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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오늘 여러분들과 교제를 나누게 될 이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교제를 나눌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신성한 본질을 지닌 성령님으로 잉태되시고 아울러 사람의 본질을 지닌 동정녀 마리아라는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낳으셨으므로 주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을 동시에 소유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우리 일반적인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보통 육체를 가진 사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람의 본질과 함께 신성한 본질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제삼 제사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남자로 말미암아 잉태되어서 여자의 뱃속에 잉태되어지는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사람의 본질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먼저 성령님으로 잉태되셔서 신성한 본질을 지니셨고 그리고 아울러 이 사람인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낳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본질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 누가복음의 참 주제가 되시고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계신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최고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30년 동안의 이 생애의 삶과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삶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속성과 신성한 본질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통한 미덕들을 통해서 나타난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그러한 이 인간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아볼수 없는 최고의 사랑을 가지셔서 그 사랑을 예수님의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나타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참 생명이 되시고 참 구원자가 되신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이 교제의 말씀이 비교적 난해하고 좀 어려워 보이지만 한 번 두 번 여러분들과 반복되어지는 말씀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이 안에 내포하고 있는 이 말씀의 귀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이 밝히 아시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신 이 작은 예수님으로 나타난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잉태되어져서 신성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성한 본질을 지닌 성령님으로 잉태되셨고, 또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인간의 몸을 지닌 자로 인간의 본질을 가진 자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신성한 본성과 그리고 인간의 미덕들을 지닌 인간의
본성 둘 다 소유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지가 않죠. 사람은 한 가지 본질인 사람의 본질만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보통 우리가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모든 자들은 남자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여자에게 났기 때문에 한 가지
본질인 사람의 본질만 있을 뿐이지만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성령님으로 잉태되셔서 신성한 본질을 지니셨고, 그리고 또한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사람의 본질을 가진 특별한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
그리스도가 되실 수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을 모두 소유하고 계신 것이 우리 인간과 전혀 다른 인성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신성이 아닌 인성만을 소유하고 태어났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신성한 본질을 지닌 성령님으로 잉태되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본질 또한 가지고 계시다 라는 것을 알 때 바로 이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부터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바로 이 모든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사신 주 예수님께서는 신성한 본질과 인간의 본질 모두를
소유하고 이 생애를 사셨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 하늘에 속한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계신 그 신의 속성인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미덕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짐을 말미암아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구원은 그냥 일반적인 어떤 그런 것으로 우리에게
전해져서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 이 아니라 신성한 속성들과 신성한 본질들을 지닌 그 예수님의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소유한 이 구원은 어떠한 구원인지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진 비유들을 통해서 복음적인 이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그 렇다 라면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주님의 그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의 우리를 향한 구원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얼마나 놀라우며 얼마나 상상할 수 없는 크신 구원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 성경 특별히 누가 복음을 통해서 계시를 받을 수 있는데 바로 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바로 주님의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나타난 최고의 하늘에 속한 사랑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구원을 설명하는 아주 좋은 예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기 성경을 보면 그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선생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을 하시면서 이웃에 대한 것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이웃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설명할 때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누가복음 10장 30절부터 37절까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0: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매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상처를 입혀 그를 반쯤 죽이고 떠나갔느니라.
10: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오다가 그를 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가고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바라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가되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던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즙을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10:35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 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10:36 이제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시니
10:37 그가 이르되, 그에게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하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바로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에 대한 말씀 가운데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는 이 자는 누구일까요?
여러분 요한복음 4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9 그때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이 예수님께서 갈급함과 갈증을 겪고 계심으로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이 모습은 우리를 대표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
목마름과 갈급함으로 인하여 생명이 고갈되어져서 죽어가고 있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왜 목말라 하셨고 왜 갈급해하셨고 왜 물을 마시길 원하셨을까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사마리아 여인 안에 포함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께서 목말라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목말라하고 갈급함으로 말미암아 생수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죠.
그때 9절에서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치 아니함일러라.이 얘기는 뭐예요? 사마리아 사람 가운데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인들이 상종치 않을 정도로 비천하게 여기고 하대하며 아주 업신여기고 조롱받는 사람들이 이 혼혈 민족으로 형성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는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비방받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질 못하고 있는데요. 요한복음 8장 48절에 보면 여러분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8:48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린 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냐? 이 얘기는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 달리 아주 유대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비방받고 낮은 자로 치부받고 천한 사람으로
업신여김으로 말미암아 개 같은 사람들로 이방 민족들보다 더 천하게 여기고 더 거절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비방받고 조롱받고 손가락질 받고 반대와 거절을 받은 그런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방받으시고 이렇게 온갖 사람들부터 조롱을 받고 완전히 거절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낮고 천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비방받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 30절에 무슨 말씀을 하시죠
10: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매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상처를 입혀 그를 반쯤 죽이고 떠나갔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보면 그 강도들이 그 사람의 무엇을 뺏어 갔습니까?
