최재선 시인의 시그니처 스타일은 일상인들이 갖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일상인이 관심을 잘 안 가지는 제물상의 발신음을 들어보겠다고 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미학성과 철학성의 조화로운 접점에서 피어나는 미적 감동, 나아가서 미적 진보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평설의 최종 귀착지다. 구조론적으로 또는 저항적인 측면에서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려 한 점으로 보아, 그의 시는 시적 본질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고 하겠다. 시 속에서 그가 생성해낸 미의식은 ‘말맛’과 발견 중심의 ‘인식’에 잘 담겨있다. 시인이 주제로 형상화해낸 정서의 빛깔이자, 심오한 관조 속에서 획득한 철학적 울림은 인문학적 가치와 잘 매치됨으로써 문학적 성취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시적 태도가 기본기를 잘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라 하겠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회의 소리, 시대와 역사를 관통해서 느낄 수 있는 뛰어난 감수성을 그는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을 치환하여 현상학적으로 인식하는, 다시 말해 비유를 통해 시적으로 구축하는 시상은 우리에게 풍성한 감동을 선사한다. 따라서 필자는 시의 숲을 창조적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고, 헤매는 동안 감동의 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서정시학의 힘을 업고 문학형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시와의 치밀한 감상적 조우라는 이 시집 평설을 통해서 독자들은 최재선 시의 정체성과 시적 울림의 메커니즘에 접근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형식과 내용, 구조와 의식이라는 차원으로 분석하는 평설에서 미학성과 철학성이라는 양가의 가치를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형상미학적으로도 완성품이고, 작가정신의 측면으로 봐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차원에서 이상적이다. 그는 시작에 임하여 본성 차원에서의 인간 존재해명의 문제는 물론 역사적 환경 속에서의 바람직한 삶을 위한 순수의식에 천착함으로써 통시적이면서 공시적이고,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그리고 초월적이면서 당대적인 미의식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사상과 형상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통해 세계를 자아화하는 것이 바로 최재선의 시적 특성이며, 예술시학의 전개다. 하나의 압축된 서정시로서 심상과 상징을 그려내었는가 하면 풍경화 같은 작가의 심적 나상을 너무나 솔직하게 형상화하고 있기에 삶의 다양한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그리고 ‘부사’의 절묘한 배치는 시의 맛을 더욱 감미롭게 한다. 따라서 그의 시가 환기하는 언어들은 그대로 우리를 미적 사유로 몰아넣는다고 하겠다.
II. 시의 존재방식과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
아취볼드 맥컬리는 시를 통해서 시 원리를 잘 말해준다. 바람직한 시의 형태를 심상으로 제시해 놓았는데,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자. 여기서 말이 없다는 것은 외부의 대상을 명명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떤 언어 또는 기호가 외부 대상을 지시하면 그 대상은 기호에 의해서 한정되어 버린다. 그 결과 대상은 희생이 되어 버리는 부작용이 따르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 외부 대상과 접촉하는 것이다. 이것을 맥컬리의 시는 새의 비상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시인이란 언어의 무의미와 의미 사이에서 진동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무의미가 의미인 그런 세계에 사는 독특한 인간이다. 시는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제3의 실체일 뿐이다.
최재선 시의 첫 인상은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것이다. 시의 기본이 되는 구체어를 많이 활용하고, 언술보다 묘사를 많이 써서 다수의 작품이 다소 암시적이고 이미지적이다. 시는 철저히 언어와의 싸움이라는 명제를 구체화한 흔적이 뚜렷했다. 또한 그가 다루는 대상을 단순히 산문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시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시대를 풍자하는 현실의 문제가 절절하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개성적인 이미지를 창조할 문학문법을 부릴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의 시적 특성을 정리해 보면, 부사의 맛깔스런 활용, 생략을 통한 절제된 감정과 묘사언어가 빚어내는 긴장감, 리듬감을 살리는 율격, 적확한 비유의 사용, 주관적 체험 내용의 객관화 등을 통해서 전통 서정미학을 살려내고 이러한 서정성과 시학원리의 충실성이 미적 진보와 콜라보를 이루면서 미적 울림통을 강하게 울린다고 하겠다. 표제시 <서 있는 것만으로>는 제목 자체가 이미 그 의미를 상상하게 하기에 맛있는 시가 되었다.
