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선생이 가셨다
....... 오늘 새벽 2시 (한국시간으로 2월 12일 목요일 아침 10시)에
이득수 선생이 간암으로 약 반년 고생하시다가 별세하셨다. 우리가
프로렌스를 떠나는 날 저녁에 이득수 선생의 한 동생분이 온다고 했는데
형제가 그래도 상봉해서 이틀 같이 보내고 오늘 새벽 시간에 조용히
숨지셨다고 한다 .....
이 글은 시작했던 글이어서 우리가 프로렌스에 다녀온 얘기로 계속하겠다.
오랜지를 사고 시장에서 나와 두오모 (Duomo)를 지나 아르노강 쪽으로 걸어서
싼타-크로쳬 (Santa Croce) 광장으로 나왔다. 봄에나 여름에나 가을에는
이 광장이 서울의 동대문 시장같이 북적거리는 노천시장인데 이 날에는 장사꾼들도
많이 보이지 않고 관광객들도 별로 없는 한가한 광장이었다.
우리가 프로렌스에 올 때마다 들리는 곳이 바로 이 싼타-크로쳬다. 몇 년 전에는
입장료도 없고 교회내에서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는
입장료도 받고 교회 내에서 걷는 자리도 한정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이 싼타-크로쳬에 들어오면 우선 그 정숙한 분위기가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불치의 병에 걸려있는 환자를 문병하기 전이어서 더욱이나 마음이 뒤숭숭 했는데
일단 마음의 안정을 받으니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약 한 시간 반을 목적없이 걸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호텔에 돌아오니까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 이번에는 큰 딸애 엘리자가 차를 몰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엘리자는 바이올린을 치는 아인데 금년에 이미 두 번이나 쏠로 데뷔를 했다고 한다.
이태리의 어느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을 잊었다) 로부터 개인 수업을
받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우리가 집에 찾아 갔을 때 선생과 수업중이라고 해서 그런가 하고
조용히하고 있었는데 수업이 끝났다고 해서 알고 보니까 전화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집에서 친구의 부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내 친구가 입에서 출혈을
하여 의사를 불러 병원에다 입원을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가 다만 목숨을
연장시키는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심리란 극단적인 위치에 도달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사고방식이 변해지기 마련이다.
내 마누라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내 자신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서 몸소
가부를 결정못할 경지에 빠져있을 때 내 의사는 어떠하냐고 물었다. 내 목숨이
이제 한정되어 있을 때에 기계의학의 힘으로 내 목숨을 더 연장해 주지 말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깊은 의미가 없는 듯한 그냥 주고받는 대화라고 할지라도
배우자 서로가 건너편의 의사를 알고 있으면 앞으로의 행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은
틀림없다.
사람이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한다’ (생존
경쟁) 라는 ‘누구의 (생물 본질의)’ 명령 (운명이라고 하자)을 얻어 태어나서 산다.
이것이 현존하는 자연법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일부러 죽으려고 태어나는
동물들은 없다. 그래서 임의의 병으로 예외에 죽게 된다면 운명이 끝일 때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더 살아야 하겠다는 생존의식만이 강해진다.
죽는다는 것을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이거나 불의식적으로 그냥 더 살려
(생존하려)고 몸부림 친다. 이러할 때 죽어가는 사람을 기계나 약을 써서 몇일
더 연명시켜서 더 고생시킬 이유가 있을가...
프로렌스의 교외 카렛지 (Careggi)는 옛 프로렌스 통치자 메디치 (Medici)가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 온 동네가 다 병동으로 깔린 병원지역이었다. 주말이라고
해서 문병오는 사람들로 인하여 주차장이 꽉 차있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산길
도로에다 차를 세우고 한참 걸어 내려와 긴급환자병동을 찾았다.
친구부인의 얘기를 들어서 이태리의 병원이 어떠하다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그마한 방에 다섯 명의 환자가 누어있는 것을 보니까 좀 놀라웠다.
독일에서는 독방을 얻을 수도 있고 심해야 세 명이 누어있는 병실밖에 없는데
다섯 명에다 방문객들을 위한 의자도 없는 병실은 좀 생각이외였다. 멀쩡하게
보이는 옆 침대의 환자들 사이에 끼어서 누어있는 내 친구를 보자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친구는 원래 키도 내보다 좀 더 컸고 몸도 더 무거운 사나이였는데 바짝 말라
있는 얼굴이나 반으로 줄어든 몸을 보니까 너무나 마음에 거슬렸다.