그 사람의 재물이나 보물들 돈을 뺏어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옷을 뺏어갑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선물해 주시는 의의 옷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의 옷은 십자가를 통하여 소극적인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함 받은 의의 옷을 뺏어가기 위해서
사단이 자신의 수하들을 통해서 이 강도와 같은 그런 자들을 통해서 옷을 벗기고 뺏어감으로 말미암아 그가 의의 옷이 없게
됨으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인도, 그 강도 만난 자 거의 죽게 된 자를 피하여 지나갔을 때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비방받은 예수님자신이시죠. 예수님은 낮고 천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손가락질 당하고 비방받고 천대받은 자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고 정말 사람들에게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존귀함에 대해서 가르치는 그러한 이 레위인들 까지도 그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지나쳤을 때 33절 말씀이죠.어떤 사마리아인은 바로 이 사마리아인이 조롱받고 천대받고 멸시받는 예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 자신이 낮고 천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유대인들이 조롱하였던 그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예수님께서 여행하는 중에
바로 거기에 이르러 그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원래 자기가 올라타서 편안함으로 길을 가야 되는 그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그 짐승을 그에게 그의 안위와 그의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내어
주고 주막으로 가서 끊임없이 끝까지 돌봐주고 또 다른 어떤 일정에 따라서 볼 일이 있기 때문에 가셔야 됨으로 내가 다시 돌아와서 부비를 더 줄 테니까 끝까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주라 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들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가르쳐주고 계시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 30년 동안의 생애와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아름다운 미덕들을 통해서 바로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주님의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나타난 구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한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생명을 전해주고, 하나님의 그 사랑과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가르치고자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버릴 수밖에 없는 그 강도 만난 자를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사랑과
긍휼과 동정과 은혜로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보아 주막에 데려가 주막 주인에게 끝까지 내가 부비가 더 들면 다 나중에 갚아줄
테니까 이 사람의 상처를 돌봐주고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해 주라는 간절한 요청을 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는가를 보여주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이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늘에 속한 사랑을 이 땅에 가져오시기 위해서 생애를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나타날 수 없는 것을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가지고 계셔서 사랑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 안에서의 하늘의 최고의 사랑, 이 땅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늘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올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나타내 보여진 삶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돌보지 않고 세상에서 최고의 종교 안에서의 하나님을 섬긴다 하고 성경을 가르친다 하며 세상 가운데 사는 자들
가운데 최고의 높은 종교적 수준에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들 까지도 회피한 그 일을 사마리아 사람으로 치부된 멸시받고 천대받고 비방받은 낮고 천한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서 접촉하시고 구원하신다 라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도 보면 세가지
비유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가 그 중의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라는 이러한 양에 대한 비유그리고 8절에
또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개가 있는데 그녀가 한 개를 잃어버리면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그리고 11절에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15:12 그 중의 작은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소서, 하니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매
15:13 그 뒤 며칠이 안 되어 작은아들이 전부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니
15:14 그가 다 탕진한 뒤에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니라.
15:15 그가 가서 그 나라의 국민 중 하나에게 연합하니 그 사람이 그를 자기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니라.
15:16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자기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
15:17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15:18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15:19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15:20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15:21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15:22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이 첫 번째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 8절부터 10절 까지는 여자에 대한 열드라크마에 대한 얘기 11절부터 24절까지는
세 번째 탕자의 비유에 대한 얘기인데요. 이 세 가지 잃은 양에 대한 비유 여인을 통한 열드라크마에 대한 비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인간 세상에서는 도무지 나타내 찾아볼 수 없고 우리가 전혀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최고의 사랑인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인간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신 예수님께서만이
가지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속한 최고 수준의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내포하고 있는 도덕성 안에 있는 그런 구주로서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예증해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으며 이 세 비유들을 통해서 하나로 합쳐짐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왜 누가복음 15장에 바로 이 사람에 대한 얘기 여인의 드라크마에 대한 얘기, 아버지에 대한 탕자의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것은 하늘에 대한 비밀의 계시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선한 목자 바로 이 목자로 나타난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끊임없이 애를 쓰고 있는 이 사람 목자로 나타난 선한 목자는 아들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이 선한 목자로서 우리 죄인들을 이와 같이 찾고 계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 드라크마에 대한 이 비유는 여인은 성령님을 의미하고 있죠. 성령님께서는 끊임없이 이 선한 목자를 통해서 찾은바
되어진 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보존할 수 없는 이것을 성령님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는 것을 동시에 우리의 선한 목자로 나타나신 아들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찾으시고, 또한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바로 이 아버지로 나타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죄인들을 선한 목자를 통해서 찾으시는 것으로 종결시키지 아니하시고 등불을 켜고 구원하시기까지 그것을 발견하여서 자신의 품에 넣어주시기까지 회개하는 죄인들을 선한 목자를 통해서는 찾고
계시고, 성령님을 의미하는 여인을 통해서는 구원하시며,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는 기쁨으로 집을 나갔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맞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우리가 이 세가지 비유를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들을 왜 찾습니까? 바로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찾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왜 그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 깜깜한 곳에서 혼탁한 곳에서 냄새 나는 곳에서 왜 그 열드라크마 중에서 한 드라크마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왜 구원하기를 작정하십니까? 소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사랑했기 때문에 찾았고 그리고 여인으로 표상되어진 성령님께서 는 잃어버린 동전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교회 바깥에 주님의 품 바깥에 있었을 때 이렇게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기쁨 가운데 소중하게 사랑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기쁨으로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핏값으로 산 생명을 소유한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찾고 구원하시고
받아들인다 라는 것을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진 이 세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아들과 성령님과 아버지의 그 세 분 하나님의 완전한 세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랑의 예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누가 복음을 통해서 이 세 가지 비유를 보여주신 이유는 마치
우리가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처럼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특별히
3년 반 동안에 공생애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진 그 생애의 모습들, 삶의 모습들, 생활의 모습들이 최고의 사랑인 최고의 도덕적인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 나타난 신성한 속성들, 충만한 아버지와 아들과 영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아들과 영과 아버지 하나님의
그 세 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서 바로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 나타난 신성한 속성들로 충만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최고의 도덕적인 수준의 아름다운 미덕들이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사랑은 세상에 얼마나 많이 널브러지게 표현되어지고 있는 건지 몰라요.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도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이 누가 복음을 통해서 나타낸 이 사랑의 예는 하나님의 그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에
대한 것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이렇게 보여져 나타내졌다는 것이 최고의 도덕적인 이 생명의 수준 안에서 나타내 보여진 인간적인 품성들, 예수님의 그 생애를 통해서 나타나진 최고의 아름다운 미덕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5장에 세 가지 비유와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 사람의 비유를 이렇게 계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든지,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잃은 양에 대한 비유,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에 대한 얘기, 그리고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사랑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구원을 행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 있는 신성한 속성들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하게 그냥 사랑의 예를 이렇게 감지하는 것은 아주 조그마한 제한적인 부분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진 신성한 속성들, 그 신성한 속성들은 하늘의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계신 사랑의 최고의
속성인데 그것이 최고의 도덕적인 수준으로 어떤 수준입니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레위인도 버렸고 제사장도 그 강도
만난 자를 버렸지만 어째서 이 박대받고 천대받고 조롱받고 거절받고 비방받는 이 낮고 천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칭함받는 예수님은 그 일을 행하셨느냐 이 말입니다.
