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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1969년도 다 저물어 한 해가 바뀌는 날 12월31일, 이날은 석탄일과 성탄절등 일년에 몇 번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날이다. 모처럼 맞는 해방감에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어수선한 밤이 되는것이다. 평소에 눈에 불을 켜고 거리를 살피던 경찰과 방범대원들도 이날만은 마음 푹 놓고 휴식을 취하는 날이고 웬만한 경범죄 사범들에게도 모처럼 맞는 통금해제에다 년말년시의 들뜬 분위기 때문에 통큰 아량을 베푸는 사회분위기인지라 지나다니는 통행인들에게 별 관심을 두지않는 시기였다.
이날 자정을 갖 넘긴 한 밤중, 세칭 동방교 '초량12교회'에 김태문, 이상래, 박옥수등 건장한 사나이 몇 명이 소리도 없이 대문을 열고 들이 닥쳤다. 미리 대기자 누군가에게 지시(동방교에서의 절대명령이었다)라고 연통을 넣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살짝 나와서 경비 모르게 대문의 안쪽 시건장치를 끌러 놓으라고 연락을 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근에서 차량에 시동을 걸어놓은 채로 대기하고 있다가 약속시간이 되자 곧 바로 들이닥친 것이다.
원래 '초량12교회'의 1층은 여자 대기자들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여자 대기자들을 2층으로 올라가는 실내계단의 오른쪽에 있는 작은방으로 쫓아 보내고 마태목사가 왼쪽편의 1층 큰방을 독차지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1967년 6월 노광공 교주 사후 그는 세칭 동방교 서울 본부의 지시가 잘 먹혀들지 않는 부산지방 교회의 독불장군이었다.
2대 교주 노영구가 줄만 서면 들어가는 대구의 어느 대학을 다닐때 리포트를 쓸 줄 몰라 대신 써 주었다고 자랑하고 다니던 바로 그 장본인이다. 불경스런 언행임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세칭 동방교의 어느 교회를 맡아있는 것도 아니면서 노광공교주 시절부터 불렀던 목사라는 직함만 가지고 외각일(동방교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런 사건들이 외부에서 문제가 되었을때 수습하는 일을 말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을 주로 보는 임무를 맡아 있었다.
동방교의 은어(隱語)중에 외각성민이라는 것도 있는데 세칭 동방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인사들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돈만 몇푼 쥐어 주면 좋아하는 관할 경찰서의 정보담당 형사, 검찰청의 일부 수사관, 선거에 임하면 유권자의 표에 목숨을 거는 정치인등 주로 이들에게는 명절이나 휴가때 과일상자나 금일봉이 심심찮게 전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름만 대면 모두가 잘 아는 어느 정치인도 당시 동방교에서는 외각성민이라 불렀다.
그때 마태목사를 부산지방의 간부들로서는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중학생 시절에 세칭 동방교에 충직하던 그의 어머니를 따라 입교했고 연단(행상)을 통해 어린나이에 많은 지성(헌금)을 동방교에 갖다 바쳤고 교주 노광공을 흠모하며 잔뼈가 굵었다. 징집 영장을 받고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받고있는 그를 어떻게 묘수를 부려 정신병자 진단서를 허위 발급받아 훈련소에서 퇴소시켜 ‘앞으로 내가 너를 크게 써야 하기 때문에 군대에 그대로 둘 수 없었다’고 하면서 약관 22세에 노광공교주로부터 목사로 세움을 받았다.
정신병자 진단서를 발급 받아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교주 노광공의 큰아들 노영도, 둘째아들 노영구, 양학식 베드로목사의 아들 양O언도 그렇게 해서 군입대를 면했다. 그때는 그런것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마태목사는 2대 교주 노영구도 우습게 보고 있었으니 부산지방의 간부들로서 제대로 통제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급으로 치더라도 노광공교주로부터 감리교의 본을 따라 감독목사로 세움을 받았으니 부산지방의 세칭 동방교 목사들보다 나이는 어리더라도 계급은 그들의 상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사상8교회'를 책임 맡고 있던 김인경 입다목사를 위시하여 '영주동2교회'를 맡고 있던 요셉목사, '당감동10교회'를 맡고 있던 애훗목사등 몇 사람의 목사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순종적이고 별반 내세울게 없는 어줍잖은 인사들이다. 결핵환자라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한 요셉목사, 길거리 난전에 앉아 도장이나 고무인등을 파서 생계를 유지하는 애훗목사등은 오히려 그의 말 펀치에 휘둘리고 있었다.
