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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마귀가 예수를 시험한 것에 대해서 주석들마다 공통된 해석도 있지만 조금 다른 해석들도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없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여 주석들을 참고하면 좋겠다.
필자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3중직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3중직은 선지자, 제사장, 왕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로서 선지자직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도전하였다. 또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고 시험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의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참으시며, 가장 낮은 자로서 유대인의 왕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의 만국과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 것이다. 구분선 아래에서 각 주석들의 해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베이커 성경주석: 신약>, p. 28.
처음 두 시험은 각각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4:3, 6)이라는 조건절로 시작한다. 지금까지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1)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과 비교하기 위해(참고. 호 11:1; 마 2:15). 그리고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 및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을 단언하기 위해 사용해 왔다. 특히 3장 17절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단언 배후에 이사야 42장 1절이 암시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이사야의 종의 신실함에 대해서는 사 42:3을 참고하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또한 메시아적 주제들도 떠올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고 그 후에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탁월한 이스라엘의 대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서론에 나오는 "신학적 주제들"을 보라).
첫 번째 시험은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한 후에 느낀 굶주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시험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각 시험에 대해 하시는 것처럼, 신명기에서 나온 성경 본문으로 대답하신다. 신명기 8장 3절에 나오는 단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떡보다 더 생명 유지에 우선이라고 말한다. 신명기에서 이 단언은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보낸 40년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순종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낮추셨던 때로 기억하라는 명령의 일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 유지의 참된 원천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셨다(신 8:2-3). 그러면서 신명기 8장 5절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8장 3절을 이용한 것은 예수님이 떡을 추구하지 않고 순종하신 것을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대조시키면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이스라엘의 시험과 연결시킨다(8:3, 5; 참고. 출 16:1~5).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여호와는 [그들의] 피난처시라"(시 91:9)고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라는 증거로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시 한 번 신명기에서 나온다. 이번에는 6장 16절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명기의 구절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과연 자신들을 위해 물을 주시는가 하는 의문을 품었을 때를 나타낸다(출 17:1~7).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마귀의 유혹을 거절함으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경험과 대조를 이룬다.
마지막 시험은 세상의 모든 나라가 자신에게 속해 있으며, 예수님이 자기를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 줄 것이라는 암시적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4:8~9). 마태는 예수님이 대답으로 신명기 6장에 나온 말을 인용하고 계시는 것을 보여 준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신 6:13)는 것이다. 오로지 여호와께만 충성을 바치라는 이 명령은 예수님이 이미 인용한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금지의 긍정적 측면이다(신 6:16).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충성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마태는 예수님이 세 번의 광야 시험 모두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신실하셨음을 보여 준다.(누가는 똑같은 세 가지 시험들을 기술하지만, 성전 시험을 제일 마지막 순서로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끝맺는 성전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눅 1:8; 24:53을 보라).
본문이 끝날 때 역설적인 분위기가 조성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호하는 천사들을 보내 달라고 하지 않겠노라고 하셨지만(4:6), 예수님이 마귀를 보내고 나자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 든다(4:11). 하나님은 광야에서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공급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순종하는 아들, 신실하신 이스라엘의 대표자라는 것을 입증하셨다.
<톰슨Ⅲ 주석>, pp. 2013-2015.
4:3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시험 대상의 약점을 잔인하게 파고드는 사탄의 간교함이 잘 드러난 구절로서 메시야직의 본질에 대한 예수의 신념과 자세를 뿌리채 뒤흔드는 말이다. 즉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탄은 '이어든' 이란 가정법을 씀으로써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려 들고 있다. 그리고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함으로써 메사야직의 수행보다 ‘네 자신의 요구나 먼저 채우라'고 유혹하였다.
4:4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직에 대한 변론도 하지 않고 또한 사탄의 요구에 대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장 원초적인 문제를 말함으로써 사탄의 악한 동기 자체를 물리치셨다. 즉 ① 떡을 만들어 보라는 사탄의 유혹 자체보다도 그것으로 메시야직을 증명하라는 것이 문제였다. 메시야직은 기적을 행해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속 희생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데, 더 우선적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② 또한 떡을 만들어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예수는 메시야로서 보다 더 급한 문제, 즉 말씀의 선포와 실천이 더 중요함을 강조함으로써 배고픔을 이용하여 메시야의 가치관과 자세를 호도하려는 사탄의 흉계를 분쇄시키셨다. ③ 예수의 본질과 자세에 대한 사탄의 도전과 유혹은 영적인 의미로 볼 때 언제라도 성도의 본질과 자세에 대한 시험으로 전환될 수 있다<창 22:1>. 따라서 성도는 이런 시험을 당할 때에 첫째, 사탄의 유혹 자체의 논리성을 따지기 전에 배후의 동기를 먼저 살펴야 하며 둘째, 이기는 방법으로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우리는 순간적 떡 문제 때문에 떡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영원한 식량인 말씀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벧후 서론, 특별계시와 성경>.
