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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21편 5절-7절: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달란트에 대하여.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재능이 많은 사람도 있고 재능이 없는 사람이 있다. 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재능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달란트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재능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 재능으로 부지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니 늘 바쁘게 살 수밖에 없다.
달란트를 누가 준 거냐? 하나님이다.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 달란트를 많이 감당할 사람에게는 많이 주고 적게 감당할 사람에게는 적게 주고 하시는 건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주시는 거냐? 썩어지고 뭉그러지는 게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고 영원히 가는 것을 주신다.
그러면 그게 뭐냐?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혜란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첫째로는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구속의 보혈의 피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났는데 이게 은혜다. 중생된 영이 나에게 있고 성령님이 내재해 계신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간단히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는 것이 은혜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살려줬으니 내가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 이게 들어가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다. 성도에게는 기본적으로 이 달란트를 주셨다.
여기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만큼, 더 많이 깨닫고자 하는 것만큼, 주님을 더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만큼, 주님을 더 많이 깨닫고자 하는 것만큼, 주님을 더 많이 닮고자 하는 것만큼, 모든 면에서 그 일에 협조 동참하는 것만큼 그 사람에게 풍성히 주어지는 달란트가 또 있는 거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네가 예수 믿는 믿음이 생겼느냐? 그러면 어떤 면으로 건 그걸 이용을 해봐라. 그러면 커진다. 장사를 하는 것과 같아서 이용만 하면 네가 커진다. 네가 활용을 해봐라. 네가 커진다. 너만 커지느냐? ‘내가 커지는 게 참 좋구나. 그러니 저 사람도 커지게 만들어야지’ 하게 되는 거다. 이게 달란트를 받은 것을 이용 활용 응용하는 거다.
그런데 이것을 일반재능으로 생각을 해버리면 교회는 그런 장기를 풀어먹는 장소가 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못쓴다. 이러면 성경 깨달음이 하나 없어도,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없어도 자기의 그런 장기를 많이 풀어먹는 사람일수록 교회에서 대우를 받을 거다. 이렇게 되면 간간히 말을 했지만 돈 없고, 몸에 병이 들어있고, 늙거나 가난하거나 한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일을 하는 분이 아니다.
인본주의 해석자들은 달란트를 인간에게 있는 어떤 장기나 재간으로 말을 하는데,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 활동은 굉장히 많겠지만 신앙 믿음이 활동 면에 목적이 되어있기 때문에 성경을 깨닫는 것은 안 된다. 왜? 일 잘하는 것이 자랑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성경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머리가 지혜롭고 영특하게 되는 것은 가난해도 할 수 있고, 부자라도 할 수 있고, 몸이 불구라고 할 수 있고, 건강한 사람도 할 수 있는 거다. 힘쓰는 것만큼 신앙 믿음이 죽죽 올라가는 거다. 이게 은혜요 달란트다.
5절: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주의 구원으로 영광을 크게 했다고 한다. 구원이 영광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신다고 한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성경을 깨닫기는 불가능이다.
목사님들에게나, 박사님들에게나, 그 어떤 분들 앞에서도 절대 정확한 옳은 이치라야 진짜다. 어느 누구도 걸고 넘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면 이게 누구의 것일까?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의 것이라면 이유와 변명이 많아진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허점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이 면이 허점이고, 저렇게 하면 저 면이 허점이다. 그러니 인간세상에서, 안 믿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옳은 것을 찾지 말아라. 세상에는 ‘절대’라고 하는 것은 없다. 절대는 오직 우리 하나님에게만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말을 할 때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복음은 하나님의 것이고,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우리가 성경을 깨닫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야 정확한 이치가 된다. ‘예수 잘 믿고 부자 되자’ 하는 거는 하늘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예수 잘 믿어 만사형통 되고, 부자 되고, 뭐든지 잘 된다’ 하게 되면 그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 예수를 열심히 믿다가 순교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할 거냐?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순교자는 왜 죽음을 당한 거냐? 믿음이 없어서 개죽음 당했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거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고 부자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건데, 그렇다면 세상 끝 날에 왜 이 세상을 불에 태워버리는 거냐? 세상을 다 불에 태워버리면 하나님이 영광 받을 게 없지 않느냐? 이치를 생각을 해봐라. 이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느냐? 예수 믿는 걸 이치를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이치가 어그러지면 변명이 되어버리고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거짓 종이라고 하는 거다.
