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전설 - 가야국 허왕후의 상륙지, 진해 망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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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0.13. 18:20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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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전설
가야국 허왕후의 상륙지, 진해 망산도
한반도의 남동 해안,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강이 7백 리 긴 여정을 끝내고 마지막 용틀임하는 김해평야. 이 기름진 삼각주 평야는 2천여 년 전 옛 가야국의 신비가 깃들인 역사의 고장이다. 김해(金海)를 일러 물의 고향 곧 수향(水鄕)이라 부른다. 어느 시기까지 온통 바다였을, 이 지역을 이름 그대로 황금의 바다 김해(金海)로 바꿔 놓은 것은 상류의 토사를 부지런히 실어나른 낙동강의 물길 덕분이었다.
가야국 역사는 지금도 신비의 베일에 가려 있다. 김해벌 곳곳에 선사시대 이래의 패총군이 산재해 있다. 이처럼 가야국의 역사도 어쩌면 토사 밑에 깊숙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가야국의 전설에는 유난히 물과 관련이 깊은 거북이나 용, 또는 물고기가 반드시 등장한다. 이 중에서도 마주 보는 한 쌍의 물고기, 즉 쌍어(雙魚) 문양이 암시하는 바가 가야국의 신비를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진해 해안의 망산도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맨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딘 곳이다. 지금은 주변이 개발되어 옛 모습을 잃었다.
김해 앞바다, 정확히 말하여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에 망산도(望山島)라 일컫는 섬이 있다. 간척공사로 인해 옛 모습을 잃어버린 이 섬이 가야국의 신비, 그중에서도 수로왕 부부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옛날에는 제법 큰 섬이었을 망산도에는 거북 등을 닮은 바위 일부가 애처로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곳이 바로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디딘 곳이다.
허황옥은 머나먼 인도 땅 아요디아〔阿踰陀〕국의 공주라고 했다. 지금부터 무려 2천여 년 전의 일이지만 《삼국유사》는 이 여인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허황옥은 서기 32년에 인도에서 태어나 열여섯 나이에 가라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오기 위해 머나먼 항해길에 오른다. 20여 명의 공주 일행을 태운 배는 붉은 돛에 붉은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으며, 배 안에는 인도에서만 난다는 파사석(婆娑石)이 실려 있었다. 항해 일수가 얼마였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배가 망산도에 닿았을 때 놀랍게도 신랑 수로왕이 몸소 나와 공주를 맞았다고 한다. 공주의 도착일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사전에 저희들끼리 무슨 연락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어떻든 신부를 맞은 여섯 살짜리 신랑 수로는 망산도와 왕궁의 중간지점인 명월산 산자락에 장막을 치고 역사적인 첫날밤을 치른다. 여기서 역사적이라 한 것은 이들의 만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국제결혼식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의 행사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해 본다.
신부 허소녀는 신랑을 대하기에 앞서 입고 왔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치고 신랑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정중히 소개한다.
“신첩은 아요디아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황공스럽게도 매미 같은 얼굴로 용안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신부가 첫날밤에 바지를 벗어 던지는 행위는 인도 남부지방 전통 혼례의 관습이라 한다. 이에 여섯 살짜리 신랑도 의젓한 모습으로 화답한다.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은 행복하오.”
당시 이들 신랑·신부가 주고받은 말이 중국어였는지 인도의 아요디아어였는지, 아니면 우리말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곁에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한 가지 언어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 뜻 깊은 첫날밤은 달이 무척 밝았던 모양이다. 신방이 꾸며졌던 산을 명월산(明月山)이라 이르고, 그곳에 명월사(明月寺)란 절이 있기 때문이다. 명월산 자락에서 이틀 밤과 하루 낮을 지새우고서야 이들은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나 왕실로 돌아온다.
구지봉으로 내려온 황금알에서 태어난 김수로왕과 인도 처녀의 이 세기적 혼인은 허황후가 157세의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 동안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았는데 이들 중 한 아들에게는 어머니의 성을 하사하여 허씨(許氏)가 출현하게 되었다. 지금도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사이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라 한다.
