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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까지 가서
함석헌
한 여름이 다 갔습니다. 여러분, 더위와 장마를 어떻게 견디어 내셨습니까?
나는 자연과 역사의 겹친 금년 더위와 장마를 남쪽 땅끝에 가서 씻고 왔습니다. 이준묵 목사님의 초청으로 해남읍교회 청소년 여름 수련회에 참여하여서 해남군의 남쪽 끝인 송호리 해수욕장에 가서 며칠을 지내다 왔는데, 참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하나는 시계를 잃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땅 끝에 서 본 일입니다. 오후에는 바다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시계를 간수하노라고 아마 내 손으로 편지 봉투 속에 넣었던 것인데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에 구석 구석 갈피 갈피를 찾다 못해 못 찾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만큼 살고 보니 그런데는 수양이 다소 되어서 잃었으면 모든 것이 당연 그런 것으로 알고 별로 아쉰 마음 없이 지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 보고 “송호리를 영 잊을 수 없이 됐습니다. 여기서 잃은 것이 있으니” 하고 말았었는데, 돌아올 때 떠나려 하니 이 목사가 다른 시계를 하나 새로 사 주지 않습니까? 그래 다시 한 번 더 못 잊게 됐는데, 급기야 집에 와서 짐을 모두 풀면서 보니 잃었던 시계가 봉투 속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또 다시 한 번 더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시계를 잃었으니 셈이 없어진 것입니다. 셈 잃었더니 셈이 도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우리나라 대륙으로서는 가장 남쪽 끝인, 그 땅끝에 섰던 느낌입니다. 그런 재미있는 지명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갈까 말까 생각을 하다가 떠나기 전날 해가 거의 질 무렵 셋이서 갑자기 떠났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별로 멀지도 않은 곳을, 여러 시간 바다 장변의 길도 없는 바위 틈, 돌 사이로 헤메다가, 거의 다가서 절벽에 다다라서 부득이 수십 길되는 벼랑 가시덤불을 기어오르다가, 마침 순찰하는 초소병을 만나서 안내를 받아 아주 해가 떨어질 때에 그 끝점에 가니, 발밑에는 수십 길 낭떠러지요, 그 앞은 망망 바다인데, 크고 작은 섬들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돌도끼를 차고 이 낭떠러지에 섰던 우리 할아버지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몽고로부터, 만주로부터 찾아 찾아 여기까지 왔다가 이 땅끝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집이 있고 자리가 있어야만 안심하고 자게 된 나는 부득이 오래 섰을 시간도 없이,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방지방 산길을 달려 내려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지금도 내 눈에 선하고 거기 무엇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참 길은 다 그런 것 아닐까? 오늘날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은 그들의 찾음은 그 낭떠러지에서 끝나지 않았고, 완도로 제주도로 계속이 됐고, 일본으로 남중국에까지 뻗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지식, 무슨 힘이 있어서 했던 것일까? 지식, 힘만이 아닙니다. 지식보다 더한 내다봄, 힘보다 더한 숨이 깊은 속에서 솟구쳐서 그 지식 그 힘을 냈을 것입니다. 역사를 내모는 것은 이 지혜, 이 힘입니다.
우리는 여름만 되면 폭염(暴炎)이니 수마(水魔)니 하면서 큰 생각이나 있는 듯 걱정하는 체하며 부산을 떨지만, 사실은 추위, 더위, 가뭄, 난물은 우리가 벌써 억만 번 지나본 것입니다. 산숨(生命)의 역사는, 학자들이 찾아보아서 아는 것만 해도, 몇 십억 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뭄과 난물을 겪어 보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이 어떻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우 리 마음은 그것을 잊고 있어서 처음 당하기나 하는 듯 놀라지만, 우리 몸은 다 알고 있습니다. 몸속에 있는 숨은 숨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약해진 것은 몸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혹하는 것은 나지 산 숨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갓난아기도 누가 가르쳐 줌 없이(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더우면 스스로 땀을 내어 열을 발산시킬 줄을 알고, 추워지면 자면서도 몸을 웅크려 열의 발산을 막을 줄 압니다.
산 숨은 스스로 아는 것이고,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치고, 마음으로 생각해 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 길고 긴 진화의 과정을 걸어오는 동안에, 희생된 낱개는 허다합니다.