4:5 거룩한 성 눅 4:9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이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 성전임을 알 수 있다<스 3:8-13>. 성전 꼭대기 성전 뜰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탑이나 난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견해가 다르다. ① 아래로 기드론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성전 남쪽 망대 ②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 부분 ③ 지성소가 자리잡고 있는 부분의 성전 꼭대기. 이 중 가장 유력한 견해는 첫 번째이다. 왜냐하면 ‘꼭대기'에 해당하는 헬, ‘프테뤼기온'은 '프테뤽스’('날개', 계 4:8)에서 파생된 말로 성전의 남북쪽 양편에 마치 날개 모양으로 붙어 있는 망대를 연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편 예루살렘은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도시이니 그곳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6절)은 어떠한 성격의 시험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40일을 예수께서 실제로 그런 높은 곳에 가셨는지 아니면 가정적 상황에서 제시된 시험인지는 분명치 않다.
4:6 뛰어내리라 이 두 번째 시험은 예수의 능력을 시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예수의 메시야직을 알고 있는 사탄이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희생의 길을 걸어가기보다는 세상적 영웅으로 영광을 누려 보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적의 시행은 허영과 야심에 찬 많은 추종자들을 모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너를 위하여…하리로다 시 91:11,12의 인용이다. 이는 예수께서 성경 말씀으로 대답하시므로 마귀도 성경 말씀으로 시험한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마귀의 요구대로 하셨다면 유대 군중들에게 크게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허영의 길이 메시야의 길은 아니었다.
4:7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둘째 시험에서도 예수는 1차 시험과 같은 방법으로 이기셨다. 즉 그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의 권위와 능력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바 새삼스레 이를 자신에게 실행해 보일 필요가 없었다. 동시에 이런 기적을 실행하여 인간들을 잠시 허영과 야욕에 들뜨게 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전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의무였으므로 이런 기적을 실행해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빌미로 하여 예수에게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허영을 자극하여 불필요한 일을 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은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예수의 지혜 앞에서 좌절되었다. 한편 인간을 무모하게 시험(temptation)하지 않으시듯이<창 22:1> 인간도 구원에 불필요한 문제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시험 자체가 곧 불신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고전 10:9).
4:8-10 사탄의 유혹 방법 사탄의 세 번째 시험은 이제 메시야의 자세, 메시야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서 나아가 메시야의 순결성에 도전하고 있다. 자신의 1,2차 시험이 무산되자 사탄은 이제 메시야에게 최고의 쾌락을 보장함으로써 자신과 야합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1차 시험이 물질적 약점을, 2차 시험이 정신적 허영을 이용한 것이라면 이 3차 시험은 가장 본질적인 영적, 신앙적 문제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탄의 시험은 점층적 전개를 밟고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메시야에게 도전하면서 그에 대한 미끼로 세상의 쾌락과 통치권을 제시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4:9 경배하면…주리라 사탄은 최고의 범죄를 유혹하면서 최고의 미끼를 주고 있으나 여기에는 두 가지 면에서 철저히 자기 정체(Identity)를 오해한 사탄의 어리석음이 노출되어 있다. 첫째, 그는 세상의 최종적 창조자가 아니므로 경배 대상이 될 수 없다. 둘째,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즉 자기 자신도 곧 멸망될 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축복을 약속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을 범하고 있다.
4:10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는 이제 도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탄에게 추방 명령을 내리고 있다. 한편 성도는 이미 예수께서 사탄에게 추방 명령을 내리셨으므로 그와 다시 상종하여 여하한 관계도 맺지 말고 그가 우리에게 재차 접근해 올 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 추방 명령을 사용하여야 한다. 다만 그를 섬기라 ① 하나님만을 섬겨야 될 이유는 그분만이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 신앙만이 순결한 것은 그분만이 참 진리요 정의이기 때문이다. ③ 하나님 신앙만이 유효한 것은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여 주셨고 또 실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4:11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평행 구절(눅 4:13)에 의하면 마귀는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떠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예수가 약해질 때를 기다리며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긴 결과 사탄의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최후 심판 날까지 계속해서 예수와 그의 교회를 대적할 것이다.
<개혁주의 스터디바이블>, pp. 1610-11.
4:3 하나님의 아들(16:16 참조). 16:16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에 담긴 의미는 이교도 문헌에 기록된 그런 표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삼하 7:14; 시 2:7). 또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기도 한다(출 4:22).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이런 신분을 완성하신다(2:15 해설). 예수님께 적용될 때, 이 호칭은 아버지와 맺고 있는 예수님만의 고유한 관계를 반영한다(11:27, 21:38).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내 사랑하는 아들”로 인정받으신다(3:17, 17:5).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이 복음서 마지막 장면, 대위임령에 함의된다. 사도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형)으로” 세례를 줄 것을 위임받는다(28:19).
4:4 모든 말씀.신 8:3에서 이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셨던 명령과 공급해 주셨던 만나를 가리킨다. 예수님이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각 시험에 성경 구절로 응대하신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령의 검”이다(엡 6:17). 예수님은 자신의 영적 전투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의지하셨다. 178쪽 “특별 계시와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설 참조.