당시 세칭 동방교에는 길거리 난전에서 도장을 파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또 한 사람은 바로 '초량12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도로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을 니고데모라고 부르는 이일우씨다. 이분은 성품이 온순한 분으로 세칭 동방교 '초량12교회' 바로 옆에 있는 고신파 삼일교회의 집사로 있던 분인데 어떻게 동방교에 전도를 받아 입교한 분으로 그의 부인이 세칭 동방교의 부산지방에서는 꽤 유명세를 탓던 성이 염씨요 명명이 다말인 바로 그 유명한 다말장로이다.
자그마한 덩치에 여장부였다. 동방교의 학생 신도중에 학교에서 말썽이 나서 부모를 모셔오라고 하면 이 양반이 해당 학생의 어머니로 나서서 교무실로 찾아가 사태를 수습하기도 하고 관할 경찰서 정보형사와도 의도적으로 친하게 지내면서 명절이나 휴가때 과일상자며 금일봉을 전하면서 말썽이 날때를 대비해서 미리 선수를 쳐서 울타리로 삼기도 하는등, 여자로서는 마태목사와 맞짱을 뜰 수 있는 세칭 동방교의 '초량12교회' 여신도다. 성격이 괄괄하고 활달해서 동방교내에서 널리 알려져 있을뿐 아니라 곧잘 설치고 다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양반이 바로 한때 세칭 동방교인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의 총회장을 지냈던 이일우목사의 부인이다.
(좌로부터 두기고장로, 드보라, 입다목사, 요셉목사, 애훗목사)
(좌측부터 애훗목사, 두기고장로, 다말장로, 입다목사)
니고데모 이일우목사는 원래 길거리 난전에서 도장을 파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으로 생김새가 좀 특이해서 위의 이빨들이 뻐드렁니처럼 모두 앞으로 툭 튀어나와 항상 휑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듯한 인상이었다. 빈티가 날 정도로 별로 품새 자체가 없는데 세칭 동방교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은 특출해서 2대 교주 노영구의 후기에 서울의 대기처로 불러 올린것 같다.
어느때인가 보니 총회장 이일우목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명칭이 목사지 언제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도 알길이 없다. 얼마나 내세울 만한 인재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2대 교주 노영구로서는 온순하고 말 잘듣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 했을 듯 하다. 그야말로 이름뿐인 꼭두각시 총회장이었지만 그는 그후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고데모 이일우 목사의 부인 다말 장로는 지금의 문현동으로 옮겨가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부산한빛교회 간판을 달고있는 세칭 동방교로 새벽기도를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그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사고당일 아침에 급박하게 ‘어르신(?)’(2대 교주 노영구)에게 그 보고가 들어갔는데 놀라고 당황한 ‘어르신(?)’ 말씀이 “이것은 정말 예정에 없던 일인데...” 하면서 어물거리다가 조금후에 망자와 대화를 나눈듯이, 망자가 흰 성복을 입고 싶어하니 빨리 입히도록 연락하라고 해서 급히 문현동의 세칭 동방교에 전화를 걸어 망자에게 흰 성복을 입혔다고 한다.
아, 정말 모를지고... 하나님(?)에게도 예정에 없는 일이 지 마음데로 갑작스레 발생하는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세계.
교주의 지시가 먹혀들지 않고 불경스러운 독불장군, 마태목사를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다. 한밤중의 건장한 사나이들은 '초량12교회' 1층의 큰방에서 혼자 자고 있는 마태목사를 잡아가서 심판하기 위해 서울 본부에서 출동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마태목사는 대구에서 발행하는 모 일간지의 기자 신분이기도 했었다.