이번 우리가 오는것은 비밀로 해 달라고 집에다 부탁을 했기 때문에 이 친구
혼자서만 우리가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몸이 좀 어떻소’ 하고 내가 물으니까
한 쪽 눈을 살긋이 뜨더니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괜챦아요’ 전에도 전화를 하면 매번 반복하든 대답이었다. ‘먼 길 오는데 고단
할테니까 집에 가서 좀 쉬어요‘ 라고 반복했다. 아들 딸 넷에다 부인과 또 이태리
부부 한쌍 그리고 우리 둘 모두 아홉 명이 침대를 둘러싸고 서 있으니까 누어있는
사람자체도 좀 불편했을 게다. 거기에다 애들하고는 이태리말로, 나와는 한국말로
그리고 우르젤과는 독일말로 회화를 해야 했으니 가끔 단어들을 혼동해서 사용했다.
‘여덟 시간동안 의사들이 조사만 한다고 해서 고생만 많이 하고 있소’. 이것저것
조사를 많이 했을 것은 분명하지만 여덟 시간은 생각해 낸 시간이었다. 그러니
병원에 입원한 뒤로 내내 조사만 받느라고 고생한다는 말이었다. 말 한마디를
하고 난 뒤 눈을 감고 좀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어 몇 마디 말을 계속하곤 했다.
모든 것이 다 힘들어 보였다. 몸이 하도 여위어서 목이 내 팔목둘레 정도로 말랐다.
지난 가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전화를 걸면 매번 ‘괜챦아요’ 라든가 ‘몸이
나아지는 길이에요’ 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고생하든 이 친구의 병과 싸우든
나날을 눈앞으로 다시 한번 데뷔시켜 보았다.
불치의 병을 얻은 것은 한편 운명이기도 하겠지만 지난 3-4년은 몸을 조금도
쉬지 않고 동서남북 뛰어 다니며 무리하게 활약을 한 보과인지도 모른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면서 병실을 나왔다. 우리를 보고 자기 집에 가서 좀
쉬라는 얘기를 곧장 했다. 병동에서 나오자 하늘은 무심하게 푸르러져 있고 오고
가고 하던 비도 흔적을 감추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우리가 처음 프로렌스에 갔을 때 이 친구가 꼭 가보라고 권하던
싼 미니아토 (San Miniato al Monte)에 가보기로 했다. 싼 미니아토는 아르노강
건너편 언덕 위, 미켈안젤로의 다비드 동상이 서 있는 피앗찰레 미켈안젤로
(Piazzale Michelangelo)에서 한 언덕을 더 올라 가면 있다. 보통 관광객들은
이 피앗찰레 미켈안젤로까지 와서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프로렌스의 파노라마를
배경으로 사진만을 찍고는 그냥 내려간다.
싼 미니아토는 시내에 있는 두오모같이 그렇게 웅장한 교회가 아니다.
프로렌스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프로렌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교회였다. 아늑한 분위기에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신부가 메쎄 (미사)를 하고 있었다.
제단 뒤로 돌아가니 촛불을 피어 올리는 제단이 있었다. 내 친구를 위해서
우리 둘이 촛불을 두개 피어 제단에다 올렸다.
나는 카토릭신자가 아니지만 카토릭신자인 내 친구를 위해서 촛불을 켜 주었다.
오늘 내 친구가 내과의사 교수의 병실로 옮겼다고 했는데 병동 3층에 있는 더
작은 방에 이곳 역시 다섯명의 환자가 누어있었다. 한쪽 벽쪽으로 놓인 침대에
왼쪽으로 누워있어서 얼굴을 보기에도 힘들었다.
이날 아침에 집에다 휴대폰으로 전화까지 했다는 사람이 어제보다 더 형상이
나빠 보였다. 말하는 것 자체도 힘들어했다. 몸이 말라서 내부에서 (정맥이나
동맥이 터져서) 출혈이 나오면 내 장모의 예를 들어보아 출혈 후 닷새가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 아침 병원에 오기전에 우리는 싼 미니아토에 갔다 왔다고 하니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프로렌스에서는 가장 좋은 교회라고 다시금 다짐하는
듯이 말을 했다. 우리에게도 꽤 마음에 드는 교회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할 말이 더 없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할가... 서로가 다 빤히 알고 있는 사실을 ...
우리가 다시 떠나는 날이어서 더 오래 병원에 머물 수가 없었다. 이별이냐
작별이냐 떠나면서 무엇이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르젤이 이별을
하려고 하니까 바짝 마른 손을 내밀어 마지막의 악수를 했다. 말 없는
작별이었다. 나도 손을 꼭 쥐고 있으니까 힘이 빠지는지 손을 폈다.
마지막으로 입이나 적시라고 물을 한 목음 마시도록 해주고 발을 돌렸다.
이 순간 내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전에 다시 한번 보고
간다는 마음이 흡족한 느낌을 주었다.
이득수선생의 장례식은 내일 2월 13일이라고 한다. 집이 있는
비아 트리에스트에서 얼마 머지않은 햇빛 잘 비치는 남향 언덕에 자리 잡고
누워서 긴 잠을 자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