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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실 하나님의 말씀은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미 은혜 다 받으셨죠? 찬양할 때 이미 은혜가 포스트처럼 임한 것 같습니다.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인생 저와 여러분들 날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찬송과 경배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셨던 대사명을 기억하시죠.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 말씀을 주셨던 것이죠. 오순절에 모인 120명의 문도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었고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을 받아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힘입어서 솔로몬 행각에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되었죠.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민심을 선동하는 자들로 눈의 가시였고 분노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서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게 되죠. 그리고 그다음 날 아주 경고하면서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아라.
그들의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제재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성령 충만했던 이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돌아가 초대교회 식구들과 함께 뜨겁게 기도합니다. 기도로 재무장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성령 충만을 받아서 솔로몬의 가게에 다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게 되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들 사역에는 앉은뱅이가 일어났던 것처럼 수많은 표적과 기사들이 그 가운데 나타나게 되죠. 심지어 베드로의 그늘에 사람이 있으면 나을까 싶어 사람을 그늘에 옮기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정말로 나음을 받는 실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큰 무리가 형성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는 제사장, 그리고 함께 있던 사두개인들의 마음은 점점 시기심으로 차가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시기가 가득했다. 시기가 충만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기심으로 즉각 사도들을 붙잡아 다시 오게 가두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방관자로 계신 것이 아니라 그때 비로써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셨다.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주의 사자를 보내서 옥문을 열고 그들을 끌어내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들에게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들에게 전하라 그렇게 명령하게 됩니다.
어쩌면 감옥에 나와서 그들은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숨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이죠. 사도들이 성전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던 대제사장과 그 일당들은 이제 사도들을 불러 신문하기 위해서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장로들로 구성된 공회를 소집한 것이죠. 모이게 하고 또한 경비병들을 보내서 지금 갇혀 있던 사도들을 데려오라 명령하게 됩니다. 그런데 경비병들이 옥에 가서 보니 사도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공회로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게 되죠.
대제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사도들이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감옥에 가보니 감옥 문도 잠겨져 있고 보초병들이 문 밖에서 철통 경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있는가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한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 성전 경비대장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황급하게 뛰어들어오면서 말합니다.
대제사장님 어제 감옥에 갇혔던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서 가서 붙잡아오도록 하여라.
그래서요. 급하게 경비대장은 사람들을 이끌고 생전에 달려와서 사도들을 붙잡아 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폭력을 쓰거나 강제로 연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칭송을 받고 있었고, 주변에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혹여나 저들에 의해 돌에 맞아 곤란한 일을 당할까 봐 그들을 잘 데리고 온 것이죠.
이제 대제사장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 앞에서 신문을 받게 됩니다.
너희들에게 묻겠다 추어도 거짓없이 말하기를 바란다. 예수에 대하여 두 번 다시 가르치지 말고 전하지 말라고 경고했거늘, 어찌하여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온 예루살렘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느냐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들은 예수 십자가의 피 흘림을 왜 우리에게 뒤집어 씌어서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가느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들은요 성령 충만하여서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언한 거예요.
너희들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 듣는 것이 옳다. 어떻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과 대비를 시킬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마땅하다
라는 것은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당당하고 떳떳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다. 여러분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죽어 마땅한 인생,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고, 오늘 성가대가 고백했던 것처럼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삶 돌아보는데 이것도 은혜요, 저것도 은혜요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삶을 볼 때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명이다. 복음을 전하라 하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망 앞에 금지시킬 존재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 믿는 자들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의해 손가락질 당하기도 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박해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된 내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내 삶에 복음이 가득해서 만나는 이들 앞에 막 유창하게 전하지는 못할지라도, 나 예수 믿는 사람이, 나 예수와 함께하는 사람입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예수가 나의 삶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를 향해서 험한 말로 해코지할지라도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인 됨 이것을 마음껏 자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낼 수가 있겠어요? 우리가 믿는 믿음, 우리가 전하는 복음 정말 빈 껍데기밖에 될 수가 없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존교하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증거했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공회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선언했던 선포했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전한 복음이 무엇인가 함께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도들이 순종하여 증거했던 복음 첫 번째는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예수였다는 거예요.
사도들은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로 포문을 열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은 설교가 언제나 그러했듯이요. 초지일관 예수 십자가 복음 죽음과 부활 이 사건을 전했다는 것이죠.