이 세상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인간도 출생을 하면 죽는 날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있기 전의 세계가 있고, 또한 세상이 끝난 후에 영원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세상 전의 세계와 세상 끝난 후의 세계는 다 같이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무궁 세계다.
세상을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고 에덴동산이 있고, 여기서부터 성경의 연대를 보면 예수님 오시기까지 4천 년이고,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가 2천 년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를 구약시대라 하고, 예수님 오신 후 지금까지를 신약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성경을 볼 때는 이렇게 역사적 연대적으로 보는 게 아니다. 물론 인간 편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보게 되지만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역사로 보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계시적으로 보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성경에 담아서 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 비가 와도 해가 떠도 이 하루 속에도 하나님의 뜻을 담아서 우리에게 준 것이니 성경의 안경을 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 거기에서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을 예수님처럼 닮아가는 거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안 왔지만 오실 메시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고, 신약시대에는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거다. ‘구원’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예수님의 피공로가 들어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한 것을 ‘기본구원’이라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이 기본구원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지옥은 못 간다.
예수를 믿고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은 이 기본구원에서부터 신앙 믿음의 경주를 하는 거다. 이 신앙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 성경도 깨닫고 세상만사를 통해서도 깨달아 나가야 한다. 그러니 성경을 많이 읽어라. 그 다음에 목사님이 이치적으로 말을 해 줄 때는 그 속에 들어있는 성경이 깨달아져 나가는 거다.
기본구원은 앞으로 예수를 믿을 사람도, 이미 믿은 사람도,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자여요 백성이라면 정해진 시간에 다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 이거는 예수님의 피공로로 된 거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니 기본구원 받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아라.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의 모든 후손들은 영이 죽었으니 이 죽은 영을 살리려면 죽은 자기의 몸 밖에서 성령이 와서 살려내야 되는 거지 죽은 자가 ‘내가 살아나야지’ 한다고 해서 살아나지는 거냐?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야지’ 할 수 있는 거냐? 이치가 맞지 않는 거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주의 구원으로 기뻐한다’고 했는데, 주의 구원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기본구원을 얻은 것도 기쁜 거지만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사사건건이 좋은 일 나쁜 일, 악한 사람 선한 사람 등 많은 사람을 붙여줄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가면 신앙이 올라가게 되니 이것도 기쁜 거다. 기본구원의 반석 같은 터는 예수님이 닦아 놨다. 그 다음에 여기에서 힘쓰고 애쓰느니만큼 올라가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말씀을 깨닫고 마음이 주님처럼 닮아지고 영리해지고 똑똑해지고 명철해지고 죽죽 올라가야 한다.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친다면 성도는 올라가게 되어있다. 안 올라가고 있다면 목사가 엉터리이든지, 아니면 내가 엉터리이든지, 아니면 목사도 나도 엉터리이든지 한 거다. 목사님은 바로 가르치고 있는데 자기는 눈감고 졸고 있다면 다른 사람은 깨달으며 죽죽 올라가는데 자기는 죽 쑤는 거다.
구원에는, 성경에는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가 다 붙어있다. 그런데 예수를 수 년 동안을 믿어도 깨달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예수라는 학교에 안 다녔다면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심부름도 열심히 했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했는데 깨달은 게 하나도 없다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성경에 보면 ‘성전으로 오너라’ 하는 게 있는데, 이 말에는 뜻이 있는 거다. 성전에는 법궤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 말이다. 그리고 이 법궤 속에는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두 돌판이 있는데,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손으로 역사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있는 성전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옳은 척도,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곳으로 가거라’ 하는 의미가 있는 거다. 계시적 신앙 사상적 의미가 그런 거다. 교회가 아무리 자기 집에 가까이 있어도 그 교회에 이게 없다면 그런 교회에는 가지 말아라. 그건 교회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고 무당집일 뿐이다.
성도는 올라가야 되는데, 구원을 기뻐하시고 뭘 입히신다? 영광. 위대함. 존귀영광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구원에서 온다. 기본구원의 터에다 예수님의 정신, 사상, 지혜지식,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 있는 말씀이라면 이건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거다. 이대로 살면 그대로 올라가는 거다. 이게 신앙지식이다.
