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라
마가복음 10:32~45
우리는 그 동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 주로 공부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말로 정리된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방법과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은 들려준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도신경을 정리해 보았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이 들려주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도덕, 또는 가치관과 철학 등의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최근 리차드 헤이스(Richard B. Hays)의 책을 읽으면서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윤리를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를 위한 가이드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작업을 마가복음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복음서 기자 마가는 교회 공동체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하여 어떤 지침을 제시하는지 읽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한 그 세상살이 지침을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다.
설교 개요
1.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세상살이 지침
2. 마가복음이 들려주는 세상살이 지침
① 하늘이 갈라지고 휘장이 열린다
② 때가 찼다
③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④ 진짜 힘과 고난의 가치를 알라
⑤ 예수님의 본심을 알라
3. 결론 – 십자가를 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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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세상살이 지침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라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권면했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교회가 한 마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이 활개친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분이며 그 후에도 빌립보 교회를 각별한 애정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실 바울의 그 권면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신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모든 편지와 모든 복음서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려고 쓴 것입니다. 그것을 읽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있게 도우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용기백배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제자들이 사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은 복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렇게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와 오늘날 그리스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등지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때때로 바울은 감옥에 갇혔고 그때마다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도 교회들에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들의 편지를 받은 교회들은 그것을 돌려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편지를 필사(筆寫)하여 다른 교회들에게도 보냈습니다. 그렇게 교회들에는 사도들의 편지가 널리 회람(回覽)되었습니다.
그 후에 사도들이 죽고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의 전도사역에 잠깐 동안 함께 했던 마가(Mark)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가복음이 처음으로 기록되고 그 후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이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성경에 의하면 마태복음이 가장 앞에 있지만 실은 마가복음이 마태복음보다는 먼저 기록되었고 복음서보다는 사도들의 편지가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했으며 직접 예수님을 보았지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습니다(벧전 1:8).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사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조하여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교회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배운 교훈이 복음서에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와 같은 서신서들이 기록된 목적이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권면하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복음서도 명백하게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기록된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기록은 당대와 후대를 위한 가이드와 교훈을 목적으로 합니다(롬 15:4).
초기교회의 신자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신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는데 그 나라가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완성될 것이며, 그 나라를 물려받을 주인공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본받으며 살아간다면 마침내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그 나라를 교회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세계를 새 창조라고 부르며(고후 5:17) 그 창조에 동참하는 대리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물론 교회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가르침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근본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인생 또는 한평생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한평생 살아가는 삶을 세상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살이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나그네와 같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고전 1:30).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의 세상살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도록 돕기 위한 지침이자 가이드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몇 주 동안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세상살이 가이드’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신약성경을 통해서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앎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알고 그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은 최초로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2. 마가복음이 들려주는 세상살이 지침
① 하늘이 갈라지고 휘장이 열린다
마가복음의 첫 문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부터 나옵니다. 마가복음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9~11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이 갈라짐으로부터(schizomenous < schizo:, to cleave, rend) 시작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는데 그때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이 갈라졌습니다(막 15:38, esche:the: < schizo:). 하늘이 갈라지고 성전 휘장이 갈라지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문을 열고 들어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임하시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이사야 63:17, 64:1~2
이사야서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마침내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음을 마가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조리한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왜곡된 세상을 바라보고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그 일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지난 1999년에 발표된 기독교 복음송 중에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부흥2000, 예수전도단, 고형원)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랫말에도 성령님이 땅을 흔들고 하늘을 가르고 임하시라는 간구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새천년을 앞두고 부흥을 갈망하던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여망(輿望, 많은 사람의 기대나 소망)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노래는 기독교회의 퇴조기를 감지한 많은 성도들의 애절한 기도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교회는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임하셨음을 확신했습니다.