30절 말씀 한번 큰 목소리로 읽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여기 보니까 죽음과 살리심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죠. 그런데 여러분 이 구절을 보면 이상한 부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죽으심 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말하지 않고 나무에 달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 원문 가운데에도 십자가라고 뜻하는 스타보스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요. 나무라는 뜻하는 실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은 십자가라 하지 않고 나무라 했을까 아마도 베드로와 사도들의 이 표현을 통해서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잘 알고 있던 신명기 말씀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신명기에 뭐라고 기록돼 있는가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신명기 21장 22절에서 23절입니다. 시작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함으로 내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게,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는 그저 저주받은 선동꾼이라는 것을 많은 백성들에게 역설로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를 나무에 달게 한 것이죠. 즉 유대인들은 예수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나무에 달려 죽게 했다.
그때 당시에 사용법이 이것만이 아니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굳이 이것을 선택해서 했다는 것이죠.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사람이 율법을 통해 말씀한 대로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은 상태로 모든 것이 끝이 났다면,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 달려서 죽고 그 이후에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탄의 승림과 동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의 복음은 그대로 종식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사건을 보고 그냥 두고 계시지 않았다는 30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권세에서 깨뜨리고 부활시키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바로 모든 상황을 역전시킨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탄도 종교 지도자들도 승리자가 될 줄 알았던 그들이 패배자가 되었고, 나무에 달린 예수는 마치 패배자가 된 것 같았지만 영원한 승리자로 이기게 되셨다는 것이죠.
따라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원했던 생각했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치지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큰소리로 고백하면서 읽어볼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가 하셨음이라
저와 여러분들의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저주 아래 시 그것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속량하셨다. 이것이 복음이오 이것을 위해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신 예수를 우리를 대신하여서 죄인 만들어 놓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거예요. 따라서 나의 저주를 우리 주님이 담당하셨고 그로 인하여서 죄인 된 나를 의인 되게 하셨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놀라운 사건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감사, 감격, 찬송,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무 잘못 없던 예수에게 죄를 씌우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져버렸는데 이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죄를 담당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회복되어져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연합이 그렇다면 여러분 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할 것은 없나요?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끝인가요?
아니죠.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사도들의 순종하여서 증거했던 복음 두 번째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두 번째 증거했던 것은 31절 앞부분에 보니까 회개와 죄사함에 대해서 선언했다는 거예요. 우리 31절 앞부분 한번 보실까요? 같이 읽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려고 여러분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시고
사역을 시작하면서 첫마디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선언이었어요. 이는 주의 길을 예비하셨던 앞서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외침과도 같았던 것이죠. 그래서 세례 요한도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뿐만 아니죠. 예수님의 사명을 받고 이 땅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도들이 외친 것 또한 회개하라 천국에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했다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신 이유는 저주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죄사함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라는 거. 그래서 여러분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오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잖아요.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는 것처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거 왔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잔을 들고 감사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돌리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받아 마시라. 이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린 내 언약의 피다.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반드시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번 따라해보실까요?
피 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회개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여러분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하나님과 연합하려고 애쓰고 노력해도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연합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 은혜죠. 하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미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내가 무엇이 간데 내가 그것을 깨닫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여러분 이거 기적입니다. 기적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즉 죄사함이라는 죄 없으신 분의 피 흘림과 죄인 된 인간이 회개하는 이 사건이 동반되어져야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서 그 아들 안에라는 표현을 쓰면서 우리가 성령 죄사함을 받았다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서 아들의 나라, 아들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나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자리로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죄와 허물을 예수의 피로 말끔하게 씻어주게 된다. 그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 복음이 누리며 사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보혈은 이미 우리에게 다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인류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축복의 자리가 열린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히 하신다는 그런 말씀을 선언하신 후에 바로 이어서 다음 다음 구절에 회개를 촉구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인데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그러오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부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여러분 다윗이 시편을 통해서 찬양으로 고백했던 것처럼 동의서에서 본 것 같이 여러분 우리의 죗가를 멀리하게 하실까?
여러분 이 죄사함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 삶 가운데 날마다 고백되어지고 마음 다해 외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평소에 놓치지 말고 늘 생각하고 고백해야 될 것이 있어요.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서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아 이러면서 일어나 보십시오. 은혜가 충만할 겁니다. 할렐루야 이걸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이걸 놓치니까 사단의 공격 앞에 이 죄사함의 은혜가 무너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리갈팡저리갈팡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사는데 자꾸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의 진정한 고백임과 동시에 가장 큰 자랑거리 나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이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들이 순종하여 증거했던 복음 세 번째는요. 임금과 구주 대신 예수를 증언했다는 거예요. 31절 뒷부분을 보실까요?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요. 예수를 왕과 구주로 높이신 것이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앉게 하셨다는 거예요.