우리 신앙에는 지식이 분명해야 한다. ‘지식은 교만케 한다’는 것은 진리지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 쓸데없는 지식을 자기 기준시해서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따지려고 달려드는 교만 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지식을 가져야 하고, 성령님이 원하는 지식, 예수님이 가지신 소원 목적, 모든 지식을 갖는 것이 믿음지식 신앙지식이다. 이게 힘이 있는 거다. 바른 이치를 하나 깨닫는 것만큼 그것은 능력이다. 옳기 때문이다. 옳기 때문에 능력이다. 옳은 이치를 가지면 틀린 것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능력이다. 틀린 것을 / 하고 그을 수가 있다.
우리교인들은 예수를 믿어갈수록 진리지식, 하늘의 지식이 커져야 한다. 그래야 높아질 수 있다. 그리고 세상지식으로 사는 사람의 점수를 매길 수 있다. 그리고 거꾸로 커나가는 것도 점수를 매길 수 있다. 세상으로 자라는 상태를 보고 ‘이거는 거꾸로 해서 올려야겠구나. 이거는 올라가는 중에 더 잘 올라가도록 해야 되겠구나’ 하게 된다. 이게 교회의 가르침이다. 이게 교회에서 할 가르침이다. 교회에서는 말씀의 권이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그만큼 떨어지게 되어있다.
일반세상에서는 나이를 가지고 따지는데, 내가 기장교회에 다닐 때 보면 장로들 몇 분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이 분들에게 꼼짝을 못한다. 목사가 장로에게 잘못 보이면 쫓겨난다. 완전히 거꾸로 되어있다. 목사의 말씀이 절대적인 말씀이라고 하면 그걸 건드리면 안 된다. 그러나 ‘예수 믿어 부자 되자’ 하는 목사라면 그 교회에서 쫓아내든지, 자기가 그 교회에 다니기 싫으면 바른 말씀을 전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산다.
진리지식이 올라갈수록 존귀영광이다. 아는 것이, 깨달은 것이, 만들어진 것이 올라갈수록 존귀영광이라. 우리가 예수님 당신처럼 올라가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고, 잡고 쓰시고, 심부름을 보낸다. 천국대사로 심부름을 보낸다.
이런 목사가 교인들을 데리고 도둑질을 하겠느냐? 목사 자기의 노후대책을 세우느라고 돈을 은행에 집어넣겠느냐? 만일 이런 마음을 가졌다면 성경은 막힌다. 성경에 눈이 안 열린다. 성경에 눈이 안 열리면 교인들은 못 올라간다. 완전히 세상으로 나가버린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이 영광이 누구의 영광이겠느냐?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같이 하시고, 지혜지식이 월등하고, 지혜가 있고, 명철하고, 총명하고, 도덕성, 즉 선 사랑 거룩 진실이 속에 가득 들어있고, 일반적인 나쁜 성격도 고쳤고, 그러니 신의 성품이 그대로 들어간다. 예수 잘 믿으려면 태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성격도 고쳐야 한다.
유교에서 부모를 잘 섬기라는 것이 있는데, 유교의 부모공경은 그 지식이 선악과 따먹은 데서 나온 거다. 유교를 믿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성경에 보니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게 있으니까 ‘공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해서 나는 이미 부모공경을 해 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게 뭐가 잘못된 거냐?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의 뜻과 유교의 공자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말의 뜻이 다른 거냐, 똑같은 거냐? 다르다면 뭐가 다른 거냐? 공자의 말을 듣고 부모공경을 하면 부모공경이 바로 될까, 안 될까?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부모공경은 절대로 안 된다.
공자는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무언인지 모른 채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지식으로 자기가 그 계명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지키는 거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부모를 천국으로 올려놓는 부모공경을 말하는 거다. 이 부모공경의 성질 속에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랑이 들어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공경을 해야 한다. 또한 식구들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관계를 지어 살아야 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매일 싸우며 지냈는데 시어머니가 죽어버리면 이제 며느리에게는 시어머니 공경성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중단이 돼버린다. 이치를 알아야 한다. 애들을 낳아보고 키운 사람이 아이의 마음을 잘 알까, 애를 한 번도 낳지 않고 안 키워본 사람이 아이의 마음을 잘 알까? 느낌이 다르고, 마음이 가는 게 다른 거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다윗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갈수록 다윗의 영광이 자꾸 올라간다. 자기가 영광스러워지고 싶으냐?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라. 깨달음을 입어라. 이렇게 되면 사람을 알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성이 바로 되어 들어간다. 사람을 바로 알려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도 모른다. 절대로 모른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사람과의 관계성이 바로 들어가도록 되어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 들어가면 너는 영광스러워진다. 존귀해진다. 그러니까 자기가 올라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말씀대로 사니까 그 말씀이 올라가니 자기도 올라가는 거다.