이 지고한 사랑 이 위대한 사랑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 사랑이 예수님을 통한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 있는
신성한 속성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않고 그냥 이 복음의 비유들을 통해서 단순하게 우리가 그냥 사랑의 예로 치부받으면 누가 복음을 통한 진정한
성령님의 계시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예 그렇습니다.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사랑 예~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놀라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 아들도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그리고 성령님께서도 잃은 동전으로 상징되어진 죄인들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고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정말 사랑과 정말 그 사랑의 하나된 마음으로 돌아옴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러한 최고의 사랑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구주의 구원은 이 복음 사례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을 이러한 선한 사람 사람의 비유라든지 잃어버린 양의 비유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버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을 통해서 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소중하게 여기는 영의 하나님과
아들의 그 잃어버린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시고 돌아온 탕자를 얼마나 기쁨 가운데 얼마나 만족한 가운데
받아들이신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주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는 사례를
우리는 7장 36절부터 50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7:36 바리새인들 중의 하나가 그분께서 자기와 함께 잡수실 것을 그분께 구하매 그분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음식 앞에 앉으시니라. 7:37 보라, 그 도시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신 것을 알고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7:38 그분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 시작하여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고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에 부으매
이 여인이 도대체 누구인가 마르다인가 마리아인가 아니면 죄를 많이 지은 막달라 마리아인가 하는 설왕설래하는
얘기들이 있지만 이 얘기에 대한 것은 우리가 예전에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치유를 받은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병으로부터 치유한 일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고 그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죠.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은 이 바리새인으로부터 멸시당한 자가 바로
이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왜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여기3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주를 초대한 바리새인이 이 광경을 보고 속으로 말하기를 "만일 이 분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여인이 누구이며
어떤 여인인가를 알았으리라. 이는 그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라고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아주 반대하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화를 가지고 분을 내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경외하여서 식사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로부터 멸시당한
이 여인을 이 죄 많은 여인이라고 이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9절에 보면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떤 자 곧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 라는 얘기 이 37절에 보면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죄 많은 여인을 주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고 경외하여서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으로부터 멸시당하는 이 여인을 주님께서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바리새인을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바로 시몬 베드로를 핀잔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을 간접적으로
권면하고 다루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죄 많은 여인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멸시했습니다. 경시하고 거절했습니다.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경시했습니다. 자신도 병을 가지고 있었다 라는 것은 바로 죄를 소유하고 있었다 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바리새인은 죄 많은 여인을 하찮게 여기고 경시하고 거절하고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이때 나타난 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어떻게 다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그 보여준 그 사랑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생명의 수준이며 그리고 어느 정도의 최고
수준의 도덕성에 따라서 이 일을 행하였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여러분 누가복음 19장1절부터 10절까지 아주 희한한 이 이야기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19:1 예수께서 여리코로 들어가서 그 곳을 지나가시더라.
19:2 보라, 삭캐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요, 또 부자더라.
19:3 그는 예수가 누군지 보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으니, 이는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더라.
19:4 그러므로 그가 앞으로 달려가서 주를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주께서 그길로 지나시게 됨이더라.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시자 그를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삭캐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으리라."고 하시니
19:6 그가 서둘러 내려와서 기쁨으로 주를 영접하더라.
19:7 무리가 그것을 보고 모두 수근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과 더불어 손님이 되어 들어갔도다."라고 하더라.
19:8 그때 삭캐오가 서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나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착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나이다."라고 하니
19: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라.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 것이라."고 하시더라.
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그 아들이 회개하는 죄인들 잃어버린 어린 양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잃은 동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돌아온 탕자를 얼마나 기쁨 가운데 받아들이는 이 세 분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을 나타내 주시고 보여줌에 있어서
또 한편 보여진 이 복음의 사례가 삭개오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2절에 보라, 삭캐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요, 또 부자더라.이일은 여리고에서 발생된 일입니다.
여리고라는 뜻은 저주의 도시라는 뜻이죠. 예 바로 여리고의 삭개오라는 이 사람은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옛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옛 피조물, 옛사람인 우리들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자였다 라는 것입니다.
이 세리장 삭개오는 동족인 유대 민족들에게까지도 조롱받고 반대받고 거절받고 손가락질 받는 아주 악한 사람이었지만
모두가 그 저주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삭개오라는 사람을 멀리하고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하찮게 여기고 등을 돌렸을 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그가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갈망하고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저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속한 사랑을 가지고 오신 분이실까 라는 궁금증과 호기심과
그러한 갈망과 추구를 가지고 그를 찾기를 원하여서 예수님을 찾고 있었지만 키가 작았기 때문에 4절에서 보면 그분을
보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가 키가 작다고 했는데 키가 작아도 사람이 없었으면 예수님을 보는 데 지장이 없었을 터인데 사람이 너무나
많아가지고 더군다나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추구하고 갈망하고 집중하고 보기를 원했던 그가 그 일을 이룰 수 없자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이 저주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삭개오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다가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그 세리장이요 부자라 하며 그리고 모든 사람
유대의 동족들로부터 악한 사람이라고 치부되어 거절당하고 바로 비방받고 손가락질 받고 등을 돌리고 있던 그 사케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셨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얘기하셨습니까?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누구도 그를 관심 갖지 않고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그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었을 때 19장 5절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부며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내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주님의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인간 세상에서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고 보여질 수 없고 표현되어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도덕성을 가지고 그 삭개오에게 다가가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이렇게 다정다감하게
반응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그 생애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 최고
수준의 도덕성을 통해서 나타난 가운데 아름다운 하늘에 속한 신성한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강도 만난 사람이 제사장과 레위인도 거절하고 등을 돌리고
버림받은 그 강도만난 자가 어떻게 사마리아 사람으로 치부하는 모든 자들이 하찮게 여기고 낮고 천하게 여긴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상상조차 했겠습니까?
