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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박사, 동서양의 부가 역전된 원인
- ‘해금(海禁)’과 ‘개해(開海)’-
〇 분당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마다 약간의 차이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라지는 현상을 볼 때마다 열심보다 선택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합니다. 코로나19로 달라진 세상이 앞으로 더 크고 빠르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어느 때 보다 도 선택을 잘해야 할 때입니다.
-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 동서양의 부가 역전된 원인을 해금(海禁)과 개해(開海)라는 주장에서 지혜를 얻고 싶었습니다. 저자는 동서양의 부가 역전되고 서양 우위의 역사가 지속되게 된 근원을 유럽은 대항해 시대로, 동양은 ‘해금(海禁)’과 ‘개해(開海)’의 두 키워드로 설명합니다. 해금은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 즉 ‘바다로 나가 오랑캐와 교통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말의 약칭으로 외국에 문호를 닫고 자국민에게는 해외 진출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을 뜻합니다.
〇 내용요약
= 신대륙의 발견과 자본주의발전
- 교황 중심의 권력이 세속 왕권의 위에 군림하면서 로마 카토릭에 반하는 가치나 사상은 용납되지 아니하여서 우주와 자연의 원리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합리적 사고는 설 자리가 없었다.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자연과 우주, 사물에 대한 탐구는 ‘사실’의 발견을 낳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으로 무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럽인들은 부를 찾아 다른 대륙으로 눈을 돌려서 아시아 항로와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류사의 신기원이 되었다. 유럽인들이 전파한 기술 문명과 법, 제도, 문화, 사상, 언어, 음식은 세계로 퍼져 나가며 근대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 종교, 언어, 공동체는 말살되고, 정복자의 종교와 언어, 문화가 강요되었고, 정복자가 휘두르는 총칼 앞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구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전염병 앞에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은 속절없이 쓰러졌고, 인구는 한 세기 만에 10분의 1까지 줄었다. 반면 구대륙은 신대륙으로부터 들여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와 같은 새로운 작물 덕분에 식량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막대한 금과 은이 유입되면서 유럽의 경제는 확장되어 갔다.
= 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으로 식민지 건설과 해외 무역은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과 발전은 그 어느 것보다 세계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 동방 무역 선단이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싣고 유럽으로 돌아오면 많게는 60배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지만, 오랜 시간과 조난과 해적의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주식회사를 설립해서 투자자들을 모아서 이익을 배분하면서 위험 부담도 줄이었고, 네덜란드 금융에서는 투자의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선물(futures) 제도가 발달했다.
= 아시아의 해금
- 유럽열강은 활발히 대양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명ㆍ청 시대는 수천 년 동안 누려 왔던 해양 강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바다에 빗장을 치며 고립을 자초했다. 송ㆍ원대에 활발했던 민간의 해외 무역은 금지되고 정부가 관장하는 공무역인 조공 무역만 허용되었다.
- 명의 해금령을 이어받은 청은 더욱 강력한 해금령을 시행하였다. 청의 법전인『대청회전』에서 “나뭇조각 하나도 바다에 띄우는 것을 불허한다.”고 규정할 만큼 엄격한 해금령을 시행했다. 한편 해금령이 엄격하게 시행되는 시기에도 감시의 눈을 피해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동남아시아산 향료나 염료 무역이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목숨을 걸고 밀무역에 종사했다.
- 해외로 나간 중국 상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해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유럽 상인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해금령을 완화하고 해외 무역을 허용하자는 개해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명나라 조정도 어쩔 수 없이 1509년 광둥성의 광저우를 조공국 상인들에 개방한 뒤, 1576년에는 해금령이 시행된 지 200여 년 만에 다시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인들은 ‘해양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자유해’ 사상을 바탕으로 일찍이 대양 개척에 나섰다. 이들이 범선과 대포, 총기를 앞세우고 세계 해양을 누비며 무역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정복하면서 단절되어 있던 대륙들은 해양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 성경이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세계관, 중세적 종교관에 의한 지리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과 과학을 찾아 나서야 했다. 게다가 개인의 창의성과 성과를 인정해 주고 보상이 주어지는 자본주의 제도는 부를 찾아 대양을 항해하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강한 유인책이었다.
- 결국 중국과 아시아는 세계사의 메가트렌드에 뒤처지고 자기 주도의 근대 세계로의 전환에 실패했다. 그 결과 이름뿐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과 중화 세계는 유럽 식민주의 세력에게 유린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근대 세계사의 주도권을 대서양에 내주게 된다.