4:5 성전 꼭대기. 성전 벽의 일부에서는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성전 벽의 꼭대기에서 골짜기의 밑바닥까지는 엄청난 높이였다.
4:6 사탄도 성경을 인용한다. 그러나 사탄은 시 91:11~12를 본래 의미와는 정반대로 사용한다. 시 91편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권고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의구심을 던지면서, 신뢰를 시험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추정은 위대한 믿음의 표시가 아니라 전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830쪽 “사탄”에 대한 신학적 해설 참조. 사탄은 의도적으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 참고, 창 3:15)의 패배에 대한 성경 최초의 복음 선언을 상기시키는 시 91:13(“네가……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의 말씀은 외면한다.
4:10 예수님은 신 6:13을 인용하시면서, 참된 경배에 대한 모든 열정을 가지고 우상숭배를 거부하신다. 예수님은 “강한 자”(12:29)를 이기시고, 사탄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신다.
첫댓글 오. 좋습니다. 성경공부와 묵상이 함께 되겠어요.
네, 이 포스팅만 읽으면 공부와 묵상이 절로 됩니다.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4:3
시험하는 자(* , 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나아와서(* ,프로셀돈) -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단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encouragement)하는 것(Morison)이 아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단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심했거나(Clarke)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륵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에이'(* )로 시작되는 본문의 조건절 형태가 그 절 안에 계시된 내용을 일단 사실이라고 규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단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했다기 보다 그 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단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성(神性)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底意)가 드러났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당신이 지닌 메시야적 권능을 메시야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당신이 당면한 개인적문제(허기)를 해결하는 데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이다. 이때 만에 하나라도(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卑下)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을 요구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대부분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의(義)를 유지하였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사단이 제시한 '돌'은 빵과 같은 모양의 화석(Farra), 또는 석회질의 덩이, 철광석(Page), 아니면 둥글고 매끄러운 돌(A.T. Robertson) 등으로 추측한다. 어떤 재질, 모앙을 하든 그것은 손으로 집어 들을 수 있는 크기의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떡'(* , 아르토이)은 유대인들이 일상 음식으로 먹던 둥근 접시 크기 정도의 밀로 만든 구운 빵(loaves)을 가리키는 것 같다(Thayer).
=====4:4
기록되었으되(* , 게그라프타이) - 원뜻은 '정확하게 새기다'며 완료수동직설법으로 사용된 본문은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성과 영원 효력성을 강조한 말로서 결국 본절은 마귀의 궤계(craft)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으며(딤후 3:16;벧후 1:20, 21),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음을 시사해 준다(엡 6:17). 한편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신자들도 삶에 어려운 시험이나 곤경이 닥쳐올 때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를 본받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다. 사람이...말씀으로 살 것이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 , 에르코메노스)에 적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단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 '사람'(* , 호 안드로포스)의 존재 양식(存在樣式),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 , 우크 모노)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풍요한 땅 에덴에서 성공했던 사단의 시험이 불모의 광야에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성경에서와 창조 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인 '떡'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응당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물질 생활의 헛점을 파고 드는 사단의 교활한 시험을 처음부터 근절(根絶)시켜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out)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in)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된 경전(經典)을 뜻하지 않는다.
공감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5
데려가다(* , 파라람바네이) -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을 가리킨다. 거룩한 성...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라 기록한 누가의 보고(눅 4:9)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가 어느 곳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뱅겔(Bengel)은 이곳이 지성소 꼭대기라 한다. 헤게시푸스(Hegesippus)를 인용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소 꼭대기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몇몇 학자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를 가리킨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꼭대기'률 뜻하는 '프테뤼기온'(* )이 '작은 날개'를 의리하기도한다는 점에서 이곳을 '작은 날개'라 불리우는 헤롯 궁전의 남쪽 망대라고 한다(Meyer, Alford, Thayer, Vincent 등). 이곳은 성전 외곽 건물에 속한 것으로서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 XX, 9, 7;XV, 11, 5)는 그 꼭대기가 골짜기의 바닥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그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은(6절) 분명 마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수 있다.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위장하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의 메시야성에 오점(汚點)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Lange).
세우고(* , 에스테센) -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롤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단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까지 응해야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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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내리라 -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이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심으로써 메시야를 고대(苦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익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 이제 사단의 공격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한 시(詩)이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나꿔채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마치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보듯이 감싸 안는 듯한 상황을 예감케한다. 이같은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이 인용 구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적절하게 적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적(表蹟)에서 찾고 있었으므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록 유흑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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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록되었으되 -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꼐서 말씀하신 '또'(* , 팔린)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附加)적 설명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다(Bruce).
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이다(Bengel, Calvin, Luther;Scriptura explicanda est). 신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벧후 3:16).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 -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가정(假定,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사건에 근거한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이다(신 6:17).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창 3:1, '하나님이 참으로...말라 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죽까 하노라')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대강 잘 읽어 보았습니다. 댓글까지 읽으니 예수님이 받으신 3 가지 시험에 대해 어느 정도 더 잘 알겠습니다.
성경본문과 글쓴이의 요약, 제언을 읽고, 풍성한 주석의 설명까지 들으니 말씀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