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간의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에 나오는 대한제국과 일본 개화파의 차이
개화파를 실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선말의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부강과 독립국 유지를 위해 노심초사한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는 나의 생각에 균열이 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받은 국사 교육의 세뇌, 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인 신뢰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화파 박규수와 일본의 개화파 사쿠마 쇼잔의 자국 개화를 주장함에 있어서 목적과 결론이 달랐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교과서는 박규수를 중인 출신의 초기 개화사상가로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을 지도한 사람으로만 말하고 있는데 이 책은 박규수가 1873년 말 고종이 부친인 흥선대원군을 제거하고 친정하게 되었을 때 고종의 친정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고종의 친정 개시로부터 겨우 1년 후인 1874년 11월 4일 고종과 대립 끝에 우의정 직에서 물러났고 묘당1)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당시 박규수는 고종에 의한 독단적인 무위소 설치와 우대조치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대원군의 등장하며 조선은 척사파와 개화파의 두 노선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전자는 해외세력의 위협에 맞서 끝까지 쇄국을 하며 외국 세력의 영향을 배제하고 조선왕조의 기존 체제와 그것을 떠받치는 유교를 지키려는 세력으로 ‘위정척사파’로 불렸다. 임오군란은 ‘위정척사파’들이 대원군과 함께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일종의 정변이었다.
후자는 ‘개화파’로 위정척사파와 다르게 조선왕조의 개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그를 통해 조선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김옥균을 비롯한 홍영식 등은 갑신정변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3일 천하로 실패하였다.
아래는 개화파의 선구자요, 스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박규수가 대원군에게 설파한 개국론의 일부를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186, 187,188쪽에서 그대로 옮겨 적는다.
현 세계정세는 동서열강들이 대치하는 마치 춘추시대와 같이 서로 맹약을 맺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소국이나 동양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진(晉)과 초(楚)사이에 긴 정(鄭)과 닮았다. 내정과 외교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독립을 유지하는 일은 별반 어렵지 않다. 반대로 기회를 잃었다간 망국의 슬픔을 맛보게 될 터이다. 오늘날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공평한 나라라고 한다. 그 정치는 능란하게 문제를 해결하며 더욱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타국을 침략하려는 욕심은 없다. 설사 미국이 먼저 우리들과 맹약을 맺기를 제안하지 않아고 우리나라가 솔선해서 미국과 굳건한 맹약을 맺어 고립을 회피하는 게 왜 그릇된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박규수전집: 상⌟ 466-469쪽)
이 글은 박규수가 대원군에게 문호개방을 역설한 서한의 한 구절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은 두 가지 전제아래 전개되고 있다. 즉 하나는 당시 세계가 ‘춘추시대’와 같은 전란의 시대라는 점이며,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조선이 소국’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글 뒤에는 ‘오늘날과 같은 전란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소국인 조선이 자국의 군사력에만 의존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중요한 점은 개국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우호국을 찾는 것이다.’ 라고.
우리는 박규수를 개화파의 선구자로 조선을 부국강병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개화를 주장한 사상가로 배웠다. 그러나 그가 조선을 자력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나라로 생각하며 조선을 보호해줄 대국을 찾기 위해 개화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기무라 간은 박규수와 막부 말기의 일본의 개국론자로 유명한 사쿠마 쇼잔을 비교하여 둘의 차이를 말한다.
오래 전 춘추시대, 소국인 정나라가 대국인 진과 초에 끼어 침략을 받아 멸망 직전에 처했을 때, 현상자산이 등장해 정치를 맡았는데 자산은 이 난국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명(외교 협상에서 사자가 응대하는 구변, 수사)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비심, 자대숙, 자우 등의 유능한 인물들에게 사명의 기필, 검토, 수식 등을 맡겼으며 그리고 자신도 여기에 붓을 들어 훌륭히 마무리해 복잡한 국제정국에서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정공, 헌공, 성공 3댕[ 걸친 50여 년 동안 전화를 피하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사령에 힘을 기울인 덕분입니다. 지금 일본도 정나라와 비숫한 처지에 있는 만큼 자산과 같은 인물을 선발해 사명에 힘을 기울여 외국과의 협상에서 실패가 없도록 도모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부언하고 싶은 것은 국력에 대해서입니다. 일본과 외국을 비교하면 순한 기후, 풍요로운 미곡 많은 유능한 백성 모두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국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국체에 걸맞은 국력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사쿠마 쇼잔 •요코이 쇼난⌟ 272- 273쪽)
하지만 쇼잔이 박규수와 다른 점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곧바로 일본의 열강과의 동맹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않고 ‘해방(海防)’2)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점이다.
쇼잔이나 박규수나 당신의 일본과 조선왕조가 당장에 서양 열강에 대항할 만한 군사력이 없다는 공통된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쇼잔은 당시 일본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으로 막부의 실정이 초래한 문제로 보고 있다. 즉 쇼잔은 ‘유례를 찾아볼 수 국체’를 가진 일본은 서양 열강에 나라를 열어 그들의 기술을 습득한다면 쉽게 서구제국들을 곧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에 반해 박규수는 조선이 ‘소국’임을 전면에 내세워 그 결과 곧바로 서둘러‘공평지국’과의 맹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쇼잔에게 개국은 서양 열강의 위협을 일시적으로 피하면서 그들의 부강한 기술을 익히기 위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 박규수의 개국은 그 자체가 전술이며 목적이었다. 이런 차이의 기저에는 자국 국력에 관한 인식의 차이 그리고 그 결과로 서양 열강을 ‘따라 잡는 게’ 용이한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다.
박규수의 사상을 계승한 조선의 ‘개화파’는 조선왕조가 어떤 열강과 손잡고 어떤 열강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일본도 어떤 열강을 모델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열띤 논쟁이 있었지만 열강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일본의 개화파는 스스로의 힘으로 개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를 모델로 삼으면 청나라의 힘을 빌릴 수 있으며 일본을 모델로 삼으면 일본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기무라 간은 1966년생으로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연구원, 하버드대학의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베대 대학원 국제협력과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으로 한국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한국의 권위주의적 체제의 성립⌟, ⌜한반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고종• 민비⌟, ⌜한국현대사⌟, ⌜근대 한국의 내셔널리즘⌟, ⌜일한역사인식문제란 무엇인가⌟등 다수가 있다.
미주
1) 묘당 : 조선시대 정종 2년, 100년에 설치한 행정부의 최고 기관. 종묘와 명당 이라는 뜻으로 정치를 다스리는 조정을 말한다.
2) 해방(海防) : 바다를 방비함
참고 및 발췌서
기무라 간저, 김세덕 번역,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제이앤씨,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