- 조선은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화주의의 충실한 이행자로 중국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해금이었다. 참고로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한반도에서는 중국, 일본 등 주변국 상인들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과도 교역을 할 만큼 해상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고 사대주의 노선을 취하였던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리하여 섬에서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 두는 ‘공도 정책(空島 政策)’을 실행하였다. 이유는 섬을 왜구와 결탁 할 수 있는 볼온 지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1403년(태종 3년)에 시작된 공도 정책은 1882년(고종 19년)에야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 동양 3국의 갈라진 운명
- 일본은 260여 년 동안 쇄국을 했지만 유럽의 동향과 청과 주변국의 정세는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정기적으로 전해 주는 보고서를 통해 유럽의 사정, 서양의 동양 진출, 산업 혁명, 자본주의, 아편 전쟁, 서양의 군사력 등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서구의 힘과 세계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함께 위기의식을 갖고 있던 일본과 달리, 청나라는 중화주의의 자만에 빠져 서양을 무시하고 세계정세에 무지했다.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상인, 하급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보급된 서양의 기술 서적과 문물을 연구하는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난학자로 불린 이들에 의해 근대화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고, 서양 서적이 대량 유입되고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한편 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지식을 접한 일본 사회는 유교 경전 중심의 관념론적인 연구와 사고에서 벗어나 서양의 실용적 사고와 학문 연구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요약하면, 중국과 조선이 사서삼경과 유교 경전 위주의 도덕론과 관념론에만 빠져 있을 때, 일본은 젊은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과학 기술 문명과 제도를 수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그렇지 못한 청과 조선의 큰 차이는 개화를 주도할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일본과 달리, 청과 조선은 소수의 개화 세력에 의해 급진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서양 열강에 의해 약탈을 당했던 청나라는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속국으로 여기던 일본에게도 패하자 다시 한번 엄청난 충격과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서양의 문물만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제도 변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광서제가 개혁적 유학자 캉유웨이 등의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변법자강 운동으로 불리는 사회 변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청에는 일본과 같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무라이 계급과 천황의 정치적 지원,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 또 젊은 유학자들 역시 이상과 정열은 컸지만 변혁 운동을 추진할 만한 경험이 없었다.
= 대원군이 섭정을 맡았던 10년 동안 강력한 쇄국을 고수했던 조선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3년부터 조금씩 개화를 추진하였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조선의 개화는 국왕 중심으로 추진된 정부 주도적 개화였다. 그러나 고종은 개방과 개혁을 추진할 근대화 정치 세력을 키우고 정치적 지원을 이어 나가지 않았다.
- 일본에서는 왕정복고 이후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서구식 입헌 정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개혁 세력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신정부 주도 세력은 1881년 10년 후 국회의 개설을 선언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헌법 제정 준비에 착수하여 1889년 2월 헌법을 공포하였고, 1890년 7월 처음으로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또 1890년 11월, 제국 의회가 소집되고 일본은 국민 주권 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근대 정당 정치 체제로 진입했다.
- 조선도 일련의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선진 문물만 도입하려 했지, 전체적 정치 체제와 전통 사회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혁하려는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 흔히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치 개혁에 성공했고 서양의 사상, 제도, 문물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요인은 쇄국을 시행하기 전부터 외국과의 활발한 해외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이 일본을 ‘왜’라고 멸시하며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 있을 때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조선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건국 후 150여 년이 지난 조선은 사농공상의 성리학적 지배 질서 속에서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여 새로운 부의 창출에 실패했다. 나라의 형편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이이는 상소를 통해 “200년 동안 저축해 온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다.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라며 한탄하였다.
- 한때 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세계 최고 경제력을 자랑했던 청나라는 폐쇄적 농업 중심 경제, 부정부패, 민란과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기반 피폐로 19세기에 이르러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있었다. 게다가 청일 전쟁의 패배로 당시 일본 재정의 4년 치에 해당하는 3억 엔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1901년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참전 8개국에 4억 5,000만 냥을 39년간 분할 지불해야 했다.
- 조선은 전통적 농업 생산에만 의존하여 경제 사정이 심각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 경복궁 중건과 같은 과도한 재정 사업, 집권 세력의 사치와 부패, 외세의 이권 침탈은 어려운 재정 상황을 부채질해 조선 조정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서양의 무기와 함선을 도입하고 신식 군대를 창설하였지만, 군대의 봉급마저 지불할 수 없는 허약한 재정 상태에서 부국과 강병은 한낱 꿈이었다.
〇 느낀점
- 바다를 건너가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유럽과 긴세월 동안 바다를 지배했음에도 격동기에 바다를 막은 동양이 역전된 역사적인 사실과 일본은 서양문명뿐만 아니라 제도까지 받아들이려는 중심세력이 있었지만 중국과 조선은 그러한 세력이 없었다.
서양은 과학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로마카토릭교회의 교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발전할 수 있었지만, 중국과 조선은 유교사상에 막혀서 강제적으로 문을 열면서도 제도는 바꾸지 아니하므로 결국은 지배를 당하고 말았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최근에 전원주택을 구하려고 경매물건을 살피다가, 급매물 시세보다 더 고액으로 낙찰받는 것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경매를 약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어설픈 지식입니다. 격동하는 세상에서 정확하고, 폭넓은 지식으로 대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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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석균 지음, 『해금』, 예미 , 2022년 11월.
https://www.youtube.com/watch?v=osYCh9mE3vQ&t=11s
신앙의 잘못된 영향을 저서에서 읽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본회퍼의 유서의 시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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