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인동아리랑의 근거와 존재”에 대하여
이성칠(전 구미문화체육관광국장, 경운대)
□ 연구 논문에 대한 견해
권오경 교수님의 <인동아리랑>의 근거와 존재, 가치와 의의에 대하여 잘 정리해 주었다. 논문에서 경북은 물론 <인동아리랑>이 포함되며 연계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1930년 이재욱의 <민요전집>에 근거한 선산, 군위, 안동 등지의 <경북아리랑>에 바탕을 두었다. 논문 4쪽에서는 <선산아리랑>을 <인동아리랑>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한다. 행정구역상 당시는 칠곡군 인동면이었으며, 칠곡군은 아리랑이 없다.
따라서 1978년 인동면이 구미시에 편입되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칠곡군과 선산군(구미시)과의 이질성과 차별성에 따른 <칠곡아리랑>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었어야 한다. 논문 6쪽에서 <인동아리랑>을 비롯하여 <엇모리장단>의 <강원아라리>가 소백산 아래 영남지역으로 남하 전승된 것으로 추정한다. 계보나 음원 등에서 근거가 다소 미약하다고 했다. 다만 <김광호>씨의 <서주달 보존회장> 채록 건에서 근거한다.
특히, <선산아리랑>의 노랫말에 비해 <인동아리랑>에는 80년대까지 인동지역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아는 <돌고개>라는 가사에서 정체성을 보여준다. 인동의 지역적 특성으로 낙동강과 영남대로의 길목이자 군사요충지인 천생산, 유학산, 인동도호부 설치, 인동장씨(生仁同 死玉山) 세거지, 여헌 장현광 선생, 인동향교 등이 인동을 중심으로 위치한 점은 지역 문화의 요충지임을 잘 나타낸다. 2012년 개사한 <인동아리랑> 노랫말에는 구미시지, 인동읍지 등에 나오는 역사와 지명, 앞서간 토착민들의 활동상 등이 많이 가미되었다. 향후 인동 지역민의 화합과 문화창달의 기저 역할 차원에서 더욱더 많은 아리랑 노랫말이 쏟아지길 바란다.
참고로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의 경우, 우리나라 아리랑의 큰 준령으로서 수백, 수천의 노래 가사가 오늘날까지 창작되고 있다. 세계적인 학술대회가 3개 기초자치단체 합동으로 개최되며, 국립국악원, 문화재청, 언론사 등이 후원하고 있다.
□ 질의 및 제언
1. 조선 초기 강원지역에서 생성된 아라리가 조선 말기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유입 <구아리랑>을 파생, 다시 <신아리랑>을 생성하였다. 또 달리 조선 초기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경북 북부, 상주, 구미, 대구, 영천, 부산으로 흔적을 남겼다. <발검들>은 후삼국 견훤의 아들 신검과 고려 태조 왕건이 결전을 벌인 구미 지산들이다. <구미발갱이들소리>로 부른다. 1982년 10월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경북 대표로 출연해 민속부문 우수상인 문화부장관상을 수상, 1999년 4월 15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구미 발검들소리에 포함된 전승자 백남진의 <구미아리랑>이 <강원아라리>와 매우 닮아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으로 구미발갱이들소리의 시원은 무려 1089년 전이다. 그 후 고려 456년 뒤인 1392년 이후인 조선 초에 <정선아라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열 필요가 있다. <구미발갱이들소리>에서 아라리가 그리고 아리랑이 태동 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화란 앞선 조상들이 만들어 온 것을 지금에 와서 새로 옷을 입혀가는 것이니까!