묵방산* 아래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
꽃 매달 힘 빠지고 나뭇잎 붙잡을 근력 쇠해
까치도 둥지 한 채 틀 생각하지 않는
담 허물고 낡은 문짝 뜯어 고물상에 버렸지만
늙은 냄새 풍긴다 산새 한 마리 찾지 않았으리
산 그림자 소류지*에 집 몇 채 앉힐 때
서까래 하나 될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으리
오랜 세월 서 있느라 뒤축깨나 닳았으리
묵방산 방생한 칼바람 날 단단하고 예리하여
몸소 그를 견디는 것 도망칠 수 없는 운명
굽어지고 휘어진 그의 전신 비굴 아니라
바람 다스리며 뼈까지 통째 앓은 옹이였으리
우리 생애 바람 잘 날 없이 덧날 때
바람 형상대로 허물 가리고 서 있는 힘이었으리
세상엔 서 있는 것만으로 위로 되고
기울어지는 중심 잡아주는 배경 되느니
- <서 있는 것만으로> 전문
첫 행의 묵방산은 소양면 원화심 마을 안쪽에 있는 산이고, 소류지는 묵방산 아래 있는 연못이다. 시에 있어서 각주는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이나, 묵방산이나 소류지가 독자들에게 너무 생소한 만큼 처음부터 막막함을 주지 않기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 본래 시는, 자동화나 습관화된 지각을 지연시켜, 세계를 자아화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문학적 성취는 다음 네 가지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비가시성의 가시화냐 즉, 예술적 차원이다. 두 번째는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냐, 문학 본질적 차원이다. 세 번째 관점은 시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냐, 시학적 차원이다. 마지막 관점은 주변부 타자의 담론인가, 즉 작가의식 차원이다.
최재선 교수의 시는 문학적 성취도가 높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시학 원론에 따라 최대한 관념화를 줄이고 구체화를 앞세웠다. 중층묘사라는 현대시작법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강렬한 제작성으로 고급스러운 시어를 배치하거나 장식하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 그는 묵방산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의 운명을 디테일한 구체적 묘사를 통해 형상화를 이루어내고, 정서를 객관화하면서 관념시 또한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메타포의 원리에 의한 간접화가 두드러진다. ‘오래된’이란 추상을 구체화하는 ‘꽃 매달 힘 빠지고, 나뭇잎 붙잡을 근력 쇠해, 까치도 둥지 한 채 틀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직설적인 표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시를 ‘설명하는 시’에서 ‘생각하는 시’로 전환하고자 하는 데 있다.
최재선 시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체언에 붙는 조사를 생략함으로써 압축과 함축이라는 시 고유의 리듬감을 잘 살린 것이며, 철저하게 문학의 기본 두 가지, 구체어와 묘사를 잘 활용해서 시건축물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율격이 없는 시란 있을 수 없다. 그의 시는 틈만 나면 음악성과 어울리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가 음악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그 정서적 울림이 확실히 남달랐다. ‘서까래 하나 될 수 없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칼바람을 견뎌내야만 했던 그 나무, 즉 서 있어야만 했던 사연을 운명으로 치환해 놓고, ‘굽어지고 휘어진 전신’이 비굴한 모습이 아니라, ‘뼈까지 통째 앓은 옹이’였으리라고 의미화하는 데서 시적 기량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이 시에서 그를 힘들게 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은 ‘바람’이다. ‘칼바람’을 견디기 위해 또는 다스리기 위해 ‘바람 형상대로’ 서 있는 것이다. 그 ‘옹이’라는 지배적 심상을 다시 ‘힘’으로, ‘위로’로, ‘기울어지는 중심 잡아주는 ‘배경’으로 풀어냄으로써 강한 이미지의 ‘옹이’ 형상과 세 관념이 잘 결합되게 하였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배경이 된다는 데 누가 공감하지 않을까. 다음에 볼 <문안하라>는 표제시도 깊이 있는 사유를 서정 속에 잘 녹여내고 있다. 문학성이 구도에서 나온다면, 이 시는 상징어의 의도적인 배열을 통해 한껏 멋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새벽 네 심장 뛰게 하시고
