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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당나라 갑옷.
https://news.v.daum.net/v/20190422030434632?d=y
右頰各四行後[우협각사행후](백제를) 오른팔로 각각 4품계 항렬(이름)을 정해 제후로 봉한다 .
尉瞿禮專舊官[위구례전구관]-옛 관직 벼슬을 보고 새로운 예법으로 정하여 전한다.
光祿大夫行長[광록대부행장]-장을 광록대부 정1품직에 봉한다.[부여장(扶餘璋(무왕)을 長으로 표기 ]
人忝軍事元丈[인첨군사원장]-으뜸 어른 군사로 (삼으니) 사람(백성)을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
전후 사정을 몰라 오류가 있을지 모르지만,
641년에 무왕이 죽어 의자왕 때 642년에 사신을 보내 당태종에 고하니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정 1품직 광록대부에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봉한 것에 공식 첨판을 갑옷으로 만들어 645년에
의자왕에게 보낸 것인데, 의자왕 660년에 당나라가 쳐들어 오자 공산성에서 지연시키기 위해
갑옷을 써먹으려다가 실패하여 버려진 것으로 보여지며, 이 갑옷이 연못이나 주변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익주(益州)는 사천성 성도(청두), 자동, 영안, 강주의 촉나라 지방을 일컫는데
유비가 사천성 성도의 성촉, 예촉 등 이민족 제후를 거느리고 싸워서 나라 이름이 촉한이었다.
더 넓게는 섬서성 서북부 한중시에서 부터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사천성까지를 포함한 적도 있었다.
칠피 옷갑은 사천성 익주에서 제작하여 서안의 당 태종에게 올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세민의 부친 이연이 사천성 성도 성주로 있다가 수 양광이 절강성으로 탈출한 백제 미녀 아희에게
빠진 틈에 우문사급, 우문화급 형제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이밀이 두 형제를 제거하는 사이,
급히 섬서성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 서안을 선점하여 당나라를 건국한다.
한중시 서부에 고원지역이 있고 감숙성 중동부 6군 지역중 평양시 북부에 고원현과 고구원이 있다.
고원이 개마고원이고 개마고원에서 나는 금을 개금(蓋金)이라고 하였다.
감숙 동부 6군, 섬서 서북 개주(蓋州)는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당나라 제 1차 침공으로 힘들게 방어했으나
타격이 커서, 요녕성 개주시(蓋州市) 안시성, 대련(뤼순/여순)남단 비사성, 신성 등으로 모두 옮겨가서
제2차(총6차) 나당연합에 대항하는 곳이다.
[연개소문의 개소가 개마고원에서 나는 개금, 합금, 갑쇠란 뜻이고 연개소문의 할아버지가
연개소문이 어릴적에 갑쇠라고 불렀다.
당나라의 고조 이연(李淵)의 淵(연)자를 피하기 위해 연개소문을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격하시켜
비하했는데 그 泉(천)은 연개소문의 본뿌리와 본향이
감숙성 천수시(泉水市>天水市/제6대 태조대왕이 감숙성 평양시 고원현 고원/고구원 지방에서 천도한 곳)
였기때문에 천개소문이라고 비하한 것이었다.
태조라는 말이 전혀 다른 혈통으로 왕통을 바꾸고 왕위를 이어가면서 이전의 왕통을 이어가겠다는 뜻임.
북부여/고(구)려는 고선비족].
보장왕이 고구려 수도를 한반도 대동강 이북에 세우자, 당 고종 이치가 나당연합을 결성하고
한강 상륙작전을 벌이며 제2차(총 6차) 침공하는 것이었다.
광록대부면 정 1품직인데 당 태종 15년에 백제 무왕이 죽자 의자왕에게 내린 품계이다.
그걸 660년 의자왕 때 당나라가 쳐들어 오자 공산성으로 피신하여 당군이 성벽을 넘으려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당 태종이 광록대부로 내린 갑옷을 써먹으려다가 통하지 않으니 연못에 버린 것인데
이것이 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비 익주(익산) 왕궁이 함락당하고 다급한 상황하에서 굳이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면서까지
당 태종이 하사품으로 내린 칠피옷갑을 가져간 것이 이를 방증하는 것임.