당시 30대 초반 전후의 나이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학력도 없는 이 양반이 어떻게 해서 대구에서 발행하는 유명 지방신문의 기자 직함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대구에서 발행하는 지방지의 부산 주재기자로서 경찰과 검찰등 관계 기관에 출입하면서 쓰는 기사가 그 신문에 게재되어 자랑스럽게 들고 와서 보여주곤 하던 것들을 내가 직접 보았으므로 부인할 수가 없다.
입담도 좋았고 처세에 능했던 그는 아뭏던 세칭 동방교의 목사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가 세칭 동방교 '당감동10교회'의 충직한 장로 신도였고 그의 어머니를 따라 중학생 시절부터 동방교의 신도로서 자라난 그는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마태였고 그때까지 미혼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세칭 동방교에서는 신도들중에 남녀 공히 누구도 혼인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사례가 아예 없었다. 말세가 다 되었고 곧 인류를 심판하는 불바다가 세상에 임할텐데 결혼이란 상상도 못하는 시절이었다. 세칭 동방교에서 서로 격이 맞지않는 대기자들끼리 억지로라도 결혼시켰던 시기는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 양반이 사회물도 많이 먹었고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자연히 세칭 동방교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하여 불만도 많고 서울 본부에서 내려오는 지시와 시달도 잘 먹혀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심판의 날이 온 것이다. 자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입이 막히고 머리는 산발인체로 이불에 둘둘 말려 대기중인 차에 떠밀려 들어가게 되었다.
박종범이가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고 조수석에는 옥수가 타고 뒷좌석에 삼손목사 김태문과 나사로장로 이상래가 양쪽에 앉아 가운데 앉힌 마태목사를 꽉 끼고 서울까지 납치, 서울로 가는 도중에 어느 산길의 절벽앞에 세워놓고 발로 차 버릴듯한 기세로 협박하기도 했는데 그때 버스 한대가 지나가면서 크락숀을 울리는 바람에 죽지 않았으며 또 납치되어 가는 도중에 대전의 어느 주유소에서 기름을 보충하는 사이 사람들에게 발각되었을때 옆에 붙어 감시하고 있던 나사로 이상래가 ‘우리 형님인데 정신병자라서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러 가는 길’이라고 말해 무마되었다고 후일 그는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었다.
여하튼 그는 입이 막히고 손발이 묶여 꼼짝없이 아무도 모르게 차에 실려 부산에서 서울근교의 어느 대기처 농장까지 강제 납치되어 간 것이다.
당시 '초량12교회'에서 마태목사가 납치되어 갈때 그것을 소리없이 지켜본 당시의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는 후일, 간이 콩알만 해져서 어찌할줄 모르고 쩔쩔매면서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모른다고 그때의 두려움을 나에게 실토한 바 있다.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는 다짐과 협박을 얼마나 받았으랴. 오랜 세월동안 어째서 마태목사가 '초량12교회'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잡혀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쨌던 마태목사는 잡혀갔고 거기서 죽을 고생과 린치를 당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서도 무슨 음식을 잘 못먹어 설사가 심해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리게 되었는데 처음 몇 번은 감시자가 따라 붙더니 서너번 이상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되자 ‘이새끼가 뭘 쳐먹었길래 계속 지랄이야’ 하면서 감시자가 방심하고 따라붙지 않더란다.
그 틈을 타서 감시자가 없는 사이에 담장을 겨우 넘어 구사일생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얼마나 황급했으면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상태로 얼굴은 정상이 아니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엉망인체로 탈출하여 인근 주택가에 들어가 음식을 부탁하여 얻어먹고 있는 사이에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집주인이 파출소에 신고하여 경찰관이 출동하게 되었고 파출소에 연행되어 사정을 설명하고 신변보호 요청을 하게 되어 그 사건이 도하 각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고,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부산까지 돌아왔는데 동방교내에서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간에서는 소문 무성한 큰 사건이었다.