혈류의 강 흐르게 하신 주께 문안하라
밤새 잠들지 않고 하늘 한 모서리
봄꽃으로 피어있는 달에게 문안하라
눈다운 눈 일절 내리지 않은 땅
오후쯤 오리란 눈에게 미리 문안하라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덜컹 찾아와
여기저기 짓밟는 통증에게 문안하라
혼잣말로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
하염없이 결단한 이름에게 문안하라
밤새 수만 개 숨구멍 막히고 닫혀
활활 불타오르던 그리움에게 문안하라
- <문안하라> 전문
<문안하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안부를 전하라고 하지만 사실상 ‘기도하라’는 말이다. 문안의 대상으로 시인은 셋을 설정한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신’이고, 다음이 ‘달’이고, 마지막으로 ‘눈’인데, 눈한테는 미리 문안하라고 한다. 눈 이후의 상상에 대비하라는 의도도 되고, 눈을 보기가 힘든 만큼 낭만적 풍경과 동심을 심어주는 눈에 대해 감사하라는 뜻도 숨어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 시는 첫 번째 행과 두 번째 행이 핵심이라고 봐야겠다. ‘네 심장을 뛰게 하고’, ‘혈류의 강 흐르게 한’ 주님께 문안하라고 하는 주제덕목을 연역추리로 <전반부>에 둔 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무화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지막에 놓으면, 시적 화자는 종교적 주체가 되고, 의도는 뻔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휘 선택과 배열로 시적 긴장을, 우리를 위요한 것들에 관심을 두라는 주지를 구체화하거나 변용하고 전달하는 데 사용되는 말, 즉 매체를 의미 있는 단위로 배치하여 음악적 특성을 보여주려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시인은 시의 <전반부>에 주지를 구체화하는 매체를 설명하면서 한 음절짜리 ‘주’, ‘달’, ‘눈’ 세 개를 배치하고, <중반부>에 가서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을 두 음절로 된 어휘, ‘통증’, ‘이름’ 두 개를 취한다. 그리고는 <후반부>에서 매체를 세 음절짜리를 채택하고, 개수를 하나로 줄인다. 매체의 음절수로 보면, 하나 둘 셋, 후반부로 갈수록 음절수가 많아지나, 어휘 수를 따지면 셋 둘 하나로, 시를 써내려갈수록 매체 수가 줄어든다. 이런 의도적 배치는 단지 숫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반부는 천상계적 수준의 구체어로, 중반부는 상징계 수준의 관념어로, 후반부는 인간계 수준에서 관념어를 선택하였다. 다음 시는 <꽃은 뒤에서 수군거리지 않는다>는 문장형 제목인데, 제목만으로도 상상을 불러온다. 이미 절반은 성공이라는 뜻이다.
뒷담화에 관해 거두절미한 자태 저러랴 면전에선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그저 꽝꽝 얼어붙었다 뒤 구석에서 오만가지 사설 늘어놓는 그러다 끝내 흠이란 흠까지 다 뒤져내 깔아뭉개느라 털어내지 못하고 북풍 잦아 쌀쌀해지고 공기 매워 숨소리 낮아지는 세월 뉜가의 배경 되려면 그의 뒤에서 눈부시게 흘러내려야 하는 걸 따습게 무릎 꿇어야 하는 걸 결 좋은 얼룩으로 시나브로 불 지펴 마침내 한때나마 봄날 꽃이 되어야 쓰는 걸 꽃은 뒤에서 수군거리지 않는다 고요히 말 아낄 뿐
- <꽃은 뒤에서 수군거리지 않는다> 전문
이 시는 산문으로 되어 한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면전에서는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비판도 문학적 사유를 끌어내도록 ‘자태 저러랴’라는 간접화된 말로, 아주 절제되어 있다. <중반부>는 ‘북풍 잦고 쌀쌀해지고’, ‘공기 매워 숨소리 낮아지는’ ‘세월의 배경이 되려면’이라는 조건절 한 문장과 귀결절 세 문장인데, 마지막 종결어미가 ‘하는 걸’ ‘하는 걸’, ‘쓰는 걸’이다. 이는 시인이 얼마나 시의 본질을 중시하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후반부> 결말은 담론층으로 주지를 한 번 더 제시하고, ‘고요한 말 아낄 뿐’이라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내어놓는다. 물론 여기서 ‘꽃’은 다의적 의미를 갖는다. 아취볼드 맥클리 시의 <시법>이란 시를 생각나게 한다. ‘꽃’을 시인이나 시로 환치해도 될 듯하다.