2. 인동지역은 인동현, 인동도호부, 칠곡군 인동면, 구미시 인동동, 진미동, 양포동으로 행정구역이 끊임없이 변천해 왔다. 도농통합 도시인 구미(구, 선산)가 금오산, 비봉산을 배경으로 했다면, 천생산과 유학산이 진산이었던 칠곡군 인동면과는 낙동강을 가로질러 문화적으로 다소 이질적이었다. 1978년 2월 15일 구미시로 승격되면서 인동지역이 처음으로 편입된 셈이다. 칠곡군과 인동면, 인동도호부는 같은 맥락인 반면, 구미와 선산과는 지형상 구분이 확연했다. 다만 조금 앞선 1971년 준공된 구미대교 가설로 동서 간 교류는 구미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처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생활문화인 <인동민요(民謠)>와 <인동아리랑>을 구분해야 하는가? 민요는 민족의 바탕인 민중, 대중, 민간, 서민민요는 도가(徒歌)로 민중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집단의 노래, 민중의 소리, 구비전승의 음악인 모심기, 보리타작, 방아타령, 베틀 노래 등 기능요에서 비기능요인 민요 무용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인동민요. 인동아리랑 노랫가사를 한없이 생산해 낼 문학인들과 연계하여 앞으로 50년, 100년, 300년, 500년 뒤의 <인동아리랑>의 시원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떠한가?
3. 선산지역은 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12마당 <무을풍물>이 2002년 구미시의 큰 지원으로 혁신적인 발전의 토대를 마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 보전되고, 2001년부터 동편제의 <명창 박록주 기념 대통령배 전국국악대전>이 펼쳐지고 있다. 앞서서 구미 지산들에 <발갱이들소리>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1000여 년의 전통을 갖고 보전되고 있다. 구미 신평은 울주산이 있고 구릉에 깎아지른 절벽에 울주천(지금의 구미천)이 낙동강으로 흐른다. 그 너머 넓은 들은 발검댕이(발검들)이다. 동락나루와 비산나루를 연결하는 배를 타고 건넜다. 반달밭이다.
인동은 일찍이 부족국인 <군미국>의 옛터전엔 도굴된 고분군들이 마을 주변으로 널려있었다. 칠곡군 시절이나 구미시 편입 후에도 보존관리가 미흡했다가 최근 들어 발굴 보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80년대 중반까지 있던 관아터 건물은 비바람과 개인 사유지로 훼손된 지 오래되었다. 임란 때 전설 속의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항전한 천생산[구미 쪽에서는 묵 함지박(묵반티)을 엎어 놓은 모습이라 하여 ‘반티산’이라 부름] 아래에 위치한다. 낙동강을 거슬러 구포 나루 소금 배는 한천을 따라 장천면 하장리 장내에서 홍등가를 밝혔던 저잣거리를 지나 소금 짐을 지고 넘었던 그곳이 4공단이 되었다. 인동지역에는 천용사, 천해사, 금강선원이란 사찰이 있고, 인동성당이 오래되었다. 인의, 황상, 구평, 신동 마을에서 유교적인 이미지와 누에를 치고 골골이 유학산이 연결되었다. 검성지, 마차골, 남산, 불바위, 구준(진)벌, 백곡지, 무지개마을, 새마, 하동골, 도새 등의 지명에서 역사의 수난사와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묻어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말 조선, 근․현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이 명멸한 곳이다.
동구미를 중심으로 <강동문화복지관>, 2018년부터 시작된 <천생역사문화단지> 조성 및 고분군 발굴, 2003년부터 <구미인동3.1문화제>, <인동아리랑> 발굴 보전 등 큰 맥락에서 출발한 학술대회는 큰 의미를 보여준다. 앞으로 <경북중서부권아리랑>, 나아가 <영남아리랑>의 새로운 시원으로 캄캄한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며 지나가는 혜성처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장엄한 출발이 되길 바란다. 이에 대한 발제자의 의견은 어떠한가?
□ 맺는말
결국, 보존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노력하고 채록 발굴하는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발원지가 아닌 점에서 그동안 기초지자체의 동 단위에서 독자적이며 독립적인 노력과 오늘날 이만한 성과에 뜨거운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문화는 어느 특정 지역만의 특정인 몇몇만으로는 지역 간 위화감과 이질적이며 배타성이 강해 수용하고 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어불성설이다. 앞으로 <인동아리랑>은 그동안의 성과와 노력을 디딤돌로 삼아, 구미와 경북의 중서부권을 아우르고, 경북과 영남권으로 확장성을 갖고 발전적 틀을 재정립해야 한다. 지자체는 물론 학회와 문화예술인, 시도민들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