여러분 그 잃은양의 비유 아니! 100마리의양 중에서 한 마리 잃은 양이 무엇이 가치가 있길래 그 선한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갔을까요? 너무나 그 잃은 양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99마리의 양도 똑같이 그와 아울러 사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무엇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동전을 찾게 하였습니까?
등불로 상징된 그 성령님의 그 빛을 비춰주시는 그것을 통해서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찾게 된 것은 그 잃은 동전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너무나도 그 잃은양을 사랑하고 너무나도 집을 나갔다 돌아온 그 탕자를 정말로 기쁨으로 맞이한
이 아버지와 아들과 이 영에 대한 얘기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희귀함, 아니 희귀하다고 그러면 뭐 하나
둘 셋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지고한 하늘에 속한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 사람들이 어머 어찌 이렇게 나에게 우리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보여줄 수가 있어 라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치유에 대한 얘기이고,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한 선한 목자에 대한 얘기이고,
잃은 동전을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켜고 빗자루를 쓸며 찾는 이야기와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그 상황에서 정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때에 크신긍휼과 크신 사랑과 크신 동정과 크신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우리가 도무지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행하신 최고 수준의 도덕성 가운데 나타난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을 보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주로 오신 구주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강도를 만난 자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치유해 주신 것 그리고
이 10장의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바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찾을 수밖에 없고 잃은 동전을 너무나 귀하게
소중하게 여기셔서 구원하실 수밖에 없고 받아들임에 있어서 아버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함께 동역하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일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삭개오 또한 사회에서 버림받고 저주의 도시에서 살면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경멸당하는 사람이지만서도 그래서
그는 친구 하나 없이 정말 모든 사람들부터 배척당하고 비방받고 조롱받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뜻밖의 반응으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거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건 친구 이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삭개오를 감동시켜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초대하고 그리고 품 안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 것이며, 이 놀라운 사랑이
사람을 구원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도덕적 수준에 있는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계신 최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삭개오와 함께 가셔서 그의 집에 유하셔서 삭개오를 대함에 있어서 이 세상의 누구도 유대의 동족들,
최고의 종교 안에서 살고 있는 그들까지도 삭개오를 하찮게 여기고 천대하고 등을 돌리고 살고 있었을 때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만이 유일한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삶의 품성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아름다운 미덕들을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조차도 이러한 복음의 사례를 통해서 두 강도들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말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품성들을 통해서 이 땅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예수님의 품성을 통해서 아름다운 미덕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보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긴 것에 대해서 우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얘기에 대해서 바로 누가복음
23장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부터 그때 매달린 행악자 중에 하나가 주를 욕하며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니라. 이 한 사람은 비방을 하고 한 사람은 40절에 구 사람을 꾸짖죠 40 그러나 다른 행악자가 되받아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동일한 정죄함을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그리고 이가 42절에 예수님께
간청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2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니
23: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니라.
43절 이 말씀이 예수님의 얼마나 하늘에 속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사랑 최고의 사랑이라고 나타난 것이 부족하다 할정도로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미덕을 통한 최고의 도덕성이 예수님께서 그 인성을 통해서 가지고 계신 것이 얼마나 지고하고 얼마나
지대하고 세상 가운데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신 장면이 주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러분 이 한마디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는
이 말씀은 우리를 눈물 나게 합니다. 우리를 감동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가슴을 부여잡고 그분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그런 형태의 최고 수준의 도덕성이 무엇인지 하늘에 속한 최고의 그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시는지를 보이기 위해서 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한 강도에 대해서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그 아름다운 미덕들을 친히 말씀을 통하여 보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 23장 42절 주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마지막 간구죠.
잠시 후면 목숨이 끊어질 때입니다. 모든 것이 종결을 갖게 될 때입니다.