‘꽃’을 바라보고, 그 꽃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낼 수 있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중요한 덕목이다. 어쩌면 항간에 나도는 언술시의 폐해를 ‘말을 아낄 뿐’이란 어구로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것을 ‘꽃’으로 설정함으로써 독자가 꽃의 원형 이미지를 무난하게 연상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시적 장치를 깔아두는 데 성공하고 있다. 왜 시인은 뒤에서 수군거리지 않는 것을 ‘꽃’이라 했을까. ‘꽃’이란 매체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꽃은 슬기로운 생활, 좋은 시로 가는 길목이 된다. 시는 ‘문단 의장’을 지향한다. 이 시에는 짧은 문장에 깊은 뜻을 담아야 좋은 시가 된다는 시인의 시론이 담겨 있는 것이다. 미적 목적을 위한 시인의 낯설게 하기가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아직島 가본 섬 없거든
어두운 생각 걷어내고
자라처럼 금오*에 닿아보라
그렇게 금오에 이르면
鼇上看月齋* 천만년 달로 떠
바다 경전처럼 묵독한다
천상의 달 잠든 날 어쩌랴
이 집 주인장 달이고
찾은 발길 빛으로 풀리어
묵정밭 같은 맘 기름지나니
흉흉한 소문 잘 날 없는
뭍 소식 해풍으로 맑게 씻어
別有天地非人間이나니
아직島 가본 섬 없거든
세상 것 부디 내려놓고
금오로 달빛처럼 흘러가라
- <아직島> 전문
‘우리는 차를 파는 게 아닙니다. 단지 사랑의 관계를 촉진할 뿐입니다.’ 이 진술은 일본 렉서스 자동차의 광고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의 정신에 따라 자신의 자동차를 살아 있는 애인처럼 아끼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자동차를 씻고 닦는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auto detailing이라고 한다. 최재선 교수는 틈만 나면 시를 씻고 닦는다. 여기서 ‘차’를 ‘시’로 대체하면, 우리는 최재선 교수를 poem detailing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직島는 부사 ’아직도‘의 ’도‘를 한자어로 대체하였다. 요즘 광고에서도 많이 시도되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다. 언어유희로 멋과 맛을 부릴 수 있는 장르가 시다. 시인이 이런 순질이화를 통해 언어의 조탁과 변용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언어의 미적 배열은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의미구조의 생성원리일 뿐만 아니라, 주제를 형상화하는 미적 원리라는 점에서 시창작의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기> 부분의 ’아직島 가본 섬 없거든, 어두운 생각 걷어내고/ 자라처럼 금오에 닿아보라’와 <결> 부분의 ‘아직島 가본 섬 없거든 세상 것 부디 내려놓고/ 금오로 달빛처럼 흘러가라’가 수미상관 대구를 이루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재미있는 부분은 섬에 가기 전에 1) 어두운 생각 걷어 내고, 2) 세상 것 부디 내려놓으라고 하는 데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가보시라’를 ‘닿아보라’, ‘흘러가라’고 함으로써 예사롭지 않는 분이 거주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집 주인장 달이고 찾은 발길 빛으로 풀리니’라는 진술에 숨어 있다. 금오도와 달빛 이미지는 섬에 있는 차정식 교수의 선비 이미지를 적절하게 관통하고 있다. 손맛이 좋다.
