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심사하고 수상자를 결정한 한림원의 입장에서 변론한다면,
이런 예화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아버지가 아프리카의 개방된 맹수 동물원에서 한 사자류의 맹수에게 자기의 어린 아들이 잡혀 먹힐 위기의 순간을 발견하고 지니고 있던 소총으로 그 동물을 사살해서 아들을 간신히 구출했다.
그러자 이 아버지의 행위를 동물애호가들과 생태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사살된 맹수는 바야흐로 멸종 위기에 있는 보호동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사살한 아버지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자 이에 대한 여론이 찬반으로 나뉘었다.
말하자면 아버지를 비난하는 측에 대해서 아들을 구한 아버지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는가? 아무리 멸종단계에 있는 동물이라도 동물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의 존엄성과 비교될 수 없다고 아버지를 옹호하고 나섰다.
우리는 오늘날 상당히 많은 경우, 이런 극단적인 대립적 가치관이 ‘난무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림원은 주장할 수 있다. 우익이건 좌익이건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특정 가치관을 장악한 권력집단(정권일 수도 있고 환경단체와 같은 다른 단체일 수도 있다.)에 의하여 희생된 무능력자나 힘이 약한 자의 저항성을 미학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위의 예화에서 ‘맹수와 아들’의 경우 누가 힘의 강자이며(이른바 갑), 약자(을)인가를 판단하고 그 약자에 편에서 리얼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맹수가 중요한가, 아들이 중요한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는 어느 쪽이든 선택할 자유가 있을 뿐 한림원은 그 어느 쪽도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그러면서 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는 솔제니친과 빠스쩨르나끄도 시상했다.”고. 그럴 때 그 정권은 그들의 수상을 아주 격렬하게 비방하고 반대했으며 수상자로 하여금 수상하지도 못하게 했었다며 자기들은 좌익도 우익도 아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