마지막 간구의 생명의 부르짖음으로 예수님께 외쳤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간과하지 아니하시고 거절치 아니하시고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구주의 최고 수준에 있는 아름다운 미덕을 통한 최고의 도덕성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한 구원은 단순하게 이루어진 구원이 아니라 이러한 지고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3절 말씀을 통해서 그 최후의 마지막 주님을 향한 간구를 외쳤을 때 그의 마지막 간구의 기도를 거절치 아니하시고
간과하지 아니하시고 귀하게 여기셔서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그에게
눈물로 대답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이 말씀에 숨겨진 계시를 보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인간적인 이 30년 동안의 삶과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미덕들 그분의
품성을 통해서 그분의 입술을 통해서 나타나신 그런 계시의 말씀들, 전해지는 토해내는 그 말씀들이 신성한 본성을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을 소유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성경을 올바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성한 속성들이 삶을 통해서 이 땅에 발을 딛고 사신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적인
믿음들과 아름다운 품성들과 그 토해내는 말씀들을 통해서 연합되어져서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었을 때 분개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자가 있었고,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여인에 대한 비유, 돌아온 탕자를 기쁨과 즐거움을 받아내는 비유를 통해서 주 예수님을
발견하고 영접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향유가 든 옥합 여인을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그 바리새인까지도 그 죄 많은 여인을 멸시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시몬 베드로를 경책함으로 말미암아 그 바리새인을 엄하게 권고하시고 권면하시고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 지고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알기를 힘쓰고 더욱더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큰 힘이 되고 능력이 되고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단 한 마디의 말씀밖에 안 했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내가 오늘 내 집에 유하여야겠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거절하고 반대하였지만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자기를 진정한 마음과 사랑으로
영접한 것에 대해서 감동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그 사람이 감동받고 그 사람이 그 하늘에 속한 사랑을 전해주는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지 달변가의 얘기들로 전해지는 그런 것으로 우리가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최후의 순간 앞에 서게 된 이 십자가의 우편인지 좌편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그 한 사람
강도에 대해서 내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진실로 라는 대답을 하셨을 때 그 마지막 간구의 외침과 간구의 부르짖음을 주 예수님께 한 그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뭡니까? 바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그 삶을 또 사람들을 대하시면서 접촉하시면서 마주하시면서 나타내어진 말씀하시는 그런 품성들과 나타내지는 그 인간적인 미덕들은 신성한 하늘에 속한 사랑과 속성들로
인하여 강화되고 풍부해져서 우리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지금 여러 복음 사례들을 통해서 주님의 이 인간적인 미덕들은 신성한 속성들로 인하여 강화되고 풍부해져서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가 있게 되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소유받고 생명을 소유받을 수 있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사시는 인성을 지니신 이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하늘의 인간적인 믿음 또 최고의 하늘에 속한 사랑을 가지고 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또한 이런 신성한 속성들로 더욱더 견고하게 되고 더욱더 강화되고 부유해지고 풍부해져서 인간적인 온전하고도 완전한 이웃들을 모두 소유하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미덕들, 견고해지고 강화되어지고 풍부해지고 부유해진
모든 것들을 가지신 분이 우리 안에 지금 함께 계시다 라는 사실입니다.
예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땅에서 사시는 30여년 동안의 삶과 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사랑에 속함, 하나님의 속성 안에 있는 사랑과 생명을 가지고 사셨던 분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줬을 때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이 연합되어지고 합성되어져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시고 우리에게 삶의 품성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모든 자들이 삭개오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바로 이 한편에 있었던
강도가 예수님께 최후의 그러한 말을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것을 통해서 주님을 영접할 수가 있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위해서 모든것을 진두지휘했던 그 백부장까지도 그분이 가지고 계신 신성한 품성들과
말씀들 생명으로 나타나셔서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의 연합으로 보여진 삶을 통해서 백부장까지도 감동시켜서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때로부터 그전에는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의 연합을 가지고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사셨지만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십자가에 그분께서 못 박히셔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이런 생명을 제자들 밖에서와 사람들 밖에서만 사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때로부터 주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자 영접하는 자 사케오처럼 영접하는 자 예 한편 강도처럼 예수님 나를
주님의 나라에 가시거든 기억하여 주소서라고 얘기를 하였던 그 강도처럼 주님의 그 마지막 말씀을 듣고 믿게 됨으로 말미암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믿는 이들 안에서 오늘날 주 예수님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살아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람들 밖에서 제자들 밖에서 이런 생명을 사셨던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때로부터 신성한 속성들로 강화되어지고 풍부해진 인간적인 그 미덕들을
소유하신 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와 같은 삶을 살기를 갈망하고 추구하고 이끌어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죠.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으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예 오늘날 우리 안에 사신 그리스도께서는 주 예수님께서 30년 동안의 삶과 3년반 동안의 공생애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진
하늘에 속한 지고하고 고귀한 그 사랑과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의 합성체가 오늘날 생명주는
영의 몸을 지니셔서 우리에게 생명주는 영이 되신 우리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 안에 그분께서 오늘날 우리 안에 사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땅 위에 사셨을 때 사람들 밖에서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사셨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을 가지고 사셨지만,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후부터 영의 몸을 취하셔서 생명주는 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사셨던 이런 고귀한 하나님의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을 가지고 사신 그 생명을 이제 우리 안에서 함께 거하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갈망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신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이 생명이 여러 복음
사례들을 통해서 나타나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누차 설명드렸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삭개오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듣는 개인 개인이 정말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거절당하고 반대받은 말할 수 없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삭개오처럼 그런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용납받을 수 없는 그런 큰 죄인들이라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동족들의 피를 뽑아내는 그러한 세금을 늑탈하고 강탈함으로 말미암아 동족들로부터도 오히려 손가락질 당하고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런 삭개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강도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기에 최고의 형벌 형태인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해 보세요.
그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에게까지도 멸시받은 그 죄 많은 여인이라고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십시오.
아~ 내가 그러한 여인이야. 내가 그런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야. 내가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십자가의 저주받은 형벌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정말 큰 죄인이야. 그때 세상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도 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을 때 그 강도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에게 자신의 마지막 소원 마지막 부탁을 아룁니다.
세상에 그 어떤 자에게도 자신의 간구하는 소원을 얘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마지막 만남인 그 십자가 형틀에 달렸을 때 바로 그가 주님 나라에 임하시거든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하였을 때
그 마지막 간구와 소원과 기도와 그 요청을 들은 그분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대답하십니다.
그 어떤 요구도 하시지 않으시고 그 강도가 요청한 그 이상의 것을 바로 예수님께서는 허락해 주십니다.
이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죄를 지어서 십자가 형틀에 죽게한 세상 사람들의 그 응답은 저 저주받은 사람을 저 죄 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소서라는 그 외침으로 인해 그 강도는 십자가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때 마지막 생명의 애착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부탁을 했을 때 주님께서 아무런 조건과 아무런 요구없이 다 이루어주셨다 라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 사랑은 세상에 속한 사랑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전혀 찾아볼 수 있는 사랑은 아닙니다.
전혀 상상도 못하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랑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나 차비가 없는데 돈 만원만 빌려주실래요라고 요청을 했다 칩시다.
내가 다음에 당신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당신이 굉장히 구차한 가운데 있군요.