초기교회는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하늘이 갈라지고 성전 휘장이 갈라지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강림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때 세상은 로마제국의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로마는 힘으로 지중해 연안과 중동의 여러 나라를 짓밟으면서 로마에 순응하면 로마가 주는 평화의 세상(Pax Romana, Roman Peace)이 온다고 미혹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이라는 이름으로 동아시아의 나라들을 침략하면서도 명분으로는 서양열강의 침략을 아시아가 공동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꾸며 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이 들려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는 낡고 병든 세상에 새롭고 건강한 생명이 터져 나오는 활기찬 기운이 있었습니다. 그 기운은 로마제국의 평화가 거짓임을 드러내고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의 자리에 있는 유대지도자들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낡은 가죽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로운 포도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로 볼 때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말은 이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또한 생명력을 잃은 지도자들의 위선에 박수치지 말고 오직 하늘을 가르고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도 새롭게 만드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이처럼 풍족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다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돌아보아야 한다는 과제를 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와 거짓 기쁨에 취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종교는 새 시대를 품을 수 있는 새 가죽부대입니까, 아니면 낡은 가죽부대처럼 새로운 정신을 품으려 할 시에는 터져버릴 수도 있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을 돌아보면 그는 어떤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마치 하늘이 갈라짐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역사의 한가운데 개입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 왕의 왕으로 높이셨으니 세상의 왕들이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엡 1:21, 빌 2:9). 특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신 교회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부어 주신 성령을 교회에도 부어 주셨으므로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갈 새로운 대리인임을 바울은 굳게 확신했습니다(엡 2:10, 3:10). 아니 이전 시대나 이전 행적은 다 지나가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기 시작했으며 이제 완전히 새롭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고후 5:17, 고전 7:31).
바울이 가졌던 그런 확신을 생각하면서 마가복음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하늘과 성전 휘장이 갈라지는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 역사의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새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이 낡은 세상을 새롭게 고칠 것이며, 그 역사로 말미암아 산이 진동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되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교회 신자들의 믿음과 기대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하늘을 가르고 내려와 일하기 시작하셨으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다(빌 2:13)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② 때가 찼다
마가는 예수님의 첫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때가 찼다는 말은 어떤 기간이 다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시편 2편에 있는 기도처럼,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고 군왕들과 관원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괴롭게 하는데,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철장으로 그들을 무찌르시고 그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시며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하나님을 즐겨 섬길 수 있게 하는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예수께서는 그 첫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그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파노라마처럼 연달아 소개합니다. 우선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그 순간(즉시, immediately)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의 위에 임하였습니다(1:10). 세례 후에는 즉시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12). 예수께서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8, 20).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마을에 가셔서 즉시 회당에 들어가셨고(21) 그곳에서 즉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하셨습니다(23).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셔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즉시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놓여 나게 하셨습니다(29, 30). 이웃 마을로 가는 길에 한 나병환자를 만나셨을 때 그를 만지고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실 때 즉시 그 나병이 떠나갔습니다(42).