자기가 주님을 높이니, 진리를 높이니, 하나님을 높이니 하나님이 또 그를 높인다. 그러니까 말씀이 자기 속에 있으면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과 도덕성도 올라가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땅에 계시느냐, 하늘에 계시느냐? 하늘에 계신다. 그러니까 자기도 하나님처럼 올라간다.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하나님의 옳은 것을 가지면 그 사람을 함부로 못한다. 하나님의 옳은 것을 가진 사람을 함부로 했다가는 하나님이 가만 안 둔다.
6절: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영영토록 지극한 복’이 뭐냐? 지극한 복이 돈이 엄청나게 많다는 말이냐? 쌀이 많다는 말이냐? 영원토록 지극한 복이란 세상 불탈 때까지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존귀와 영광으로 누림이요, 쾌락과 행복의 극치를 말하는 거다.
이 세상에서도 기쁜 일들이 있는데 어느 때가 제일 기쁘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어느 때 제일 기쁘다고 하느냐? 시집장가 가는 것? 이게 그렇게 기쁜 거냐? 그 기쁜 것이 언제까지 가겠느냐? 영원히 가는 기쁨은 아니다. 이런 건 금방이고 순간이다. 그런데 이런 기쁨을 우리의 생각 속에서 연장을 시킨다면 영원히 가는 기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영원히 가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거다. 이걸 깨달으라고 세상에서 잠깐 잠깐 기쁨을 맛보게 하는 거다. 영원히 가는 더 좋은 것을 찾으라고 하는 거다. 이치가 이렇게 되어있는 건데 사람들이 이걸 못 찾고 있다.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신다’ 함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 두 번째는 임시적인 나그네 세상을 거쳐 가게 하면서 모든 환난 시험으로 연단을 시켜서 영능의 실력으로 천국에서 누림성이 있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부지런히 믿어라. 힘써서 믿어라. 말씀에 순종하라’ 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너에게 영능의 실력이 된다’ 하는 게 들어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지혜지식, 말씀의 지혜지식, 그리고 도덕성, 하나님의 도덕성에는 선, 사랑, 거룩, 진실이 들어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진실하게 살아라’ 하는 말을 하지만 이건 선악과 따먹은 데서 나온 거다. 우리 믿는 사람은 ‘진리진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 말씀으로 거룩, 말씀으로 아가페 사랑, 말씀으로 선, 하나님은 선이시라. 우리가 하나님의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하나님처럼 만들어지는 것, 이게 도덕성이라. 성경을 통해서 자기 속에 이게 들어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지혜지식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능력성이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성은 하나님의 의, 즉 옳음과, 그리고 주권이 있다. 사람이 옳은 것을 가지면 그 사람은 주권이 있다. 이게 능력성이다. ‘휙 휙’ 하는 게 능력이 아니다. 이것이 자기 속에 들어있어야 한다.
생각을 해봐라. 이런 하나님의 것이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신처럼 되는 거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라. 말씀을 배워라. 하나님의 말씀은 신의 말씀이다. 이걸 배우면 자기가 신의 마음을 갖게 된다. ‘나는 하늘나라에 가서 살 자다’ 하는 것은 신의 아들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정신, 소원, 목적을 자기가 입는다는 것은 신의 성품을 입는 거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히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구역예배 때도, 성경공부 때도, 설교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밖에 없다. 성경공부가 따로 있고, 설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는 것이 선교요 이게 전도다.
성경에 보면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나도 같이 거기에 있겠다’ 라고 하는데,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란 ‘예수이름으로 모입시다’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나 예수님의 마음을 가르치는 곳을 말하는 거다. 이러면 그 말씀으로 인해서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인해서 자기가 물질로도 시간으로도 활동으로도 수종을 들게 되는 거다.