당신이 지금 나에게 만 원을 요청했지만 내가 당신에게 돈 1억을 그냥 주겠습니다 라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마치 이와는 좀 약간 별개의 것이라 하지만 죄 많은 강도가 이러한 요구와 소원을 아뢰었을 때 그 이상의 것을 허락해 주신
이 예수님의 사랑은 이 땅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보는 우리의 눈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푼 이 구원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단순하게 사케오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내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그런 강도가 요청한 것에 대한 대답은 이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그냥 늘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아이들에게 가족들에게 친구에게 보여주는 일반적인 헤픈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하늘에 속한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 사랑이라는 것을 드러냄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인간 세상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주님께서만이 가지고 계신 아름다운 미덕을
지닌 도덕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대신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강도에게 옷을 빼앗기고 매를 맞음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을 때 누구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을 때
레위인도 제사장도 하나님을 믿는 최고의 종교 안에서 종교의 울타리라는 삶을 통해 살고 있는 그들조차도 그를 버리고
돌봐주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때 이 천하고 낮은 비방받고 거절당하고 모든 유대의 동족들로부터 등을 돌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오히려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그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아무런 그 요구도 없습니다.
내가 너를 구해줄 테니 너 나중에 나에게 이러이러한 보상을 해라.너 잊지 말아라. 내가 널 구해준 것을 너 반드시 기억해야 된다.이런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고 단순하게 그냥 불쌍히 여기시고 단순하게 그냥 긍휼히 여기시고 단순하게 마치 그 잃은 양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잃은 동전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돌아온 탕자가 자기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 핏줄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이런 사랑은 요구나 조건이 전혀 없는 사도 요한 선생님이 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사랑은 우리가 생각한 사랑보다도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정말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고귀하고도
지고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그 이상의 그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도무지 표현할 수도 없고 찾아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나타내 볼 수 없는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삶의 품성을 통해서 말씀들을 통해서 내보여진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미덕들을 통한
도덕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것을 볼 때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영접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내용 가운데서 가장 귀한 주제는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와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가지셨고 생명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구원을 베푸시고 구원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가 될 수가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그 사람으로오신 구주 이것은 어떠한 사랑입니까?세상에는 없는 사랑입니다.
하늘의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께서만이 가지고 계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되고 도덕적이고 완전한 사람이신 구주를 표현한 것이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통해서 복음의 비유들과 사례들을
통해서 구주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얼마나 참되고 얼마나 도덕적이고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온전한 사람인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누가 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성경을 읽는 것과 이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고 읽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사람은 타락한 인류를 대상으로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누가복음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편협적인 복음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이방인들과 그리고 이방인들
안에 포함된 유대인들 까지도 포함한 구원의 복음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얼마나 참되고 얼마나 도덕적이며 얼마나 완전하고도 얼마나 온전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그냥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자신이 펼치는 그 최고의 참되고 도덕적이고 완전한 사람이신 구주를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만을 계시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사신 그 30년 동안의 생애와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통해서 인성을 지니신 사람으로 오신
온전함과 인성을 통해서 인자로서의 그 완전함이 우리를 감동시켜서 그분의 사랑의 지고성과 그분의 생명으로 인하여 우리를
감동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받아들이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으로 오신 그분의 참되고 너무나도 도덕적이고 너무나도 완전하시고 너무나도 충만하고 너무나도
건전하고 너무나도 온전하고 완전한 삶을 사신 실제적인 한 사람의 기록이 바로 누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과는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구주에 대한 얘기이고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이고, 마가복음이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라면 이 누가 복음을 통해서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곧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신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다름 아닌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행하고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거나 자신을 계시하려 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통하여 우리를 감동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계시하고자
함으로 말미암아 참되고 온전하고 도덕적이며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수많은 복음의 메시지들과 복음의 사례들 복음의 비유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21절에 은혜의 시연을 선포하시는 장면부터 누가복음7장 41절, 33절 에서는 500데나리온
이라는 이야기를 통하여 죄인들을 어떻게 용서하시는지를 설명하고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 소중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으로 비유된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 잃은 양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에 대한 이야기,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 13장 2절부터 5절까지는 실로암 망대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이런 장면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들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은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인성의 온전함과 완전함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그분의 지고한 사랑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30절부터 37절까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가 나오고, 14장 16절부터 24절까지는 하나님의
저녁식사에 초대한 비유가 나오고, 15장 3절부터 32절까지는 세 가지 비유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18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에 대한 이런 복음의 비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사례들 7장 36절부터 50절까지 향유를 든 옥합을 드린 여인에 대한 얘기가 있죠.
13장 10절부터 17절까지 바로 사단에게 39년 동안 사로잡힌 바 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례들 가운데 특별히 부자에 대한 경고를 16장 19절부터 31절까지 하고 있고요.
19장 1절부터 10절까지 삭개오를 구원하시는 장면과 그리고 가장 중요한 23장 39절부터 43절에서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를 구원하시는 이러한 복음의 사례들은 바로 주님의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누가복음을 통해서 전해주는 복음의 메시지들, 복음의 비유들, 복음의 사례들은 모두 다른 복음서에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한 메시지들과 비유들과 사례들이 누가복음 안에서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바로 사람 구주에 대한 관점과 그분께서 이러한 참되고 도덕적이고 완전한 사람이신 최고의 아름다운 미덕을 통한
우리를 향해서 구원을 베품으로 말미암아 구원자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하는 구원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이 잠시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반적인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여 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 또한 특별한 유대 민족들에게만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것임을
누가복음 2장 10절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2:10 그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보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알림이니 이것은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죠. 이 누가복음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뿐만 아니라
유대적인 특징보다도 이방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유대 민족들과 조금은 좀 이렇게 떨어진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또는 시돈 땅에 있는 과부를 언급하고 시리아의 문둥병자인 나아만 장군을 고쳐주신 누가복음
4장 25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것이 유대적인 특징보다도 이방적인 특징을 지니고 보통 일반적인
모든 인류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4:25 그러나 내가 진실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의 때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과부가 있었느니라.