푸지게 꽉 찬 날 하루쯤 없어
만날 흔들리고 터덕거리는 생애
한 해 한 번 오지게 살찐 달빛 아래
서리 맞은 억새 생각 청명하게 빚고
달빛 기댄 것마다 선명하게 풍경이다
저리 화사하게 쌓여 숨긴 구석까지
환히 뒤집고 마는 게 몇 날쯤 되랴
한 해 한 번 오지게 살찐 달빛 아래
옹색한 세간 몇 점 달빛으로 씻고
옹졸한 맘의 밭 호미질 해야 하리
먼 풍경처럼 말 건넨 것 오랜 이에게
한 해 한 번 오지게 살찐 달빛 아래
오래 머금고 있던 말 한 두 소절쯤
뻔뻔히 꺼내 사연으로 흘러야 하리
- <오지게 살찐 달빛 아래> 전문
시는 관조 미학의 결과물이다. 시인은 흔들리고 터득거리는 생애를 돌아보며, 한 해 한 번 오지게 살찐 달빛 아래에서 오래 머금고 있던 사연을 시로 완성한다. 현실을 보다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으로 접근해서 서정적인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어 이 시는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부사를 맛깔스럽게 잘 활용했다는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에 부사들만 수두룩하다는 말이 무색하다. ‘형부는 위험하다’고 하는 명명에는 형용사와 부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녹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시인은 형부는 위험하다는 인식을 뒤엎는다. 이 시에 쓰인 부사(구)를 열거하면, ‘푸지게’ ‘꽉’ ‘청명하게’ ‘선명하게’ ‘저리’ ‘화사하게’ ‘환히’ ‘달빛으로’ ‘오래’ ‘ 뻔뻔히’ ‘사연으로’ 등이다. 언어가 익을 대로 익었다.
오지게 살찐 달빛 아래, 1) ‘서리 맞은 억새 생각 청명하게 빚고, 2)옹색한 세간 몇 점 달빛으로 씻고, 3) 말 한두 소절쯤 뻔뻔히 꺼내’라고 해놓고 사연으로 흘러야 한다고 끝을 맺는다. 부사 ’청명하게‘와 ’선명하게‘에서 ’명‘자를 그리고 형용사 ’옹색한‘과 ’옹졸한‘에서 ’옹‘자를 맞춘 것은 정형률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자유시를 쓰면서도 그는 여전히 시의 기본인 리듬론을 지켜나가고자 한다. 그는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언어와 리듬 양방향에서 각각 접근해 들어가기도 하고, 상호 변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섭은 총체적으로 미적 감수성을 더욱 예리하게 하고, 세계를 보는 눈을 깊고 넓게 해주며,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모습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의 시는 창조적 직관과 미적 표현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가 생성해내는 시어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고 하겠다.
절벽 같은 세상
간당간당한 날
어느 하루쯤 있으련만
얼굴 빨개지도록
용깨나 쓰다 보면
환장하게 눈부셔
누군가의 든든한
풍경과 배경쯤으로
살아야 할 이유였지
- <담쟁이> 전문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최재선 시인의 시적 특성인 생략과 리듬타기는 우리들의 인식에도 여러 모로 영향을 끼친다. 바로 점의 논리다. 최재선 시는 점의 논리에 알맞게 필요한 것만 제시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이미 알려진 것, 주로 ‘조사’지만, 이것은 건너뛴다. 이러한 건너뛰기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기도 하고, 언어의 절약이 풍겨주는 손맛을 주기도 하고, 여유의 산물이랄까, 서로의 생각들이 상호간 스며들 시간의 여유를 준다고 하겠다. 말과 말 사이가 끊어질 듯 이어지기 때문에 그 여백에 여운이 담기고 응축되어 오히려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맛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생략을 통해 얻어지는 여백과 여운은 시적 감흥을 담은 함축미를 엿보게 하는 긴장미 넘치는 시로 구축되고 있다.