자기가 언제 지어졌던 인간 자기에게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자기를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들어있다. 사람이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 너를 지은 원인 동기 목적이다. 이런 사람이 돼야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처럼 그 천국을 마음 것 다스리게 된다. 이런 사람이 해와 같이 별과 같이 된 자다(단:).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어린아이처럼 되라.’ 다 어린애가 되라는 말이냐? 어린아이에게는 어른이 따라올 수 없는 게 하나가 있는데, 자라나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신앙 면에서 ‘나는 어른이 됐다’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더는 못 자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육신은 후패하나, 나이는 먹어 들어가도 속의 깨달음은 날로 새롭도다. 날로 커져간다’ 라고 하신다, 믿는 우리에게는 이게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또는 주님 앞에 어린아이를 하나 세워놓고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거다.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것은 ‘낮아져라. 네가 낮아져야 올라간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 세웠건, 옆에 세웠건 어린아이를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말씀을 한 것은 ‘너희들은 아이들이 자라는 것처럼 인격과 성품이 나처럼 자라가라’ 라고 하는 이치가 들어있는 거다. 목사가 기준이 되면 끽 해봐야 목사 이상 못 올라간다. 우리의 선생은 오직 주님이시다. 목사도 주님이 기준이고, 교인들도 주님이 기준이다. 이렇게 해야 경쟁이 되어서 올라가는 거다. 주님처럼 올라가도록 만드는 이게 아가페고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서울에서 전도사님과 목사님들이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갔었는데, 그곳에 온 전도사님들에게 ‘교회에서 뭐 하느냐?’고 물으니까 주일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차 끌고 주일학생들 데리고 다니고, 어른예배를 마치면 어른들을 태워서 데리고 다니고, 평소에는 목사님을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언제 성경을 볼 거냐?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라.
교인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왔으면 그걸로 된 거다. 안 나온 교인이 있으면 ‘왜 안 오나?’ 하고 전도부인이나 교인들로 가서 보고 오게 하면 된다. 교인들이 제 발로 교회에 나오도록 해야지 어떻게 일일이 데리러 다니느냐? 교인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키워야지 어떻게 일일이 밥을 떠먹이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을 해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갈 때까지의 광야생활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고치자 고치자. 또 고치자 고치자’ 하면서 가나안을 향해 나가는 거다. 그런데 이럴 때 뭐가 사람의 약을 올리는가 하니 불기둥 구름기둥이다. 광야에서는 한낮에 구름이 드리워야 시원하다. 동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는데 그 사막의 열풍이 광야로 불어 닥치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뜨거워서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이 앞서 가면 그 구름 아래서 구름을 따라가다가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그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구름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까 구름이 머물면 백성들이 이고 지고 메고 온 보따리를 풀고 허리끈도 풀고 쉬려고 하다가 구름이 움직이면 재빨리 허리끈을 매고 이고 지고 메고 구름을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 자꾸 그러니까 이제는 귀찮아서 구름이 머물러 있어도 짐을 안 풀고 구름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으면 이 구름이 하루 종일 그대로 있다. 그러면 ‘구름이 이제는 안 가려나보다, 짐을 풀어 놓자’ 하고 짐을 풀면 구름이 또 움직인다. 그러니 속에서 얼마나 뿔이 날까? 얼마나 약이 오르겠느냐?
그래서 우리교인들 절대로 ‘내가 여기서 평생을 살아야겠다’ 하지 말아라. 목사 같으면 ‘내가 예배당 건물을 지었으니 여기서 평생을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은 집어치워야 한다. 왜 그런가 하니 세상은 임시처소다. 사건 환경의 바람이 불면 네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의 보따리를 풀지 말아라. 진리가 부르면 언제고 어디든 따라가야 한다. 이게 아브라함이 양떼들을 이끌고 헤브론 골짜기로 가는 것과 같은 거다.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성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리 가자. 저리 가자’ 하면 천막 하나만 가지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즉각 순종하기 위함이었다. 이게 아니라 집도 가지고 있고 농토도 가지고 있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즉시 이사를 가라고 하면 언제 복덕방에 집을 내놓고 농토를 팔고 떠나겠느냐? 이러면 말씀을 따라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뭐냐? 무슨 목적으로 자기를 만들었느냐? 이 세상 재세기간 동안에 훈련 연단을 시켜서 주님처럼 만들어서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 왜 데리고 가느냐?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살게 하려고. 그러니까 누구든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아닌 말로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보고 ‘하나님, 왜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지요?’ 하고 물어야 한다. 묻고 알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라. 이게 성경의 교육이다. 세상은 잠깐이다. 그런데 거의가 보면 세상위주 세상목적에 자기의 소원 목적을 걸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능력을 자꾸 거기에 써먹으려고 한다. 얼마나 약아 빠진지?