하늘이 삼 년 육 개월이나 닫혔을 때에 온 땅에 큰 흉년이 있었는데4:26 엘리야가 시돈 사렙타에 사는 한 과부 외에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고4:27 또 선지자 엘리사의 때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외에는 그 중 아무도 깨끗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마태복음은 왕국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설명하고자 하는 왕국에 관한 교리, 또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노예로 오신 구주에 대한 얘기라면 이 누가복음에 대한 얘기는 최고의 수준으로 나타난 아름다운 구주 예수님의 미덕들을 통한 최고의
도덕성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도덕성의 순서로 기록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복음이 아닌 다른 성경들은 이런 것과 조금은 차이나게 기록되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이 예수님의 인성을 가지고 오셔서 그 최고의 아름다운 미덕을 통해서 나타나진 최고의
하늘에 속한 사랑인 최고의 참되고 최고의 온전하고 도덕적이고 완전한 사람으로 사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수많은 복음 메시지들과 복음의 비유들과 복음의 사례들을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누가 복음의 여러 복음의 비유들 메시지들 그리고 복음의 사례들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자신의
구원이 아름다운 미덕들을 통한 최고 수준의 도덕성 곧 하늘에 속한 지고한 사랑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최고 수준의 도덕성 최고의 사랑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최고의 수준의 도덕성 최고의
하늘에 속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창조되어졌고 피조되어진 자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졌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얘기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랑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그리고 요한일서를 보면 이 빛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도 빛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사랑과 빛은 하나이면서도 약간은 설명되어지는 부분이 조금은 별개일 것입니다.
사랑은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 빛이라면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결과가 빛으로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왜냐 사랑이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이기 때문에 표현으로 결과로 바로 빛으로 나타나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계속 빛에 대한 얘기를 하고있는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이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이시라면 의는 하나님의 표현인 것입니다.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시고 빛이시고 거룩이시고 의다라는 것을 성경은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그 본성 안에서 거룩하시고 그분의 행위 가운데서는 의로우시고 그리고 또한 그분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 안에서 사랑이시고 그리고 그분의 어떤 표현의 본성 가운데서는 빛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빛과 거룩과 의로움이 구약 성경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율법의 계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기본 원칙들이 나타나 있고
계시되어 있고, 특별히 하나님의 이 사랑과 빛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십계명 가운데 아주 적나라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 부분 보이지 아니한 내적인 품성이 형상으로 닮아졌다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모습이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품성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따라 창조되었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빛이십니다. 거룩이십니다. 의로우십니다.
이 사랑과 빛과 거룩과 의로움을 따라 창조되었다라는 의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사람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이 빛이신 것처럼 빛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사랑은 거룩하고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사람은 의로움에 따라 의로움을 가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빛이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거룩과 의로움에 따라
창조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빛이시고 거룩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였지만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만들어졌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이 창조될 당시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이신 그 사랑과 빛과 거룩과 의를 소유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인 사랑과 빛과 거룩과 의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타락하기 전에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를 두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하셨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그 생명나무를 먹고 취하였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거룩과 의를 소유할 수가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먹고 먹고 먹고 하면은 거듭남을 통하여 그러니까 생명나무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거룩과 의를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말 긍휼과 은혜와 사랑 가운데 가장 사람이 가까이 볼 수 있고,
사람이 가장 가까이 곁에 있을 수 있는 그 생명나무의 과실을 두었지만, 인간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간과함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던 것은 피조된 사람이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소유하여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고 살아야 될 필요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가르쳐주고
계시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을 소유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야 되는 줄 보통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그렇게 알고들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하기 전에 이미 생명나무를 두었다는 얘기는 타락하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을 소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타락하기 전에 죄를 범하기 전에도 실족하기 전에도 생명나무 앞에 두신 이유인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그 생명나무인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했다면 하나님의 속성들인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로움 역시
그 아담 안으로 들어와서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여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피조된 사람, 하나님이 창조된 사람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사람이죠.
반면에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산출된 그 갈비뼈로 만들어진 아담에 의하여 아담의 것으로 산출되어진 하나님의
건축입니다. 아담의 또 하나의 건축물이 하와인 것입니다. 아담은 창조되었지만 하와는 건축되어진 자예요 다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된 이 아담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의로움과 거룩함에 뭐를 가졌습니까?
