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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2장
1. 창조주를 기억하라(1-8)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일부인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믿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 만물을 운행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지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피조물의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지금도 자기의 뜻과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붙들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바른 생각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고, 하나님의 주관하심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한마디로 말해서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에 자기 소원을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 창조주로 행세하는 주객전도의 현실입니다.
1-2절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음을 잊지 말라는 뜻일까요? 사도신경의 첫 시작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입니다. 매주일 예배드릴 때 이런 내용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로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삶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믿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믿음에 대한 자기 열심과 노력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현장임을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 실상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조주를 바르게 기억하게 되면, 피조물이면서도 피조물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자기의 악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았던 날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에 담긴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때란 젊을 때를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인간의 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미래와 목적과 희망을 자신에게 두고, 자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청년의 때를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눈에 보이는 세상을 지으신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끝난 것일까요? 창조를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면, 창조주를 기억한다 해도,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다’는 생각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 65: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계 21:1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망해야 할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돈이 있든, 높은 자리에 오르든, 죄로 인해 망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이사야의 인식이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고통의 울음소리와 부르짖음으로 가득하게 된 것도, 망해야 할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사야는 무너진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다시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문제의 해결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삶의 환경이 달라진다 해도, 망해야 하는 인간이 그대로라면, 세상은 여전히 울음과 고통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이 망할 자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제단에 피어 있는 숯을 입술에 대며,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경험한 새로운 세계이며, 이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실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500년 후에 그리스도가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에게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은 단지 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죽기 이전의 생명이 다시 계속되는 부활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창조 사건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하시는 창조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창조주를 기억한다면, 세상의 높은 자리와 소유로 자신을 확인하지 않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에게, 쓸모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망할 자인 인간에게 유일한 기쁨이 되는 것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곤고한 날,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까워지는 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입니다. 죽음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3-5절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늙으면 팔의 힘이 약하여 집니다. 두 다리도 약해지고, 맷돌을 이빨로 번역하여 늙으면 이가 빠져서 잘 씹지도 못합니다. 창은 눈으로 번역하여 보는 것들이 다 침침해 집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머리는 희어집니다.
이른 아침 새소리에도 잠을 깹니다.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습니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고 간다고 합니다. 내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조문을 갔는데 이제 사람들이 나를 조문 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이 길을 막을 수가 있습니까? 누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씀을 막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생들이, 늙고 죽어감을 온 힘으로 저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건강식품이나 화장품이나 약들을 선전할 때에, 젊음을 유지하여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늙어감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보약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창조주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늙어감과 죽어감을 조용히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세입니다.
6-8절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어떤 인생도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은사슬도 끊어지고 귀한 금 그릇도 부서집니다. 물동이가 퍽 깨어지듯이 인생도 그러합니다. 깊은 우물을 길어 올리는 도르래가 부서지면, 물을 길어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은 수분이 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헛된 인생살이 중에서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기에 청년의 때에, 아무 낙이 없다고 하기 전에,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3절 이하는 인간의 현실에 대한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면서도, 그러한 실상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미래를 생각해보십시오. 청년의 때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의 자리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서, 기존의 몸의 죽음은 근심과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새롭고 참된 생명이시고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조주를 기억하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에서 새로운 창조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2. 진리의 말씀(9-12)
현대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은 관심 밖의 일입니다. 교인들이 성경을 쓰고 읽는 것을 자랑하지만, 그 또한 진리의 말씀을 향한 관심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말씀을 향한 관심이 성경을 읽고 쓰게 했다면,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쓰고 읽는 자신에게로 관심이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습성임을 생각해 보면, 진리의 말씀은 피하고 싶은, 거북한 내용과 짐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환영하고 좋아할 인간은,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 6: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것이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현실적인 반응이고 실상입니다. 말씀이 아닌 떡이 자기의 생존에 중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을 부정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면서, 인간이 한 일을 인정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으로 높여주는 말씀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인간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말이라면,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헛된 인간의 말일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10-11절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여러분은 말씀을 보거나 듣는 시간이 즐겁습니까, 괴롭습니까? 저는 괴롭습니다. 많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찔림을 통하여 기쁘기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찔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 찔림이 없다면, 나는 오늘도 내 잘난 맛에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거나 듣는다고 할 때에, 내가 좋아하는 말만 듣는다면, 채찍이 아니라 당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채찍으로 들어오는데, 그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죽였으며, 선지자와 사도들을 보낸 예수님마저 죽인 세상입니다.
지혜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목자가 주신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한 목자에게서 말씀을 받았다면, 지혜자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똑같은 내용으로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으로 믿어질 수 없는 말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찌르는 채찍 같고, 잘 박힌 못 같다고 말합니다.
찌르는 채찍은 목자가 가축을 이끌어갈 때 사용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끝이 뾰족해서 가축을 찌르면서, 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용도입니다. 잘 박힌 못은 목자가 천막을 칠 때, 땅에 고정시키기 위해 땅에 박은 못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말씀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들이 찌르는 채찍과 같고, 그 말씀들이 모두 한 목자가 주신 것이라면, 목자가 되시고 말씀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찌르는 채찍으로 오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말씀에서 아픔이 되는 것을 제거하고, 귀를 즐겁게 해줄 다른 말을 첨가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말하고 듣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헛됨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9절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잠언을 읽어보셨습니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잠언을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의 교훈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잠 6:6-8절을 보겠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이 내용만 봐도 열심히 일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할 것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잠언에는 이런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잠언을 인생에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면 잠언은 찌르는 채찍으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결론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미와 게으른 자에 대한 내용도, 우리가 게으른 자임을 찌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고 복 받아 잘 살겠다는 기대 자체가, 열심히 일하지 않고 복을 누리겠다는, 게으른 자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찾는 인간성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찌르는 채찍이 되는 것이고, 채찍에 의해서 목자가 의도하는 길로 가게 되면, 인간의 모든 것이 부정되고, 오직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만, 참된 생명으로 고정되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박힌 못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고, 진리의 말씀이 아픔을 주는 찌르는 채찍이 되지 않으면, 인간은 끝까지 자신을 옹호하고, 긍정하는 방향으로 갈 뿐입니다.
