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떠난 자리는 어수선하다. 비 내린 오후 목련꽃 진 자리. 바람이 지나간 뒤 나뭇잎의 수런거림이 그렇다. 아이들과 남편이 몸만 씻고 사라진 후, 남겨진 옷가지들과 이부자리와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칙칙 방울 소리를 내는 밥솥과 앓는 소리를 해대는 찌개 냄비가 건성으로 흘리는 말소리 같다.
아파트를 빠져나와 직장 근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다. 허겁지겁 사무실을 향해 종종걸음 하는 동안 생각해보면 그리 급히 갈 일이 아니다. 서둘러 나왔기에 늦은 것도 아니고 직원이 아니니 눈치 볼 사람도 없다. 고객과의 약속이 잡힌 것도, 아닌데 그냥 습관처럼 총총히 바쁘다.
사무실을 청소하다 창밖을 본다. 십일 월 회색빛 도시에 동네 잡동사니를 갖고 바람은 해적질을 해댄다. 그나마 앞집 감나무에 까치밥 몇 알이 달렸다. 알전구가 켜진 듯 붉은 감이 달린 나무의 풍경이 없다면 난 어찌 이 가을을 견디어 낼까. 쓸쓸한 날, 그래, 저렇게 나지막하면서 낯익은 풍경이 그곳에도 있었지. 날 이끄는 곳으로 길을 나서자, 그럼 길이 보일 것이다.
작은 집에서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벼랑산이 보인다. 벼랑산 아래로 햇살을 부리는 강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조용히 사계절 내내 강물에 잠긴 벼랑산이 흘렀다. 굴피집 담장 위로 애기 호박이 순하게 둥글어져 가는 평온했던 여름날, 달빛이 강물에 출렁이는 밤이면 작은 아이는 주전자를 들고 강가로 나갔다. 익숙하게 주전자를 강물에 담가 두었다. 다음 날 주전자에는 다슬기가 안팎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낮이면 옆집 금순이와 등이 따가워지도록 헤엄을 쳤다. 물장구에도 지치면 강기슭의 풀을 뜯어 반찬을 하고 밥을 지었다. 씩씩한 금순이는 아빠가 되었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나만 보면 만만히 여기고 푸드덕 날아올라 쪼기가 일쑤인 장닭도 아빠가 된 금순이와 갈 때면, 덤비지 못했다.
사십 년의 시간을 보내고 길을 되짚어 간다. 최초의 기억들이 진실 혹은 부풀려져 강풀처럼 마구 엉켜 자라는 곳을 찾아간다. 소소한 기억과 바람과 보태어져 바람이 일듯 그리움이 일렁이는 곳으로 간다. 그러나 그 길은 따르기가 쉽지 않다. 잡목을 헤치고 송이 꾼들이 겨우 뚫어놓은 실오라기 만한 길을 빼면 길이 없다. 지금 내 모습처럼 길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강이다. 늦가을 갈대 수풀 사이로 설핏 비늘을 뿌린 듯 반짝이는 물결무늬를 읽는다. 한 마리의 은어처럼 모천의 냄새를 맡은 본능에 끌려 신발을 벗고 강물에 발을 담근다. 차면서 부드럽고 매끈하면서 우둘한, 바닥이 여긴가 할 즈음 더 깊어지는 감촉이 낯익은 느낌이다. 왠지 가슴이 허전하다. 몸을 돌려 사방을 훑는다.
집이 없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있어야 할 집이 없다. 비쩍 마른 밤나무 한 그루와 쓰러져가는 돌담이 기우는 햇살만큼 남았다. 우물터에 밤나무가 있었고 집 뒤란으로 돌담이 있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곳이 분명하다. 흔적 없이 사라진 집터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까무룩 꺼질 것만 같은 마음을 느껴 본 적이 있는냐 말이다. 방문을 열면 벼랑산의 그림자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먼 길을 간 아버지가 신발을 툴툴 털고 거친 턱수염으로 볼을 비비던 아랫목 같던 곳이 사라져버렸다. 마냥 주저앉아 울고 싶다. 꿈길에서 넘던 벼랑산 고개를 허물어진 집터에 앉아 바라본다. 길을 걸을 때면 눈 아래 강물에 미끄러져 빠질까 봐 나뭇가지를 휘어잡고는 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벼랑길 인생은 늘 조심스러웠다. 한 발을 잘못 짚으면 강바닥까지 추락할 것만 같아 낮 동안에는 사력을 다했고, 밤이면 풋잠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그때로 길을 나서곤 했다. 그곳에는 늘 젊은 아버지와 복사꽃 같은 어머니, 풋콩을 닮은 남매들이 있었다.