그렇지만 산 숨에는 밑진다는 법이 없습니다. 영원한 절대의 이김이 곧 산숨입니다. 장자(莊子)의 말에 도(道)를 아는 사람은 “날로 계산하면 부족이 있지만 해로 계산하면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는,道란 산숨의 스스로 하는 제길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 보여주듯이, 생각하는 사람이 제 잔꾀에 속아서, 안다는 것이 모름이 되고, 걱정하는 것이 속음이 되며, 잘됐다는 것이 못됨이 돼버립니다. 참 앎, 참 힘은 마음의 밑바닥에 있습니다. 그것은 낱개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식물을 냈고, 동물을 냈으며, 붕붕거리는 곤충과 지저귀는 새를 냈고, 억만 알을 바다의 가슴에 맡겨 키우는 물고기와, 골라낸 몇 개의 새끼를 제 뱃속, 가슴 속에서 키우는 젖먹이 동물을 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끝나지 않았던 찾음의 길도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근본 지혜, 근본 힘을 잊어버리고 작은 꾀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근본의 하나인 지혜를 가리우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날로는 남는 것이 있는데 해로는 턱없이 부족하게 됐습니다. 증거가 뭣입니까? 오늘의 세계 형편입니다. 나라마다 서로 단번에 인간을 멸종을 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만들기를 경쟁하니,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사실은 전쟁하겠단 말아닙니까? 서로 멸종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전쟁을 하여야겠다는 것은 웬 일입니까? 뭔가 크게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러면 무한한 발달, 행복을 약속하는 이 소위 문명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엇이 텁텁(野)보다 나은 번쩍(文)이며, 어디가 어 리석(蠻)보다 좋은 밝음(明)입니까? 옛날 사람들은, 이 문명인같이 이렇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의 역사도 그 맨첨의 기록은 평화롭고 인정 있었던 옛적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이 되지 않습니까? 노자(老子) 맹자(孟子)의 말대로 한번 그 근본을 돌이켜볼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 한 가지 크게 놀랄 일이 있습니다. 대낮에 환한 일인데, 학자, 지도자, 남을 못살게 하면서까지 제 고집만 하는 사람들이 뻔히 보면서도 모르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못살겠다고는 하면서 새끼는 자꾸 낳는 것입니다. 발달은 했다면서, 그 지식을 총동원해 엄청난 규모의 대량학살의 핵전쟁을 준비는 하면서, 전쟁준비를 할 뿐 아니라 한 밤중에, 밤중에 하다못해 대낮에 청천백일 하에 내놓고, 약품으로 수술 칼로 세상에 나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내일의 인류를 억억 만만으로 학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그것을 이루 다 죽일 수 없어서 이제 멀지 않아서 핵폭탄이 아니라 인구폭발이 일어나 다 망하고 말 것이라 비명을 올리고 있으니,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과학 기술과 폭력 정치의 위력으로 못 막는 이 적군은 왜 있는 것이며, 이 군대는 누가 지휘하는 것입니까? 이야말로 자작지얼(自作之率) 아닙니까? 이것은 산 숨 그 자체가 하는 복수 아닙니까? 제 꾀, 제 힘을 믿고, 저만 잘 살겠다는 앙큼한 문명의 반역자에 대한 전체 생명의 복수, 혹은 심판 아닙니까?
이제 부득이 각오를 하고라도 갈릴레오 모양으로 “그래도 진리는 복수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지”하고 다시 한번 부르짖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앎과 함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땅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제자들께, 곧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앎, 함은 자기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자기를 예수라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 했고.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듣고 본대로 할뿐이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반대하는 자들도 그에게는 권위가 있다 했습니다.
그가 그 말씀을 하실 때는 땅끝이 아마 이렇게 쉬이 올 줄은 생각 못하셨던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그란 지구에, 과학의 장난이 너무 일찍 나왔기 때문에, 땅끝이 너무 빨리 왔습니다. 자연대로 했던들 사람의 생각의 스케일은 크게 될 수 있었는데, 무대 뒤를 먼저 가본 개구쟁이가, 몇 평 밖에 아니 되는 무대에서 한 두 시간을 써서 길고긴 우주 역사의 뜻을 보여주자는 예술가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제깐에 까불어 대면서 왼통 망가쳐 놓는 모양으로, 이 문명은 제 지식 힘을 믿고 인간을 아주 작고 얕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만한 문명은 우주 개발로 그 싸움을 계속한다지만, 이 땅끝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초월, 비약은 그렇게 해서 될 것이 아닙니다. 인구 폭발로 운명적인 난관에 부딪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그 믿음과 겸손에 의하여 산숨의 계시를 받을 줄 아는 씨알의 지혜와 힘에 의해서만 될 것입니다.
씨알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산숨의 씨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험관을 보지 마시고 가슴 속을, 가슴 속 보다도 숨 속을 들여다보십시오.
씨알의 소리 1978. 9월 76호
저작집; 9- 223
전집; 8- 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