<담쟁이>의 두 번째 연을 보면, 그가 얼마나 리듬에 민감한지를 알 수 있다. 세 행의 한 연, 첫 번째 연의 첫 어휘는 두 음절 ‘얼굴’, 두 번째는 세 음절 ‘용깨나’, 세 번째는 네 음절 ‘환장하게’ 이렇게 234로 음절수가 갈수록 늘어나도록 하고, 첫 음절과 연결되는 어휘는 음절수가 5 4 3으로 전개되도록 음수율을 하강구조로 짬으로써 수평적인 전후가 수직적인 리듬을 타고 음악성을 잘 타고 있다고 하겠다. 내용적으로 보면, 상징으로서의 ‘담쟁이’는 그것이 가리키는 사건이나 사물인 문화에 참여하는 특성을 가진다. 절벽 같은 세상에서 ‘담쟁이’가 누군가의 풍경이나 배경쯤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내었는데, 그것이 두 번째 연이다. ‘얼굴 빨개지도록/ 용깨나 쓰다 보면/ 환장하게 눈부셔’가 ‘풍경’과 ‘배경’될 이유라는 시인의 생각이다. 공감은 당연한 것이다.
가을 하늘도
당신 읽을 줄 안다
당신이란 말마다
밑줄 저리
굵고 길게 치고
여태껏 당신
암송하고 있으니
- <가을 하늘 독서법> 전문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세계를 상징 하나로 내보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최재선 시의 힘이다. <가을하늘 독서법>이란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상징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감추어진 차원에 있는 실재와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상징은 인간 존재의 깊은 차원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가을 하늘’은 천상계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신적 존재 또는 절대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당신’은 다의적으로 읽힌다. 첫 연에서는 기도하는 사람 내지는 평범한 존재를 뜻하지만, 둘째, 셋째 연으로 오면서 ‘당신’은 기도문이나, 신의 계시록 정도를 뜻한다. 독서법이라 썼지만, 사실은 독심술이다. 관심법이나 영적 또는 전지적 능력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시가 시인으로부터 독자에게 던져진 이상, 그 의도는 독자 개개인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 정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의도의 오류’다. 다음 시는 아버지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제시하여 시적 응축미를 보여준다.
간밤 멎었던 비 이른 아침
일찍 또 출렁 흐드러진다
방에 계실 줄 알았던 아버지
산책길에 뜬금없이 뵈었다
사막 같은 생애 꾸부정하게
걸어오신 아버지 등 위로
비 풍(風) 영락없이 뒤집힌다
팔십 생애 청명한 날이라곤
비 온 날 잠시 낮잠 들 때뿐
온몸으로 비 맞고 살아오신 삶
깡마르고 차라리 더 가벼워져
아버지 손에 들려있는 우산
되레 무거운 이골이었으리
비 손가락 꺾는 소리 내며
우산에 뒤엉켜 몸 녹이고
아버지께서 다녀오신 젖은 길
연어처럼 거슬러 올랐다
- <아버지의 등> 전문
<아버지의 등>은 미적 형상화가 극적인 시다. 시인의 눈으로 볼 때 현실은 언제나 모순 덩어리다. 시적 화자의 아버지가 살아왔던 그 세월이야 보릿고개, ‘궁’으로 대표되는 시절이다. 아버지 시절의 힘든 삶은 그대로 아버지의 등에 투사되어져 나온다. ‘등’이 사물이면, ‘비’, ‘풍’은 사건이다. ‘등’이 명사라면, ‘비’, ‘풍’은 동사적이다. ‘간밤 멎었던 비 이른 아침/ 일찍 또 출렁 흐드러진다.’ ‘사막 같은 생애 꾸부정하게 걸어오신 아버지 등 위로/ 비 풍(風) 영락없이 뒤집힌다.’ 아버지의 현실을 정직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인은 마지막에 가서, 아버지가 ‘비 손가락 꺾는 소리 내며/ 우산에 뒤엉켜 몸 녹이고’ 다녀온 젖은 길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랐다.’고 한다.