처마 끝 낙숫물이 땅에 제 흔적을 남기는 여름날을 특히 잊지 못한다. 나는 비를 맞으며 뛰어놀기에 바빴다. 팥죽색 목욕 대야 가득 빗물을 받아놓고 첨벙첨벙 물놀이 삼매경에 빠졌을 때, 젖은 옷을 벗겨 간지럼을 태우고 목욕을 시키시던 어머니의 손길은 자애로웠다. 감자를 분나게 쪄놓고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빗소리처럼 자부자분했다. 빗물에 머리 감던 어머니의 검은 머릿결은 세숫대야 가득 물풀처럼 퍼졌다. 젖은 머릿결을 참빗으로 빗어내던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잘 구워진 감자 냄새가 났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은 꿈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되었다.
수하(水下)에 앉아 저물어 가는 강물을 본다. 심장의 울렁임이 잦아든다. 그제야 애끓듯 흐느끼는 강물 소리가 들린다. 평안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강물도 숨죽여 조용조용 우는구나. 어린 날에는 너무나 익숙해서 강물의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낯설어진 지금 강물 소리를 제대로 듣는다. 무엇이든 너무나 잘 안다고 오만을 부릴 때는 오히려 본연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법이구나 싶다.
강돌 하나를 집어본다. 거무스레한 조약돌에는 물결무늬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얼마의 시간을 인내해야 이렇듯 고운 결을 가진 조약돌 하나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물결의 빗금 하나 칠 수 있는가. 부대끼며 견디며 깎이고 허물어진 강물의 마음 바닥에 하나, 둘 늘어나는 희고 검은 조약돌들, 그것은 바로 강물이 빚어내는 울음 빛깔 사리이지 싶다. 슬픔이 너무 깊어 극점을 맞는 순간에도 강물은 아픔을 속으로 품어 안고 순연하게 흐른다. 강팍한 삶의 분주함에 혼자만 힘들다고 호들갑스레 유난을 떤 자신이 작아진다. 이제 와 생각하면 겉으로 평온했던 어머니의 행복도 어쩌면 내가 지어낸 허상일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떠올리는 한 조각의 물결무늬, 나뭇잎의 무늬, 추억의 무늬들은 기억인가 아니면 바람인가.
이제 가야 한다. 일상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살아내야 한다. 또다시 까닭을 모르고 뛰어야 하는 곳, 그곳으로 가서 이를 악물어야 한다. 안전벨트를 풀지 않고 몸을 먼저 내밀고, 옷깃이 나오기 전에 문을 닫는 실수를 하더라도 돌아갈 곳이 거기 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이 조급해지면 비 오는 여름날 오후 같은 강가 작은 집을 그리워할지 모른다. 나른한 게으름이 허락되는 곳, 어리광을 부려도 용서되는 곳, 무슨 생각을 하든 이루어질 거라는, 여문 꿈 씨를 심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집은 흔적 없이 사라져도 추억마저 스러지진 않기에 아주 가끔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돌아갈 것이다. 바람에 실려 간 나뭇잎도 빗물에 질척이던 목련 꽃잎도 내년 봄 분명 새잎들을 틔울 터이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때론 버거워도 세상과의 한판 승부에 지쳐 나가떨어져도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강물의 파문이 한층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자 이제 툭툭 털고 일어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자.
《수하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의 수하계곡을 말합니다. 근처에 오지마을 송방마을과 오무마을이 있습니다.
벼랑 산을 넘으면 울진군 왕피천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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