자신이 부인되는 자리에서 누리는 자유를 모른 채, 자신의 힘과 수고로 원하는 것을 채워야 만족해 하는, 인간 본연의 길로만 갈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참함이고 불행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12절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사람이 많은 책을 짓고, 많이 공부한다 해서, 자신이 부정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책을 짓고,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으로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책을 짓고 공부한다 해도,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전도자는 지혜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완악함은, 지혜보다는 자신의 삶을 편안하고, 부요하게 해줄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이러한 마음을 개조할 방법은 없습니다. 많은 책을 짓고, 몸이 피곤할 정도로 공부를 해도, 인간은 자기 유익만 추구하는 완악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찌르는 채찍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찌르는 채찍에 의해,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내가 버림받아, 마땅한 쓸모없는 악한 자로 드러나는 아픔이,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게 하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부요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찌르며 인도해 가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에 의해 판단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다면, 우리는 항상 죽음의 존재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이, 가장 복되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우리의 심령에 못 박히게 되면서,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감사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의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이고 증거입니다.
전도서의 채찍과 같은 찌르는 말씀을 주신 분이, 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채찍을 대신 맞으시고, 우리와 함께 맞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찌르는 말씀이 마음에 박혀지는 자들이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 은혜가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3. 사람의 본분(13-14)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만 충실히 따라간다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에 따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알게 되면, 우리가 전혀 의심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믿음의 세계들이, 모두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자작품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는 사실이,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에서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인간성은 변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를 향한 목사의 욕심과 포부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교인을 자기 뜻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의 오류를 간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본분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배운 내용이고, 자신의 판단에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순종과 실천을 가르친다면, 결국 인간의 종교성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하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을 목숨처럼 여겼던, 유대 종교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자는 전도서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다는 것은, 전도서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결국 ‘헛됨’으로 종결될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은 무능력과 무능의 존재라는 것이, 성경을 충실히 따라갔을 때, 파악하고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14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이 말도 인간의 현실에 관한 내용입니다. 행위는 드러나는 일이고, 은밀한 일은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것을 뜻합니다. 흔히 ‘나는 양심 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것도, 은밀한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것이 드러난 행위든, 속에 감춰진 은밀한 일이든,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선으로 인정하시는 행위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악에 대한 심판이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알게 된 인간의 결국이며, 모든 일의 결국입니다.
이러한 일의 결국에서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전도자가 깨닫게 된 지혜입니다. 그리고 전도서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도자의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왜곡하여, 또다시 인간의 헛된 길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것을, 우리가 실천하여 행위로 보여줘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전도자가 사람의 본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말하는 이유는, 심판이 인간의 결국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위가 있을 수 없고, 심판이 전부인 인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하는 의미가, 실천을 하라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전도자는 앞과 뒤가 다른 말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교회가 앞과 뒤가 다른 말을 합니다. 십자가 은혜를 말하면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십자가 은혜는 믿음의 실천이라는 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할 수 없는 죄의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말씀에 대한 인간의 실천 가능성을 부인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교인들에게, 믿음의 실천을 크게 강조하고 요구하는 것이 앞과 뒤가 다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도자가 말한 일의 결국과 복음을 알지 못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성경을 읽되,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일의 결국을 알지 못하고, 헛되고 헛된 길로 가면서도, 자신의 헛됨을 알지 못하는 사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는 것은, 실천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확인해주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때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배를 위해서, 자기 뜻의 성취를 위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인간성을 요 6:26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는 말씀으로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보다는, 배부름이라는 세상의 현실을 더 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배부름이라는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결국을 외면하고 심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오로지 배부름이라는 현실, 곧 욕망 충족이라는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우리를 향해서 말합니다.
12:1-2절에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는 권고를 한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의 본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 6:1-2절에 보면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자자손손 대대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이 명하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으로 인도받은 이스라엘의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약속의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이 본분을 잊어버리고, 자기 배부름을 따르게 됩니다. 그로 인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약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거치면서, 자신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실감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였던 것은 죄가 전부였고, 그것으로 그들은 애굽처럼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였을 뿐이라는 것이 발각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올 자격이 없고, 이방 나라 애굽처럼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령과 규례를 주신 이유가, 구원될 수 없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를 통해서 알게 되는, 인생의 의미와 해답은 두말할 것 없이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될 수 없는 자를 택하시고 부르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되는 것이고, 땅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배부름이 되는 인생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심판입니다. 이것을 매일의 삶을 살면서 실감하고, 인생의 결국임을 안다면, 예수를 믿게 하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이, 자비와 긍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구원될 수 없는 자가 구원 되었음을 안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것이며, 예수 안에 있게 된 사람의 본분입니다. 이 본분을 따라 살라는 것이 전도자가 남긴 지혜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