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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25-33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요약설교
25절. 이것을 비유로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비유>란 단어(παροιμία)는 어원이 ‘덧붙여 하는 말’(by the way)에서 나왔는데, ‘속담, 비밀스런 말, 비유, 비유적인 담화, 잠언’( byword, cryptic saying, a parable, an allegory, figurative discourse a proverb)을 가리키는 말이고, 마태복음 13장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비유란 단어(παραβολή)는 ‘곁에’란 단어와 ‘던지다’란 단어가 합쳐서 된 단어(pará, "close beside" and bállō, "to cast")로서, ‘이미 가르친 진리를 곁에 비유를 던져서 더욱 쉽게 가르치는 것”( a parable; a teaching aid cast alongside the truth being taught)이고 ’친숙한 비유를 사용해서 더욱 잘 깨달을 수 있는 빛을 던져주는 것‘( additional light by using an familiar analogy)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두 단어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개역성경에서는 본절의 것은 ’비사‘로 번역했다가 개역개정에서는 똑같이 ’비유‘로 번역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는 비유로 말씀하시던 것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임하시면, 예수님과 천국에 대한 비밀을 더욱 분명하게 계시해주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구주되심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천국에 대한 계시도 더욱 분명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나라를 회복할 유대나라의 정치적인 메시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2. 이것을 비유로 일렀거니와
‘이것을’이란 16장 21절에서 ‘해산 여인의 비유’를 말씀하여, 여인이 해산이 임박하면 근심하듯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제자들이 근심할 것과 아들을 낳으면 근심이 사라지고 기뻐할 것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시면 제자들이 기뻐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3. 때가 이르면 다시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때’란 성령님이 강림하신 때를 가리키고, 성령님이 강림하시면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것을 밝히 말씀해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4.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성령님이 오시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가르쳐주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해주시고, 또 예수님에 관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밝히 말씀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요 16:13-14)
26절.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이름>이란 단어(ὄνομα)는 ‘이름, 권위, 명성, 평판, 인격, 대의명분’ (a name, authority, fame, reputation, character, cause)을 가리킵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성도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일입니다.
각 지방에서 오시는 강사님들이 저희 신학교에 오시면, 점심을 들고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한 음식점을 정해놓고, 신학교에서 오셨다고 하면, 언제나 식사를 거저 하실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강사님들은 언제나 신학교 이름만 대면, 그곳에서 식사를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청구할 수 있게 해놓으셨으니까, 성도들은 예수님 이름만 대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4.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이 굶어 죽지나 않을까, 불신자들의 핍박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모든 것을 염려하셔서, 가장 손쉬운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27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1.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에서 ‘사랑한다’는 단어(φιλέω)는 ‘사랑한다, 친구로서 사랑한다, 애정을 가지고 본다, 애정을 품다’( to love, love of friendship, regard with affection, cherish)는 뜻으로서,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한정되는’(agapáō : ‘loving’ is always defined by God) ‘사랑하다’란 단어(ἀγαπάω)와 차이가 납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을 친구처럼 애정을 가지고 사랑했습니다. (φιλέω)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부정모혈로 태어난 자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에서 동사(φιλέω)는 인정적인 애정을 가지고 측은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인간 사람을 아가페 사랑(ἀγαπάω)으로 표현하지 않고, 인간적인 애정과 측은함으로 표현한 것은 본 구절이 유일합니다.
3. 이 세상 불신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불신자는 돈을 벌려고, 예수님이 누구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다고까지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
4. 아들이 귀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사랑하고 믿는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순전히 아들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아들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 친구, 딸 친구도 사랑합니다.
아들이 친구를 데리고 오면, 어머니가 아들 친구에게, 맛있는 과일도 주고 음료수도 주고, 밥을 주기도 합니다.
아들이 미워하는 아이는 엄마도 미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들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28절.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1.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란 말(ἐξῆλθον ἐκ τοῦ Πατρὸς καὶ ἐλήλυθα εἰς τὸν κόσμον)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와 있고: I came forth from the Father and have come into the world)란 뜻으로서, ‘나와’란 단어(ἐξῆλθον)는 과거형으로서 ‘내가 나왔다’(I came forth, came out, came out of)는 뜻이고, ‘왔고’란 단어(ἐλήλυθα)는 현재완료형으로서 ‘현재 와 있다’(have come)는 뜻입니다.
