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김소연·유재희 옮김/시각과 언어)는 정신분석학계의 거목 자크 라캉(1901~1981)의 난해하기로 유명한 정신분석학 이론을 대중문화를 통해 조명한 책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현실은 얼마나 실재적인가?’가 라캉의 인식론, 2부 ‘아무도 히치콕에 대해 너무 많이 알 수 없다’는 라캉의 시각이론에 해당하며, 3부 ‘환상, 관료주의, 민주주의’는 라캉의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지젝의 사회정치론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대중적으로 히트한 영화와 공상과학소설, 탐정소설, 추리소설 등의 대중문화 산물들은 물론이고 카프카, 조이스, 베케트의 본격 모더니즘 작품들과 연극, 회화, 오페라까지 넘나들면서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 ‘라캉 읽기’를 시도했다. 1994년 출간돼 화제를 모았던 <자크 라캉>(아니카 르메르 지음/문예출판사)이 라캉의 이론 자체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 책은 대중문화를 통해 라캉의 “고상하기 그지없는 이론적 주제”에 ‘삐딱하게’ 접근한 색다른 차원의 ‘라캉 입문서’다.
예를 들어 영화 <로보캅>의 주인공은 ‘두 번의 죽음’, 임상적인 죽음과 기계인간으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면서, 다시 말해 이전에 자신이 누렸던 인간으로서의 삶의 단편들을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순수한 충동의 화신에서 욕망의 존재로 되돌아가는 재주체화를 겪는다고 말한다. 충동은 욕망의 변증법화에 저항하는 ‘기계적인 고집스러운’ 요구이고, 욕망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된 주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로보캅>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을 직접 체험하고, 슬로베니아공화국의 대통령선거에 개혁파 후보로 나서기도 했던 지젝의 새로운 방향모색이기도 한 이 책은 유대인 대학살, 에이즈, 체르노빌 방사능 유출사건, 환경 위기 등에 대해 라캉식 독해법을 보여준다.
과학적 담론이 지배한 결과 고대 그리스의 사드시대에는 문학적 환상이었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협박이 된 사례 중의 하나가 체르노빌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또 “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포기하고 어떤 근본적인 소외를 기초로 해서만 자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의 수용”을 거론하는 등 ‘포스트 모던’적 세계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은 결국 대중문화의 길을 통해 독자들을 라캉의 세계 안으로 안내했다가 다시 정치사회적인 현실세계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 입문서’이자 ‘라캉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 입문서’다.
*슬라보예 지젝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슬로베니아공화국의 류블랴나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 제8대학의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이며 사회학, 철학, 문화 연구, 심리학 등 수많은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세계 지식계의 최전선에서 가장 도발적으로 문제를 던지는 철학 스타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의 그를 두고 서유럽 학자들은 ‘동유럽의 기적’이라 칭했다.
지젝은 독일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이론화했다. 지젝의 학문 대상은 이라크 전쟁, 근본주의, 자본주의, 관용, 정치적인 올바름, 전 지구화, 주체성, 인권, 레닌, 신화, 사이버 스페이스,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포스트마르크시즘, 데이비드 린치, 알프레드 히치콕 등 수많은 주제를 포괄한다. 에스파냐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정통적인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라고 표현했으며, 또 한 인터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라고 자신을 칭했다. 단순한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실천하는 이론가로서, 매년 2~3권의 책을 펴내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개혁파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의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다양한 문화 현상에 관심을 가진 그는 이론과 현실, 문화의 창의적인 결합을 담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삐딱하게 보기> 외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까다로운 주체> <신체 없는 기관> <혁명이 다가 온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HOW TO READ 라캉> <죽은 신을 위하여> <시차적 관점>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성관계는 없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