그 심판 실행의 주동 인물이 바로 김태문 삼손목사다. 그도 아마 교주의 지시를 받아 작전을 수행 한 행동대원이었을 뿐일 터, 누가 감히 지방에 상주하고 있는 세칭 동방교의 목사를 강제 납치해서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후일 세월이 흘러 83세의 노인이 된 김태문 삼손목사를 부산의 동래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만나 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에게 직접 그때 일을 듣게 되었다. 그때 마태목사를 잡아다 놓고 심판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다. ‘영혼은 할아버지(교주)가 책임 지세요, 육신은 내가 책임 지겠습니다’ 라고. 마태목사가 심판이라는 린치를 당하고도 아마 제대로 굴복하지 않으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태목사가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체 구사일생 탈출했기 망정이지 대기처라고 하는 넓은 농장 어느 구석에 시신 하나를 묻어버려도 아무도 알 사람이 없는 것이다. 마태목사가 탈출한 후 사회적으로 큰 말썽이 나고 문제가 커졌으니 그를 제대로 관리하고 감시하지 못한 김태문 삼손목사와 그 일당 패거리는 그후 얼마나 닥달을 받았을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경찰수사를 받는등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으리라. 아... !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인터넷 검색자료---
동방교 일제수사
동아일보 1970.02.20 기사(뉴스)
신도고발, 이탈자 감금폭행
경찰은 20일 동방교란 이름으로 흔히 말썽을 빚어 온 대한기독교 개혁장로회가 교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을 불법감금, 폭행을 가하고 금품도 강요하고 있다는 피해자들의 고발에 따라 일제 수사에 착수, 우선 동교 총본부 전도사 이상래(33)씨와 황보동(33)씨를 불법감금및 특수폭행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의 이러한 수사는 48일동안 동방교 간부들에게 감금되어 심한 폭행을 당했다가 19일밤 탈출했다는 동교 부산 초량교회 부목사 김병구(29)씨의 고발로 착수된 것이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15년 전부터 동교를 믿어오다 싫증을 낸 김씨의 경우 작년 12월 31일 초량교회의 소위 교육자 방에서 잠자다 입건된 이씨등 5, 6명에게 눈을 가리고 헝겊으로 입을 틀어막혀 심한 폭행을 당한 후 경기도 소사에 있는 동교 농장 골방에 10일동안 감금되어 계속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김씨는 지난달 11일 신촌에 있는 동교회 골방으로 또 끌려 와 ‘너는 일백일이 되도 여기서 못 나간다’는 협박을 받았으며 지난 8일 서교동 교회로 옮겨진후 19일 간부들이 교주 무덤에 제사를 지내려 간 사이에 탈출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위의 기사 중에서 ‘이상래’는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나사로’인데 보통 ‘나사로 장로’로 불리웠다. 경남지방의 마산에서 건달같이 지내던 그가 어떻게 세칭 동방교에 전도되어 들어왔는지 알려진바는 없으나 서울 대기처로 올라가 한때 부산지방에 순회자로 내왕한 경력이 있으며 가늘게 찢어진 작은눈에 인상이 아주 험상궂었던 그도 동방교의 여러사건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고 곤욕을 치른후 동방교를 떠났고,
그 이후 부산지방에서 얼굴을 알리지 않으려는듯이 언제나 시커먼 선그라스를 끼고 어느 노선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로 생활하고 있는것을 본 사람들의 목격담이 전해지곤 했었다. ‘초량교회 부목사’란 ‘목사’를 잘못 표현한 부분이고 ‘교육자 방’이란곳은 '초량12교회'의 ‘1층 큰방’을 말한다. ‘경기도 소사에 있는 동교 농장’이란 노광공의 묘가 있다고 해서 ‘성지(聖地)’라고 부르는 동방교의 대기처를 말하고 ‘서교동 교회’란 당시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 ‘성수대’가 있던 곳을 말한다.