인물에 대한 시인의 깊은 성찰과 인식이 뛰어난 작품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관조의 과정과 태도를 통해 아버지의 성격과 기질, 품격을 잘 형상화해서, 자신의 개성 있는 인생관, 격조 높은 세계관, 우주관 등을 적절한 어휘로 잘 버무려 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적인 감동으로 직조하였다. 나훈아의 <테스형>이 생각나게 하는 시다. ‘연어처럼 거슬러 올랐다’라는 언술에는 현실 극복 의지가 강하게 투영되어 나온다. 아버지의 굽은 등은 삶의 궁극점을 상징한다. 어렵고 힘든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가 현실 수용의 대긍정을 전제로 한 돌파구의 모습을 띤다는 것은 다행스럽다. ‘연어처럼’의 상승이미지가 아버지 등 위에 영락없이 흐드러지는 비의 하강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강한 극복의 공간을 구축해 내고 있어 이 시 또한 감동을 준다.
오늘같이 험하게 좋은 날
눈치 없이 화사한 햇살
뜀박질하며 염병하게 눈부시고
바람에 윙윙거리다 곯아떨어진
슬래브집 지붕 나일론 빨랫줄
춘설 발자국 지워진 청솔가지
멧새들 앉아 是是非非 是是非非
고요한 산중 잔설 녹아 是是非非
험하게 좋아도 눈물겨운 법
길바닥 돌멩이 흙바닥 구르며
是是非非 만세삼창 是是非非
저리 화사한 햇살 머문 곳마다
봄 쑥쑥 자라 쑥國쑥國 오것네
뻐國뻐國 뻐꾸기 만세 부르것네
- <험하게 좋은 날> 전문
위 시를 비롯한 <되게 아팠는갑다>는 지금까지 보아온 구조주의적 관점과는 달리 역사주의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시는 현실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오직 작품만을 보고 시를 쓰지는 않는다. 작가의식을 가지고 현실과 역사 그리고 삶의 부분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저항성’을 심는다. 그래서 독자는 외부적 요인을 찾아내어 키워드에 방점을 찍는다. 시정신에 투철한 시인, 교수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모순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경청하고 싶은 욕망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공인의 입장에서 시인은 누려야 할 개인적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모순 기제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돌멩이’도 만세삼창, ‘봄’이 자라서, ‘뻐꾸기’도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보아 민족적 수난이라는 파행적인 역사 과정 속에서 희생당한 민중이 해방을 맞아 활력을 찾은 것 같다.
<험하게 좋은 날>에 등장하는 ‘슬래브집 지붕’, ‘나일론 빨랫줄’ ‘청솔가지’ ‘멧새’들은 타자들로서 민초를 우리들에게 환기시킨다. ‘길바닥 돌멩이 흙바닥 구르며/ 是是非非 만세삼창에서 是是非非’는 모순된 현실, 부러진 세상에 대한 저항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되게 아팠는갑다>라는 시에서는 더욱 팍팍한 시적 화자의 현실이 눈물겹게 다가온다. ‘꽃 한 송이 여태 본 적 없이/ 세월 더듬더듬 만지작거린/ 희뿌연 아들 눈동자 같아/ 울컥울컥 눈물 잦아지면서/ 풀잎 몇 개 서럽게 보이다’ 여태 꽃 한 송이 본 적이 없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마주한 세상이 어떠할까. ‘눈물 잦아진다’라는 언술에 다 표현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시인은 이런 하강 이미지를 전부 결말부에 가서 상승 이미지로 끌어올린다. ‘눈앞 맑게 개며 우뚝 솟은 듯/ 평화스럽게 누워 있는 산/ 아프긴 되게 아팠는갑다’는 시행을 보면, 궁극에는 맑고 밝은 세상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함이다. 누구보다도 현실 비판의지만큼 현실 극복의지가 강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
지상에서 가장 험한 걸음
오체투지로 올리는 기도
주먹밥으로 달랜 허기
길 위의 고행 수행일 뿐
길 떠나다 심장 식으면
독수리에게 보시하는 鳥葬
일곱 달 걸려 드디어 뵌
절대자 앞에 엎드린 기도
돈 많은 부자 절대 아니라
여태 지은 죄 먼지같이 털고
비로소 사람스러워지는 것
오래오래 사는 것 아니라
아랫목 들일 틈 없던 마음
평수 널찍하게 넓히는 것
만날 주시옵소서 흐느낌체
아멘으로 갈무리한 기도
차마고도의 부끄러움이었다
- <차마고지 순례자의 기도> 전문
이 시는 최재선 시인이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배치한 시다. 푸코는 우리 사회의 미시적 권력을 포착해내면서 보이지 않는 권력은 배치와 장치를 통해서 그 의지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논리적 사고의 원리에 의하면, 모든 행위에는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누가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할 시를 함부로 고르고, 아무 거나 뽑겠는가. 적어도 의미 있는 작품을 놓게 되어 있다. 모든 시의 서정적 자아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일 수 있다. 평자가 판단해 볼 때, 적어도 이 시집에서 시인은 서정적 자아이면서 역사적 자아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지식인, 종교인, 작가 등 모든 인격적 결합체로서의 자신이 절실하게 느낀 바, 이 시가 주는 감동과 교훈을 강하게 독자에게 던지고자 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의 수필가라는 타이틀도 시적 화자가 서정적 자아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자아의 창을 갖도록 했다고 보인다.
