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첫 장을 넘긴 지 엊그제 같은데, 계절은 어느덧 봄으로 가는 길목인 2월의 문턱에 들어섰다. 이번 여의도포럼(육사 27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120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금단의 땅, 용산 미군기지 반환 부지에 조성된 '용산 어린이정원'이다. 약속 시각인 오후 4시, 신용산역 1번 출구로 들어서니 거대하고 당당한 아모래퍼시픽 사옥이 반긴다. 그 곁에는 덴마크의 설치 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독특한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 개의 반원형 고리가 거울과 물빛에 반사되어 완벽한 원을 이루는 데칼코마니가 우리들의 모습을 비쳐주는 카메라와 같았다.
어린이 정원으로 들어서는 길은 생각보다 엄격했다. 대통령실과 인접한 까닭에 사전 예약을 필수요, 검색대를 통과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비로소 미군 주택단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붉은 지붕의 단층집들이 이국적인 그림엽서처럼 펼쳐지는 가로수길. 미군들이 생활했던 이 공간들은 이제 전시관과 서가, 기록관으로 옷을 갈아입고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탁 트인 잔디마당을 지나 올라선 전망언덕(Panorama Hill)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있는 언덕배기에서 구재림 동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수크렁풀을 보며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유래를 청산유수처럼 풀어낸다.
붉게 물드는 황혼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옛 이야기에 모두가 바위도 끄덕인다는 완석점두(頑石點頭)의 마음으로 깊이 몰입했다. 손에 쥐어진 따스한 커피 한 잔과 낭만적인 노을, 그리고 정겨운 입담이 어우러진 잊지못할 찰나였다. 분수정원과 어린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스포츠필드를 지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박물관에서는 인도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스투파의 숲' 기획전이 한창이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우리 역시 마음 한구석이 환하게 밝아짐을 느꼈다. 산책의 여정 끝에는 삼각지역 부근의 정겨운 식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따끈한 생태매운탕과 돼지목살을 앞에 두고 전인구 회장의 선창으로 잔을 들었다." 박격포!" 박장대소하고, 격려하며 포용하자는 그 뜻이 묵직하면서도 정겹게 가슴에 와닿는다. 권커니 잣거니 이어지는 막걸리 잔 속에 세월의 무게는 사라지고, 웃음꽃만이 식탁 위에 만발했다. 문득 생각에 잠긴다. 용산이란 땅은 고려 시대 몽골군의 병참기지부터 조선 시대 임진왜란의 일본군 주둔지, 임오군란의 청나라군, 일제강점기의 제국군 사령부, 그리고 해방 후 미군에 이르기까지 늘 이 땅의 고달픈 역사를 한몸에 받아낸 거점이었다.
69년 넘게 주한미군이 머물던 그 기지가 이제 비로소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서울의 푸른 심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홀로 외로이 머물기보다 뜻이 맞는 오랜 동기들과 어울려 세상 속을 거니는 것만큼 좋은 약이 없다. 남과 어울려 자주 걸어다니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어느 연구결과가 아니더라도, 오늘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우리 얼굴에는 청춘의 활기가 가득 들어와 있었다. 짧았던 하루였지만, 깊은 역사의 숨결이 숨 쉬는 용산에서 우리는 잠시 소년 시절의 화양연화(花樣年華)로 돌아가 마음껏 웃고 즐겼다.
정성껏 길을 안내하고 옛 이야기를 전해준 전인구와 구재림에게 감사하며, 가슴 가득 온기를 품은 채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