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이니까, 초사를 쪼매 더 볼까요.
초사는 뿌리가 초나라 지역의 민요나 巫歌입니다. 초나라의 민요가 한나라 때 와서 옛 초나라 운율과 한나라에서 유행했던 賦의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초사를 인정하지 않고 漢賦로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 고대 문장인 시경이나 논어가 4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라나 초사는 글자 수가 4言이상이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양식으로 ***兮***로 하여 7言이 나타나는 것도 있고,
항우가 불렀다는 해하가를 봅시다.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추 不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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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산을 뽑을만 하고 기세는 세상을 덮을 만 하네
때를 잘못 만났으니, 내 말 추도 달리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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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語의 글자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수사 능력이 확대(표현 능력이 확대)
넓어진다는 뜻이다.즉 서정적 표현능력이 좋이므로 서정시가 나타나는 바탕이 되었다.
(4言인 논어는 표현기능이 떨어지므로, 상징이 많고, 정확한 표현 능력이 떨어지므로
논어의 해설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주해서가 많은 이유이다.)
중국 문학에서 초사의 양식보다는 저자인 굴원을 선전하는 경향이 있어서
초사의 문장 형식, 문학적 의미가 축소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소개하였습니다.
첫댓글 굴원은 불운한 백가제자의 한 분으로 전하는데 맞는지요?... ^^*...
굴원은 전국시대의 초나라 희왕을 모신 시인이다. 희왕은 굴원의 진언을 듣지 않고 내치자 고향에 돌아와서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때의 심정을 읊은 시가 '이소'이다. 굴원을 내친 희왕은 진에 억류되어 있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이때문에 굴원은 충신의 반열에 올랐다.
후대에 와서 왕의 내침을 받은 사대부들이 자신을 굴원의 신세에 빗대었다. (나쁜 짓하고 쫓겨나서도), 자신을 충신으로 색칠하여 굴원인양 울분을 토로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