산서성 진성시 진평성, 고평시 고평성 백제 진평2군 하서시랑 실크로드 물류도착지 상업무역을
담당할 수 있는 나라가 백제, 고구려 밖에 없어서 고구려까지 한반도로 옮겨가 버리니 멸망시키고
다시 잡아다 놓으려 했던 것임].
-김춘추가 661년 백제 부흥군을 치러 논산 연무를 거쳐 서남진하며 사비(익산 왕궁)로 들어갔다가
익주(익산) 금마 금성 금마저(하한)의 궁평에서 우물물을 마셨다가 비명횡사함.
-실크로드 무역을 담당할 수 있는 나라와 주 소비국이 한반도와 일본으로 옮겨가고
당나라의 고구려 제1차 침공으로 동만주와 한반도로 옮겨가 버리자 실크로드 상업무역을
담당할 수 있는 나라가 사라져 버려 다시 멸망시키고 잡아다 놓으려 했던 것이었음.
백제인들은 가야 루트를 통해 동성왕 때부터 끊임없이 일본으로 도해하며
의자왕 때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백제보다 고구려가 더 강하자
신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약한 백제부터 처리한 것임.
신라는 대가야를 복속하여 반도를 통해 중원에서 계속 빠져나가는 서진/동진, 양나라, 백제인의
이탈을 막으려고 당과 연합하여 차단시키려 했던 것임.
[수당(탁발선비/북위>동위>북제), 우문선비/북위>서위>북주>수당)은 과거 북흉노에 쫓겨
내몽고 동부 선비산과 오환산으로 쫓겨 들어갔다가 세력을 키워 관중으로 남하하는 선비족으로
실크로드 물류종착지의 관리 및 운영방법과 중원한자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시기].
고구려는 중계무역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는 나라였고, 진평 2군에서 중원 물류의 배급은
백제가 하서시랑에서 오랜동안 관리하여 더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음.
백제 무왕이 대가야 지방 70성을 차지하고 의자왕이 30성을 공취하여 대가야를 회복하며
대가야 루트를 확보하고 왜로 이주하게 되는데 우르가야인들이 경호강(남강)을 통해 이주시키다가
신라의 침공으로 섬진강을 통해 백제인들을 왜로 이주시켜 주며 부를 축적하자,
중계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신라가 나당연합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었음.
북위>동위>북제. 서위>북주(북제를 멸망시키고 건국)>수>당나라는 내몽고 동부 선비산에서
변말 풍속을 유지하며 남하하여 수당을 건국하는 탁발 선비족(북위, 동위, 북제)과
우문선비족(북위, 서위, 북주, 수, 당)의 나라이기 때문에 당 태종 때까지도 백제, 고구려, 옛 대량(양나라인),
서진, 동진인들 보다도 한자 실력이 아주 약했으며 하서시랑에 시랑, 장사등 정 3품직을 두고 관리하며,
실크로드 무역을 배우고 나서 산서성 진성시 백제 진평 2군 하서시랑을 관리하며
조선왕으로 봉해진 보장왕과 부여융의 세아들 부여문사, 부여문선, 부여덕장 가문을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선비식 당나라 한자와
해석법(주어> 동사> 목적어>보어(목적보어)>부사)이 다수 만들어진다.
[려말선초 1400년 제2차 왕자의난(방간,박포)때 이방간은 이방원이 죽이려했다는 박포의 이간질에 속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익주(益州)로 유배당하게 되는데,
익주(益州)가 바로 익산(益山) 금마 금마저, 왕궁, 전주 지방 까지를 말한다. (완산은 완주, 전주)
기원후 100년대 후반 200년대 초 촉한의 유비가 사천성 성도 성촉, 예촉 등 이민족 제후를 거느리고
삼국시대를 펼칠 때 사천성 익주(益州)는 주도가 성도(청두)이지만 그 이전에는 보주가 중심지였다].
보주는 허황후가 태어난곳.(커후나게>허후나게, 커벌나게>허벌나게, 커천나게>허천나게).
조선초기 익주가 익산으로 변했다는 것은 그만큼 익주의 인구가 다른 지역(전주, 군산)으로
빠져 나갔다는 뜻임].-이방간이 재기를 꿈꾸려하자 징집될만한 자식들이 있는 세대가
미리 화마를 피해 익주를 이탈하는 것임. 익주는 발해시대때 솔빈부라는 지명이었음.