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창조되었다라는 말은 껍데기 겉모양만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두신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껍데기만 겉모양만 가졌기 때문에 진정한 참 실제인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의로움과 거룩함의 실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된 아담은 바로 생명나무를 통하여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여서 정말 그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로움이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이 있어야만 됐다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실족하여서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될 수 없었기에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과정을 통하여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안에서 이 일을 하나님의 그 사랑과 하나님의 존재의 본성인 빛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온전히 사람 안에 취하여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영의 몸을 가지셔서 그 생명주는 영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사람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인 아담이 자신 안에 하나님을 그 생명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그 속성들의 실제인 사랑과 빛과 의로움과 거룩함은 전혀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고 상징하고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취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의 실제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그 속성들인 사랑과 빛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소유하기 위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먹었어야 됏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그의 생명으로 취하는데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간과하고
소홀히 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것이 바로 창세기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다시 먹게 하여서 첫 아담이 실패한 그 일들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속성의 실제인 사랑과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사람
안으로 들여보내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의 몸을 가지셔서 우리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이라는 그릇
안에 하나님과 접촉하게 하여서 그 생명으로 취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게 한 것을 주 예수님의 30년 동안의 생애와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년전 어느 날 베들레헴이라는 생명의 떡집에서 말씀이신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형태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라
칭하는 한 사람으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오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산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라 칭하는 이 한 사람이 된 이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이라 칭하는 한 사람이 되셨는데 이 사람은 실제적으로는 가장 먼저 신성한 본질로 잉태 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 안에 창조하신 바로 그 본질인 사람의 본질로부터 곧 마리아 몸으로부터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으로 잉태되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본질을 가지셨고, 마리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사람의
본질로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께서는 신성한 본질과 인성의 본질을 모두 가지고 계신 인간 안에서 유일하신 전무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사람의 본질이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곧 하나님의 속성의 실제인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로움에 따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의로움에 겉모습을
지닌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껍데기인 겉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어진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된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외형적인 겉모양만 가졌을 뿐입니다. 이 겉모양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여서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나무를 통해서 열매를 먹음으로 생명을 영접할 때 이 하나님의 속성들의 실제인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 실패하고야 말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께서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주 예수님을 통하여 신성한 모든
속성들을 지닌 신성한 본질과 모든 인간적인 미덕들을 지닌 인간의 본질을 지니신 연합과 어떤 합성체 어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 세상에서는 사람일 뿐이지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일 뿐이지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셨으나 2천년 전에 바로 성령님으로 잉태되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본질을
가지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사람의 본질과 신성의 본질이 연합되어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사실 때 이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어떤 본질을 통한 인간적인
미덕들의 연합적인 생명을 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가 없는 삶을 사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최고의 유일무이한 둘도 없이 오직 하나인 이 땅에서의 최고 수준의 하나님의 속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는 도덕성을 가진 삶을 사실 수가 있었 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이 사셨던 이 생애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진 최고 수준의 도덕성은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인간적인 미덕들을 지닌 사람의 합성인 생명을 소유하신 분의 생활이므로 말미암아 바로 성육신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들어오시기 위한 일을 하셨다라면 부활을 통해서는 바로 인성을 가지신 그분의 인간적인 미덕들이
견고해지고 풍부해지고 강화되어지고 부유해졌기 때문에 바로 그 인성이 신성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최고 수준의 도덕성을 말하려고 할 때 이것은 사실은 하늘에 속한 최고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랑은 헤퍼요. 그냥 비일비재하게 사랑 사랑 사랑 얘기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렇게 귀하고 존귀하고
존엄한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최고의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있는 사랑을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아름다운 품성을 통하여 나타내 보여줬을 때
최고 수준의 하늘에 속한 사랑을 가지고 사신 도덕성이라고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이 도덕성은 최고의 하늘에 속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는 이 도덕성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생명의 수준인 것입니다. 이 도덕성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적합한 수준의 적합한 자격을 가지신 것이 바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 1장 2장을 통해서 인간적인 미덕들을 지닌 사람이 바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따라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그 속성의 실제인 사랑과 빛과 의로움과 거룩함의 껍데기와 겉모양만 가졌다라는 것이지
하나님의 속성의 실제인 사랑과 빛과 의와 거룩함을 실제적으로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생명나무를 두신 그 에덴 동산 안에 창조하신 그 사람을 가장 가까이
있게하신 것은 바로 생명나무를 먹고 하나님을 소유하라는 얘기였죠.
그런데 처음부터 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진 이 인간은 사실상
하나님의 외형적인 겉모양만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거룩함만
가졌다라는 것이지 하나님의 속성의 속 부분을 닮은 것은 닮았지만 실제적으로 자기 것이 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같은 실제적인 속성들과 품성들을 나타내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한 네 가지의 속성에 따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속성들의 실제에 따라 사람인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이 창조될 당시에 사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빛과 거룩한 의로움의 실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외형적인 껍데기, 외형적인 그 하나님의 사랑의 겉모양은 가졌어요.
하나님의 빛의 겉모양은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에 외형적인 겉모양은 가졌지만, 이러한 속성들의 실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야만
그것을 소유하고 취할 수 있었고 이 생명나무가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 이 생명나무를 취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들의 실제인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장을 통해서 나타내어진 첫사람 아담은 이러한 속성들의 형상은 가졌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요. 창조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의
실제가 아닌 하나님의 속성들의 형상을 가졌지만 그 실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생명나무를 그 첫사람 아담앞에 두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첫 사람 아담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로 상징된 하나님 자신을 사람 앞에 두셨다는 겁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두셨습니다.
그 첫 사람인 아담 앞에 하나님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됐습니까?실족되고 말았죠.
생명나무의 열매를 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을 더욱더 친근한 방법으로 더욱더 다정다감한 방법으로 의와
생명과 이 빛과 거룩함과 의를 소유하여서 하나님의 속성의 실제인 하나님 자신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가 있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아담도 실족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는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생명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본이 되셔서 그러한 삶을 사시고 부활로 말미암아 영의 몸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는 영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과 함께 연합되어져서 이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생명으로 살 수 있게 하시려고 갈망하시고
그것을 뜻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최고 수준의 도덕성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그 최고 수준의 도덕성과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꿈인데,
그 하나님 아버지의 꿈이 둘째 아담으로 오신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된 사람이
그 첫사람 아담을 통해서는 실패하였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소유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들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속성들을 증거한 것처럼 바로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는 영이 되신 그 영의 몸을가진 보혜사
성령님을 통하여 인간 안에 임재하셔서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들을 지닌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생명을
살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 것이 누가 복음을 통해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고 또 이어서 누가복음의 얘기를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내용이 많이 긴 말씀이며 정리하는 저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빛 비췸을 통하여 하나 깨달은 것은 우리가 창조되었을때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그것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과 그 실제인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생명나무를 늘 먹고 취하는 것이라는 것과 그래서 에덴동산안에 그 창조된 아담을 생명나무 가장 가까이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성과 인성을 연합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안에 들어와 생명주시는 실제이신 예수님의 부활의 영을 취하여 소유하지 않으면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새삼깨닫고 매일매일 거듭나는 삶과 생명나무를 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