<세상을 떠나>란 말( ἀφίημι τὸν κόσμον)에서 ‘세상’이란 단어(κόσμος)는 ‘질서, 세상, 우주, 세상일, 세상 주민’(order, the world, universe; worldly affairs; the inhabitants of the world)을 가리키고, ‘떠나’란 단어(ἀφίημι)는 ‘보내다, 홀로 남겨두다, 가게 하다, 놓아주다, 떠나다’(to send away, leave alone, let go, release, permit to depart)는 뜻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노라>란 말에서 ‘가노라’란 단어(πορεύομαι)는 ‘간다, 여행한다, 죽는다’(to go, travel, journey, go, die)는 뜻으로서 ‘한 장소에서 다른 특별한 목적지로 옮겨가는 것”(to transport, moving something from one destination to another particular destination)을 가리키고, 현재형으로서 ‘아버지께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셨고, 다시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원래 계시던 곳은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3. 우리들은 모두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면, 두 군데 중에 한 곳으로 모두 갑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 따라서 하늘나라로 가고, 마귀 따라 자기 욕심대로 산 사람들을 마귀를 따라서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귀 따라 살지 말고, 예수님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천국에 모두 다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9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1. <제자들이 말하되>란 말(Λέγουσιν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은 ‘그 분의 제자들이 말하기를’(His disciples say)이고, ‘제자’란 단어( μαθητής)는 ‘제자, 배우는 사람, 생도’(disciple, learner, pupil)을 가리킵니다.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란 말(ἐν παρρησίᾳ λαλεῖς)에서 ‘밝히’(ἐν παρρησίᾳ)란 ‘자유롭게, 확신있게, 담대하게’(in freedom of speech, confidence, openness, especially in speech; in boldness, confidence)를 가리키고, 여기 ‘말씀하다’란 단어(λαλέω)는 ‘말하다, 대화하다’( to talk)는 뜻이고, 앞에서 제자들이 ‘말하다’는 단어(λέγω)는 일반적으로 ‘말하다’(say, speak)를 뜻합니다.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란 말(παροιμίαν οὐδεμίαν λέγεις)에서 ‘비유’란 단어(παροιμία)는 어원이 ‘덧붙여 하는 말’(by the way)에서 나왔는데, ‘속담, 비밀스런 말, 비유, 비유적인 담화, 잠언’( byword, cryptic saying, a parable, an allegory, figurative discourse a proverb)을 가리키는 말이고, 마태복음 13장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비유란 단어(παραβολή)는 ‘곁에’란 단어와 ‘던지다’란 단어가 합쳐서 된 단어(pará, "close beside" and bállō, "to cast")로서, ‘이미 가르친 진리를 곁에 비유를 던져서 더욱 쉽게 가르치는 것”( a parable; a teaching aid cast alongside the truth being taught)이고 ’친숙한 비유를 사용해서 더욱 잘 깨달을 수 있는 빛을 던져주는 것‘( additional light by using an familiar analogy)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두 단어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개역성경에서는 본절의 것은 ’비사‘로 번역했다가 개역개정에서는 똑같이 ’비유‘로 번역했습니다.
‘하지 아니 하시니’란 말(μίαν λέγεις)은 문자 그대로는 ‘말씀하지 않으시니’(not speak)로서 ‘현재는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지 않으니’란 뜻이고, 여기서 ‘말씀하다’란 단어(λέγω)는 일반적으로 ‘말하다’(say, speak)을 뜻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비유를 많이 사용해서 말씀하셨으나, 십자가 죽음과 승천을 앞두고는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30절).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 버리고, 흩어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32절)
30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사실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확실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도,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 16:16, 요 10:27).
그런데, 제자들은 다시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줄 믿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처럼,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2. 이것을 볼 때, 인간의 지식과 결심은 그렇게 믿을 것이 못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한때 목숨 바쳐 충성할 것 같아도, 위기의 순간에는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그때는 능력을 받아서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3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는 말(Ἄρτι πιστεύετε)에서 ‘믿는다’는 단어(πιστεύω)는 ‘믿는다, 신뢰한다, 맡긴다, 확신한다’(to believe, have faith in, trust in. entrust, affirm, have confidence)는 뜻으로서, ‘사람에게 설득 당하고 믿는 것이나 하나님께 설득당하고 믿는 것’(be persuaded– believe; used of persuading human believing and of being persuaded by the Lord)을 가리킵니다.