‘일곱 달 걸려 드디어 뵌/ 절대자 앞에 엎드린 기도’가 절창이다. ‘돈 많은 부자 절대 아니라/ 여태 지은 죄 먼지같이 털고/ 비로소 사람스러워지는 것/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아랫목 들일 틈 없던 마음/ 평수 널찍하게 넓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결미에 가서 ‘부끄러움’으로 대치된다. 구체화된 어떤 상징보다 더 울림이 큰 것은 ‘비움의 자세’다. 보통 시가 구체어와 관념어가 섞여 특수 상황을 만들다가 나중에 시인의 주지를 전달하는 매체인 구체어로 형상화되는 루트를 연어처럼 거슬러 오른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정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압권은 ‘만날 주시옵소서 흐느낌체/ 아멘으로 갈무리한 기도’다. 문체를 새로 하나 시인이 만들었다. 시인은 ‘흐느낌체’에 인간의 욕심과 사역자의 위선을 담아내었고, ‘아멘으로 갈무리한 기도’에는 신도와 사역자 모두의 무비판적, 맹목적 믿음과 그들만의 신앙을 비판하고 하고 있다. 종교인으로서 내부 비판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건강한 목회자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III.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으로부터 나올까. 어떤 이는 돈이나 지위라고 하지만 금력이나 권력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큰 힘은 ‘언어’ ‘색’ ‘리듬’에서 나온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확장하고 발달한 것이 바로 최재선 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현실이든 시인이 진상과 잔상을 언어로 드러내면서 세계는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현실을 확인하고 리듬을 곁들여서 독자들로 하여금 미적 사유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게 하겠다는 정신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위에 제시된 시 말고도 거의 대부분 시가 현실저항 의지라는 색깔을 담고 있어서 이 시집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제 물상과 합일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과 화해해야 한다는 시인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시집의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는 풍성하다고 하겠다.
창작과정에서 자신의 의도를 독자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최재선은 반향과 공명, 영혼의 울림 구조를 유기적, 통합적으로 활용, 텍스트 속에서 능숙하게 구조화한다. 그리고 이 네 가지 공명전략을 조화롭게 담론화하여 소통시킴으로써 시의 미학성을 높이고 감동의 울림도 가져온다. 민중의 정서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이런 공명전략에서 나온다. ‘여태 지은 죄 먼지같이 털고/ 비로소 사람스러워지는 것/ 오래오래 사는 것 아니라/ 아랫목 들일 틈 없던 마음/ 평수 널찍하게 넓히는 것’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하는 그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고, 저 연어처럼 거슬러 오르겠다는 힘찬 다짐이 식지 않는 한, 그의 시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좋은’ 시로 인정받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시집은 우리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프리즘의 역할을 해주고, 프리즘으로 우리들의 일상을 바라보면 무지갯빛 아름다움이 우리 주변에 폭넓게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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