망산도 허황옥은 인도 땅 아요디아국의 공주로 열여섯 나이에 가야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왔는데, 그녀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디딘 곳이 망산도라고 한다. 이곳에서 공주를 맞은 수로왕은 망산도와 왕궁의 중간 지점인 명월산 산자락에 장막을 치고 첫날밤을 치렀다고 한다. 이후 허왕후는 157세의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았다. |
서역 구만리, 인도 땅은 너무나 먼 곳에 있다. 제트 여객기로도 몇 시간이나 걸리는 그 먼 뱃길을 그 옛날 작은 배로 어떻게 항해가 가능했을까? 수로왕의 탄생도 그렇지만 허황옥의 도래와 수로왕과의 혼인은 아무래도 따져 보아야 할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명월산에 있는 가야국 태조왕 왕후 유허지
수로왕이 허왕비를 맞아 첫날밤을 보낸 곳이다. 첫날밤은 달이 무척 밝았기에 이 산을 명월산(明月山)이라 했다.
허왕후는 지금도 구지봉 옆에 잠들어 있다. 능 앞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란 묘비가 있는데, 이 비명 가운데 ‘보주(普州)’라는 지명이 이런 의문을 풀어 주는 단서가 된다. 보주는 옛날 중국의 지명, 정확히 말하여 촉(蜀)나라의 땅이었던 사천성 안악(安岳)으로 판명되었다. 그러고 보면 허황옥은 본래 인도 아요디아국의 공주였으나 훗날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그곳 보주에서 살다가 가야국의 왕비로 시집오게 되었던 것이다. 보주에는 허씨 집성촌이 있어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허황옥(許黃玉)이란 한자식 이름뿐 아니라 배로 이곳까지 항해했다는 사실도 쉽게 납득될 수 있다. 말하자면 출항지가 인도가 아니라 가까운 중국이었던 것이다.
허황옥 허황옥은 본래 아요디아국의 공주였으나 훗날 중국의 보주란 곳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살다가 가야국의 왕비로 시집왔다는 설도 있다. 허왕후의 능 앞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이란 묘비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보주는 옛날 촉나라 땅이었던 사천성 안악으로 그곳에는 허씨 집성촌이 있어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
가야국의 도읍지 김해에는 유달리 물고기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많다. 김해의 진산을 신어산(神魚山)이라 하고 그 북쪽에는 만어산(萬魚山)이 있다. 신어산에는 은하사(銀河寺)란 고찰이 있는데 이 절 대웅전 수미단 밑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이 쌍어문(雙魚紋)은 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은 그림이다.
김해평야 한가운데 있는 초선대
옛날 가야국의 선견과 신녀 오누이가 이곳에서 동쪽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바위에는 부처님인지 장유화상인지 모를 인물상이 그려져 있고 바위 밑에는 가야국 황새장군의 족적이 남아 있다.
이 땅에 와서 가야국을 세운 그들은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간 기록도 있다. 즉 수로왕의 태자 거등(居登)이 왕위를 계승할 즈음 그의 아우 선견(仙見)과 누이 신녀(神女)는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오누이가 떠나갈 때 거등왕은 섬에 나와 배웅했다는데 그 섬을 지금은 초선대(招仙臺)라 부른다.
초선대는 김해평야 한가운데 솟은 바위산인데 그 옛날에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었을 것이다. 이곳 바위에 올라 보면 멀리 작은 섬 일곱 개가 점점이 보인다. 이 일곱 개의 섬을 칠점산(七點山)이라 부르는데, 옛날 칠점산에 살던 신선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하여 이 바위산을 초선대(招仙臺)라 이름한 것이다.
바다 건너 동쪽으로 떠난 오누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른다. 기록상으로는 구름을 타고 동쪽 나라로 갔다고만 했는데 이는 필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음이 틀림없다. 일본의 규슈 지방에도 쌍어문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야마 제국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유럽의 내륙으로부터 일본의 규슈에 이르는 이 이동로는 그 옛날 일종의 ‘해상 실크로드’였다. 따라서 이 기나긴 이동로 중에 김해의 망산도나 초선대는 한반도에서의 출입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국의 신비를 간직한 고도 김해는 이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 가고 있다. 을숙도의 철새 도래지는 낙동강 하구언 건설과 김해공항의 확장으로 철새 대신 대형 여객기들만 날아든다. 공항 자리에 있던 칠점산도 오래 전에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공항 활주로 공사로 인해 산을 모조리 허물어 버린 것이다. 허왕비의 상륙지 망산도도 이 일대 들어서는 대형 공단으로 인해 매몰 직전에 있다. 수로왕과 첫날밤을 보낸 명월사도 없어진 지 오래다. 이제 바라기는 망산도의 유주암(遊舟岩)이나 유주비각만은 제발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