32절.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1.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란 말(σκορπισθῆτε ἕκαστος εἰς τὰ ἴδια)은 ‘너희가 각각 자기 곳으로 흩어질 것이다’(you will be scattered each to his own place)는 말이고, ‘흩어진다’는 단어(σκορπισθῆτε)는 부정과거형으로서 ‘갑자기 싹 흩어지는 것’을 가리키며, ‘흩어지다, 사라지다, 나누어주다’( to scatter, disperse, scatter abroad as of sheep; dissipate, waste; distribute alms)를 뜻합니다.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는 말( ἔρχεται ὥρα καὶ ἐλήλυθεν ἵνα-- κἀμὲ μόνον ἀφῆτε)은 ‘나를 혼자 남겨둘 때가 왔으니 이미 왔도다’(an hour is coming, and has already come, for you to be scattered---and to leave Me alone)는 뜻이고, ‘둔다’는 단어(ἀφίημι)는 ‘보낸다, 홀로 남겨둔다, 풀어놓다, 떠나간다, 버려둔다’(to send away, leave alone, permit, let go, release, permit to depart, remit)는 뜻이고, ‘오나니’란 단어(ἔρχεται)는 현재형으로서 ‘오고 있나니’(is coming)란 뜻이고, ‘왔도다’는 단어(ἐλήλυθεν)는 완료형으로서 ‘이미 왔다’(has come)는 뜻입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는 말(οὐκ εἰμὶ μόνος, ὅτι ὁ Πατὴρ μετ’ ἐμοῦ ἐστιν)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I am not alone, for Father is with me)는 말이고, ‘혼자’란 단어(μόνος)는 ‘혼자, 홀로, 외로이, 쓸쓸히’(alone, only, solitary, desolate)를 뜻하며, ‘있다, 계신다’는 단어(εἰμὶ, ἐστιν)는 현재형으로서 ‘아들된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늘 함께 계시는 것’을 뜻합니다.
2. ‘제자들이 다 각각 흩어지고, 예수님을 혼자 둔다는 것’은 스가랴서에 예언된 것입니다.
스가랴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3. 예수님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똑 한 번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혼자 두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였습니다.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광야 생활도 천국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광야 생활도 천국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떠나가신 곳은 사울 왕의 궁정 같은 곳이라도, 악신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다니엘과 다윗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이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생명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84편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예수님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 날마다 천국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1. ‘환난’이라는 단어(θλῖψις)는 ‘환난, 박해, 고통, 고난’( tribulation, persecution, affliction, distress)을 가리키고, ‘평안’이란 단어(εἰρήνη)는 ‘하나 된 것, 평안, 고요함, 안식, 마음의 평안, 안녕, 건강’(one, peace, quietness, rest, peace of mind; farewell, health)을 가리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 ἐγὼ νενίκηκα τὸν κόσμον)은 ‘바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란 뜻( I have overcome the world)으로서 ‘내가’가 강조되어 있고, ‘이기었다’는 단어(νενίκηκα)는 현재완료형으로서 ‘현재 내가 세상을 완전히 이긴 상태’라는 뜻입니다.
2.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14-16장 다락방 강화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는 참된 평안인데(요 14:27), 이것은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참된 평안입니다. (롬 5:3, 고후 1:4)
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합니다.
즉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당하는 환난도 있고, 또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환난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런 환난은 말세에 즉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을 당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마 24:5-29)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이 말씀에 감격하여, “이 말씀은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 기어가면서도 전할 가치있는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4. 사람은 죽음 앞에서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죽음은 말할 것도 없이, 수술만 하려고 해도, 두려워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안 믿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죽음과 마귀 앞에서 얼마나 떠는 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똥을 싸고, 눈을 부라리고, 사지를 오들오들 떨고, 사지가 빳빳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무서운 죽음과 마귀에게서 해방을 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고 돌아가시는 성도들은 정말 얼마나 평안하고, 환한 얼굴로 천사에게 들려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일생 죽음이 무서워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14-15. 예수님이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라.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일생에 죽음에 매어서 마귀에게 종노릇 하는 인생들을 놓아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으로 마귀는 쫓겨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5.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참된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6.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고, 오히려 성도가 환난을 당하는 곳입니다.
마귀가 공격하는 곳이며, 병균들과 나쁜 벌레들도 많고, 더위와 추위가 있는 곳이며, 불신자들이 이유 없이 괴롭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감당할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능히 하나님께서 시험을 이길 능력을 주시고, 또한 시험 당할 즈음이 되면, 피할 길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쁘게 순례의 길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7.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한 어머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모시고, 자녀들을 사랑하면서 담대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필요한 것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주셔서, 감사하고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