(좌측부터 두기고장로, 나사로장로, 애훗목사, 입다목사 )
상기에 언급된 김태문 삼손목사, 이상래 나사로장로등 기갈이 세고 성격도 우악스러워 다루기 어려웠던, 그러나 선대 교주(노광공)로부터 충성하던 간부들은 수년 후 모두 제거된다. 검경의 수사를 받고 기소되어 실형을 살고 나와 아예 사라져 버리거나, 지시라는 명목으로 사찰로 보내거나,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부를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 보낸 후 동방교 내부 신도들에게는 금(禁)을 치는(만나지도 상대하지도 말라는 동방교의 은어-隱語), 요즘말로 하면 왕따시키는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김태문 삼손목사 같은 사람들의 경우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면 아직도 그는 미망의 꿈속을 헤메고 있는 상황이다. 할아버지(교주)로부터 무슨 큰 밀명을 받아서 아무도 모르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등 자기도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죽어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아편같은 이단사이비 종교에 파묻힌 안타까운 현상들이다.
첫댓글
당감 시장 입구의 작은 집에 살던 마태 목사가 기억납니다. 그 분의 어머니는 청력이 않좋은데도 항상 예배의 앞자리에 앉아서 자기 충성심을 보여 주었지요. 한 때 마태 목사는 부산의 개혁 교단에 들어가 전도목사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부산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모습도 보았고요. 넖은 대머리에 호방한 목소리를 가졌었는데, 한빛교회(당시 문현 성안교회)담임 여전도사에게 자신을 몰라본다며 호통을 쳤다고 해서 그 뒤로 저는 달갑지 않게 보았습니다.지금은 70대 노인이 되었겠군요.
녜... 그런 일이 있었군요.
동방교의 전설 마태목사를 몰라본 여전도사도 딱하네요. ^^
마태목사 김병구氏,
작년에 별세했습니다. ㅠ ㅠ
작년에 돌아가셨군요. 그 좁은 집에서 사느라 고생이 많았겠어요. 안타깝네요.
당감동 시장 입구의 작은 집은 동방교 당감동10교회의 여자 장로인 마태목사의 모친이 오랫동안 거주하던 집이고,
마태목사 본인은 부인과 함께 부산의 재송동에서 제법 큰 단독주택을 소유하고 아들 딸 잘 키우며 사셨어요. 이제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여 제몫을 잘하고 있어요.
원래 말빨이 센 양반이라 富도 제법 축적했고 어디가서 기죽고 살지는 않았는데 가끔 연락하면 반갑게 맞아주었고 밥도 한그릇씩 하면서 동방교의 숨은 이야기들도 많이 나누었는데 많이 섭섭하네요. ㅠ ㅠ
마태목사 김병구를 납치, 감금, 린치했던 삼손목사 김태문과는 후일 그들의 노년에 부산에서 다시 만나 화해했는데 그 스토리도 언제 함 기록해둘까 생각중입니다.
마태목사님을 부산 개혁교단의 노회에서 뵌적도 있었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분은 노광공을 훌륭한 분이라고 하면서 나름 양다리를 걸쳤다는 생각을 갖게 하더군요. 작년에 돌아가셨다니... 그 분도 동방교의 피해자로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되네요.
마태목사의 연세드신 어머니, 동방교의 그 흔한 여자 장로중의 한분이지요. 그분의 명명은 잊었지만(어느날 갑자기 이름이 생각날 수도 있지만) 그 할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마태목사 김병구는 서울 대기처에 올라가 생활한 적이 없으니 동방교의 깊숙하고 내밀한 공간과 상황에 접했던 일은 없었지요.
어린 나이에 모친의 손에 이끌려 동방교에 들어와 노광공의 생존시에는 盧에게 귀염도 많이 받았지요. 盧와 金은 같은 범띠생이라고 자랑도 많았고.
노년의 그에게 노광공을 창조주 재림주 심판주라고 정말 믿느냐고 직설적인 질문을 여러번 던졌는데 절대 즉답은 안하고 두리뭉실 존경하는 분이라고만 얼버무리지요.
여러번 만나 그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본론은 피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꺼집어내서 본론을 흐트리고 긍정도 부정도 안하는 회색주의자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린치사건 이후에는 좁은길=동방교에 가끔 나타날뿐 다시는 籍을 두지는 않았지요.
납치, 감금, 살해위협등 극심한 충격으로 정신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잔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안타까운 족적을 남긴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