빌립보서에 보면 말씀하죠. 예수님은 원래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셨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하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것이 뭐라고요?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그렇게 쭉 선언을 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훨씬 중요해요. 이어서 하신 말씀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 말씀 우리 큰 소리로 고백합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무엇입니까? 내 입술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 할렐루야 내 입술로 예술을 시인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
그래서 여러분 찬양이 무엇입니까? 내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할 때 하나님은 영광받으신다.
여러분 이로 인해 예수께서 만왕의 왕 되셨고 유일한 구주가 되었다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가 나의 왕, 나의 구주가 되었다고 고백한다면 그분은 만일에 만왕의 왕이고 만유의 주이신 그분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증거하며 사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이 증인의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지난주에도 책나눔이 증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누면서 느낀 건 우리가 세상 살면서 복음 증거하는 게 쉽지가 않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책에서도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핵심은 나가서 증거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예수님 증거하기 위해서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요지의 말씀을 주세요. 그래서 어린아이를 이렇게 보고 있는데 목사님이 가서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는데 지금 뭘 하십니까?
목사님 계시면 몰라요. 아이 똥기정 알잖아요. 그러니까 목사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위해서 지금 애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거죠.
우리가 교회의 모든 일들을 함께 감당할 때 복음을 위해서 하는 것들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또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어떻게 하면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여러분 우리 32절을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이 사도들이 공회 앞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의 증인입니다. 그렇게 담대히 선언을 하죠.
여러분 이들이 왜 그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었는가를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십자가에 못 박힌 현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들이죠. 뿐만 아니라 40일 동안 그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이들 삶의 과정 과거를 들여다보면 증인으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협박과 제재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거 맞아 예수님께서 죽었지 부활하셨지 그래 40일 동안 나와 함께하셨지 맞아요.
그런데 그것 가지고 너 죽이겠다고 따라오면서 제재를 가하는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 충만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요 부활해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이야기하지는 야 너희들 먼저 뭐 하기 전에 모여 모여 그리고 성령 받아 성령 받아 성령을 받아야 권능을 받고 니들이 할 수 있는 그 복음의 증인의 삶을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땅끝까지 가게 될 것이야라고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이들이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을 입었잖아요.
그래서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하다 제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도하여 충만함을 받고 또 나아가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결국에는 그들의 삶을 받쳐주고 나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32절을 우리 다시 한 번 좀 눈을 크게 뜨시고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읽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이러하니라 하더라.
여기 보니까 자신들이 받은 성령,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다시 두 문장으로 새롭게 만들어보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문장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다라는 이야기인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받으셨습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예수 믿고 성령 받아 성령 충만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여 나아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 하신 그 말씀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공예 앞에서 신문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접근으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신문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질문과 대답이 있다는 이야기잖아 질문과 대답 종교 지도자들의 두 가지 질문과 제자들, 사도들의 두 가지 답변이 기록돼 있는 것을 보게 되죠.
첫 번째 왜 너희들 공예가 금지한 사항을 어겼느냐라는 질문이 쉽게 말하면 그때 이들이 대답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주 간결하죠.
너희들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 듣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들의 기준에는 명확했습니다. 세상이 어떤 말을 할지라도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만 붙잡고 사는 인생입니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두 번째 질문, 왜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냐 그거 하지 말라 했는데 왜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느냐라는 질문이지 그때 그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복음을 풀어내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만에 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목격한 책임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복음의 핵심을 지금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공격하고 있던 공회원들 앞에서 그들에게 정확하게 짧지만 핵심적인 것을 선언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귀하고 존귀한 신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 그리스도인 되었다. 얼마나 큰 축복이고 감사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 사람의 말 세상의 말로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불어 성령 충만하여서 우리가 듣고 믿는 그 믿음, 죽음과 부활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했고, 회개와 죄사함, 회개를 통한 죄사함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였으며, 그리하여서 왕과 주되심의 능력이 있으신 그 주님을 저와 여러분들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아직 고백하지 못한 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 기도하며 그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성도의 장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