발해의 솔빈부(率賓府)에서 솔(率)은 그지역의 우두머리에게 전권을 주고 제후로 두어 다스리는
지역을 말하는데, 그지역민의 자주성이 강할때 부여하는 용어임.
(삼별초 항쟁이후 몽고/원나라는 전라도 사람을 노동노예나 가노, 관노/노비로도 사용하지 않았음).
이렇게 한자를 통해 종족의 이동루트까지 알 수가 있는 것임.
구당서 동이열전 199권.
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 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
당태종15년 백제무왕 부여장이 졸하였다. 그아들 의자가 사신을 보내 애도문을 표해 봉해 오자
태종이 소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부연설명
당태종은 618년 수나라에 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642년 백제무왕(부여장)이 죽자
상복을 입고 애도하며 곡을 하였다.
이 당시에 당나라의 전신인 수나라는 북위에서 분열하는 동위>북제,서위>북주를 전복하고
태어난 나라가 수나라이며 이 나라를 차지한자가 이연, 이세민의 당나라이다.
북위는 탁발선비족 탁발규가 산서성 대동시 용성>평성에서 건국하는 나라이다.
동위의 고환(고태>구태),서위의 우문태(우태)의 나라를 말한다.
구수왕,비류(유)왕(11대왕),부여곤지,동성왕,무녕왕,성왕(이잔계)으로 이어지는 백제는 이잔계 구태백제다.
백제보다는 북위가 강대국이었고 수나라,당나라가 인구가 많아
더 강대국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백제는 산동반도 제남시 위례백제, 반도백제로
밀려나 있던 상황이었다.
웅진 공주백제가 이잔계의 구태백제이고 백제 멸망후 왜로 넘어가는 세력으로
동위에서 고환[고태/구태]의 아들 고양이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인 온조백제를 점령하고
양나라 수도 개봉시[카이펑]를 점령하여 북제를 건국했으나, 서위[우문태/수도 서안]의 아들
우문각 삼촌 우문호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주[섬서성 서안]를 세우는데,이때 북제계가 반도로 들어와
동성왕때 개성 한성백제를 차지하고 웅진 공주백제로 옮겨 가는 구태백제를 말한다.
대륙에서 넘어오는 위덕왕은 위구태 백제다.
무왕,의자왕으로 이어진다.
북주의 외척으로 있던 수문제 양견이 우문각,우문호가 서안을 비운틈을 이용하여,
북위 출신 황족 수백명을 참살하고 수나라를 건국한다.
그래서 장례등 모든 문화 풍습이 똑같았던 이유였다.
贈光祿大夫, 賻物二百段, 遣使册命義慈爲柱國, 封帶方郡王·百濟王.
광록대부(당나라 정1품관직)에 봉하여 직물 2백단을 부조하고 사자를 보내 주국으로 삼고
의자를 대방군왕 백제왕에 봉했다.
(柱國: 장례를 치루는 상주만이 아니라, 여기에는 다음 왕위를 인정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
신당서
十五年,璋死,使者素服奉表曰:「君外臣百濟王扶餘璋卒.」帝為舉哀玄武門,
당태종 15년 장이 죽었다.백제 사신이 소복을 입고 표하기를 군의 외신인 백제왕 부여장이 졸하였습니다.
라고 고하니 황제가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부연설명
백제가 사신을 보내 당태종을 군(君)이라고 표현한 것은
백제는 단군 조선을 이었기 때문에 당태종을 단군에 해당하는 칭호인 천군(天君)의 예우를 하기 위해
표문을 작성하여 보낸 것인데, 여기에는 천(天)을 빼고 군(君)으로 부른 것이다.
천군으로까지는 인정해 줄 수는 없고 그 다음인 황제나 천자(天子)에 해당하는 군(君)이라는 칭호를 하여
단군 조선식 제도로 예우한 것이다.
무왕 때는 백제의 팽창기로 신라의 70성을 공취하였던 때라 강성했으므로
권력을 장악한지 24년밖에 안된 당태종으로서는 백제에 최고의 예우를 표해
동맹으로 두고 싶었던 시기였다.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무왕이 죽었을 때 현무문에서 애도하면서 형식적으로
아이고~ 아이고~(에구~ 에구~)하면서 곡을 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四十二年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
642년 삼월봄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무(武)라 하였다.
사신을 당으로 입조시켜 소복차림으로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군의 외신 부여장이 졸하였습니다.