7절: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요동이 없으시다. 누구에 의해서, 또는 무엇에 의해서 변질이나 변함이나 변동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 누구의 소리를 듣고 ‘이랬다 저랬다’ 바꿔지지 않는다. ‘내가 이래볼까 저래볼까’ 하는 고민도 없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사랑과 은총을 주겠다고 하는 것도 아담 하와 때부터 마지막 세상 그 날까지 변함이 없다. 인자와 사랑과 은총, 즉 하나님의 특수은총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를 보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고 생명과를 따먹어라’ 라고 하신 것은 뭘 주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냐? 하나님께서 당신의 특수은총을 주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뭘 따먹었느냐?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분이시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다 아셨을 텐데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따먹지 말라고 하신 거냐? 선악과를 안 만들어 놓았으면 안 따먹었을 게 아니냐? 따먹을 줄 알면서도 만들어 놓은 셈이니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누구 탓이냐? 하나님 책임이냐?
그래, 하나님 책임이 맞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1차적인 책임을 지셨다. 이 1차적인 책임완수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인간이 에덴동산이 아닌 신령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만들어 놨다. 이게 참 신비스러운 거다. 에덴동산과 천국 중에 어느 곳이 더 좋은 곳이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만들어 놓은 뜻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려던 거냐,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려는 뜻이 들어 있느냐? 인간 편에서 따져볼 때 이 땅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사는 게 좋겠느냐,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좋겠느냐? 어디가 좋으냐? 이 땅이 좋으냐, 하늘나라가 좋으냐? 하늘나라에 가면 시집장가도 안 가는데도 이 땅보다 더 좋으냐? 그러니까 타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더 좋은 하늘나라를 주시려는 신비한 섭리가 있는 거다.
질적 가치적으로 따져봐라.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영원히 살게 한 것인데 그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지옥에 가게 되어서 하나님이 ‘아차,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알았더라면 선악과를 안 만들어 놓을 것인데 내가 미처 그걸 몰랐구나’ 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서 구원해서 천국에 보내는 거냐? 이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느냐? 만일 이런 것이라면 하나님은 항상 인간 뒤에 따라다니면서 인간들이 일을 저지르면 그걸 해결해 주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천국의 누림이 있기 때문에 그곳을 하나님처럼 마음 것 통치하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만들어 오라고 인간을 이 땅을 거쳐 가게 한 거다. 그러니까 이 땅은 경유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이 땅에 멈추어 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예수가 와서 구원하는 걸로 알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하고 있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입어야 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일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고 해도 어떤 모양으로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한 거다. 왜냐? 그걸 입어야 만이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그 나라를 하나님처럼 누릴 수 있는 성분을 덧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만들기 전에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 천국을 누리게 하려는 계획이 이미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당신의 이 계획은 무너지지 않은 거다. 인간이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이 계획과 약속은 그대로 가는 거다. 영원히 변치 않는 거다. 신령천국의 누림 때문에 이 누림을 위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은 거다.
네가 오래 살고 싶으냐? 그렇다면 천국의 누림의 생각을 가져라. 이 세상의 삶은 잠깐이다. 이 땅은 신앙의 훈련장소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것을 가지고 하루 온 종을 울 필요가 없는 거다. 울고 싶으냐?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연관을 못 시켰으니 한탄스럽구나‘ 하는 그 면을 생각을 해서 울어라. 그래야 희망이 있다.
부모님이 죽고 난 뒤에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서 제사하지 말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정성 것 해 드려라. 살아계실 동안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잘 지어라. 이게 기독교의 부모공경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도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울 게 뭐가 있느냐? 믿는 부모가 천국에 갔으면 춤을 춰야지 울 일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