라고 고하니, 황제가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 말하기를
나라가 멀리 있어 달리 위로할 방도가 없고 의로움은 죽어서도 꾸밈이 없으며,
멀리 강건너 변방에 살면서도 멀어지는 사이가 없으니 고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은.........
부연설명
이 상황은 백제무왕은 반도백제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말이다.
無隔於遐方(무격어하방)이란 말에서 遐方(하방)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강건너 변방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한반도 백제를 표현하는 한자이다.
한반도 백제를 遐方으로 강이 있고 물가가 있는 변방지방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제가 위덕왕(위구태계)때 하남성 정주시/산동성 제남시에서 북제의 제후로 떨어지니
반도백제로 들어와서, 위덕왕이 중국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왕,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왕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워, 온조 백잔계, 이잔계(동성왕, 무령왕, 성왕계)백제 왕통을 밀어내고
반도백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무왕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위구태 백제)
부여 사비계는 왕은 동위(고환>구태)에서 북제(고양)로 분화하는 구태계이고 백성은 부여세력이다.
웅진 공주백제는 동성왕 때부터 왕은 구태계이고 백성은 이잔계이다.
그러나 동성왕은 한반도 태생이고, 왜[일본]태생 출신이 아니다.
산동반도 동영시에서 이주한 동부여인 일부와 대다수는 고구려 광개토/안장왕, 안원왕, 평원왕 시대에
요녕성 개주시(안시성)로 잡혀 갔던 백제 군사들이 반도 부여로 들어와서 형성된
동명백제인들이 세운 나라였다.
동영시의 동부여인들이 제남시 아신왕의 위례백제인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威(위엄위, 세력위, 권세위, 두려워할위, 침해할위, 해칠위)가 외국인을 뜻하는 한자다.
이태리 베네치아 상인을 위니(이)사[威(尼>伊)斯]라고 하였고, 백제 백잔과 북월지[가야,왜]혼혈을
상징하는 종족을 이잔[伊殘]이라고 불렀다.
伊[저이]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인을 말하는 것으로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운
그리스 마케도니아인과 우즈베크인, 서역인을 표현하는 한자이다.
殘[해칠잔]은 외국인이 실크로드 무역에서 손해 볼때 자주 해쳤기 때문에 표현한 한자였다.
위례성[慰禮城]의 慰[위로할위]역시 실크로드 무역지를 고려>고구려에 잃고 밀려난 사람들에 의해
서로 위로하거나 위로받으면서 만들어지는 한자이다.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산동성 제남시, 동영시북부 등주시일대 보하이만/발해만을 말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북제, 북주, 수, 당, 고구려에 밀려나면서 반도 개성과 인천을 거쳐 하남일대로 들어온다.
斯(이사)는 말그대로 내몽고 자치구 서부 이기산이있는 시라선맹/사라선맹을 말하는 곳이다.
고려인은 아라선맹,백제인은 아랍답맹,중국인은 오라선맹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배달 9이 한국시대에는 사납선맹/사랍선맹이라고 불렀으며,
배달한국 이전의 환국12연방시대에는 사납아국, 사납아맹이라고 불렀다.
단군삼한,단군조선시대에는 조선 천독국이라고 불리우던 곳이었다.
현재는 다시 사라선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의 일부가 내몽고 중부지방으로 옮겨가 사라춘맹[시라춘맹]에도 살고있다.
요녕성 개주시(蓋州市)에 남은 백제 포로로 구성된 고구려인은
훗날 양만춘 때 안시성에서 연개소문과 대립하다가 북조를 지배한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귀족신료 180여명,
귀족 관련가족 2,000여명을 학살하자 연개소문과 대립하게 되었고, 당나라가 감숙성 평양시[비단길 통제],
청해성 서령시[초원의 길 통제]를 침공하는 원인이 되어, 요녕성 개주시 안시성만 살아남아
대련반도 비사성에서부터 당에 저항하다가 반도 남평양으로 밀려나 당고종 이치때
나당 연합군의 한강 상륙 작전인 제 2차(총6차) 침공으로 멸망당하는 역사였다.
(현재도 개주시에는 백제인 마을 흔적이 남아 있어 역사스페셜에서도 자세히 소개된 바가 있다..
미국이 1950년 6.25 때 인천 상륙 작전으로 그대로 역활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