이처럼 마가는 예수님이 오셔서 낡은 세상의 병폐를 치료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행동을 즉각적으로 하셨음을 연달아 보여줍니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즉시’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유쒸스(euthys)인데 그 의미는 즉각적으로(immediately)라는 뜻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먼 훗날에 올 세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오늘 여기서 우리도 악한 마귀 권세를 대적하고 치료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확신하며 그 기대 가운데 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전세는 역전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전에 실패하고 이전에 눌리고 이전에 좌절하고 살던 삶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승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이와 동일한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한복음 12:3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요한복음 16:11
성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 임금에게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즉각적으로 삶에서 결단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복된 생활을 경험한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찬송(찬송가 449장 1절)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그것은 ‘아! 예수님이 이미 이 세상 임금을 이기셨구나! 그것을 여러 행동으로 보여주셨구나! 그렇다면 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의 당당함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진실되게 살아가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③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독특한 일 중에 하나는 누가 예수님의 은총을 입고 그 나라에 동참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많이 입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은 성전에서 일하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고 자발적인 금식과 헌금생활을 성실히 하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인싸’(insider, 핵심측근)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그들은 마음 속으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2:7). 예수님이 당시의 ‘아싸들’(outsiders)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실 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속으로 정죄했습니다(2:16).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예수님께 당돌하게 따지기도 했습니다(2:18). 안식일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날 때 밀 이삭을 손으로 훑어 비벼 먹을 때에도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했습니다(2:24). 심지어 예수님의 치료 사역을 보고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려서 그런 이적을 행한다고 비꼬았습니다(3:22).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당시에 종교적으로 볼 때 ‘인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 당시에 종교적으로 볼 때 ‘아싸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나병에서 고침을 받기도 하고(1:40~45) 귀신에서 놓여나기도 했습니다(1:32~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깨끗함을 입기도 하고(5:25~34) 심지어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딸을 귀신에서 되찾았습니다(7:24~30).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본 로마의 백부장이었다고 마가는 소개합니다(15:39).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라는 노래를 부른 이들은 아이들이었으며(10:13~16) 이름 없는 여인이 유일하게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부어 장례를 준비했습니다(14:3~9). 이들은 모두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과는 멀리 떨어진 아웃사이더들(outsiders) 즉, ‘아싸’였습니다.
마가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과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대조됩니다. 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들과 세상에서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역전되는 일이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생겼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어쩌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섬김을 받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면 예수님의 친구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친구들은 바로 당시의 ‘아싸들’이며 그들이 거리를 두고 지내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은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고 자신을 내어주는 삶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④ 진짜 힘과 고난의 가치를 알라
마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힘을 가지고 남을 섬기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진짜 힘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입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마가는 소개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에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심지어 죽이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은 마가복음에서 어떻게 소개됩니까? 그들은 죄 없는 자를 죽이는 악당들(villains)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힘은 사실 군중이나 로마 황제들로부터 저당물로 받아 잠시 보관하고 있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정말 힘을 발휘해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야 할 때 그들은 비겁하게 행동하고 맙니다.
헤롯 왕은 헤로디아의 딸이 춤추는 것에 매료되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할 때 헤롯은 주저하고 맙니다. 사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예언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입으로 내뱉은 말을 자기 주변 사람들이 들었으므로 그들을 의식하여 헤롯 왕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비겁한 행동을 하고야 말았습니다(6:14~29).
로마의 총독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가 법정에 끌려왔을 때 심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그렇지만 군중들 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무리를 만족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빌라도는 살인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주었습니다(15:1~15).
이와 반대로 예수님이 힘없이 고난을 당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참되게 보여주었습니다. 마가는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신비하게 이루는 의미 있는 행동이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진짜 강한 힘이 무엇이며 고난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훗날 사도 베드로도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고난이 가지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2~13
동시에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힘과 특권을 누리고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영생의 길을 찾아 예수님께 왔던 부자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하며 돌아갔습니다(10:17~22).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님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효천 선교사님은 노년의 삶을 국내에서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필리핀 오지에 가셔서 원주민들을 위해 여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박밀알 선교사님 가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 자녀 다윗과 호산나를 선교지에서 양육했습니다. 최근에 아프간 사태가 심각했을 때는 두 자녀가 현지에 통역을 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국내에 올 때에는 거할 곳이 없어서 이리 저리 거처를 옮겨 다니며 난민 아닌 난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오늘도 아프간 난민들 사이에서 그들의 벗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8일 수요일 미국한인동산교회에서 우리 교회에 선교후원금 300달러를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한 구역이 3개월 동안 모아 보낸 후원금입니다. 2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이 사랑의 연대에 힘입어 우리도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선교사님들에게 특별선교후원금을 보내 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⑤ 예수님의 본심을 알라
마가복음을 읽노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마음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반복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많은 고난을 당하고 유대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으며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8:31~38).
그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고 잠잠하더니 누가 크냐고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어린 아이 하나를 앞세우시고 이런 아이 하나를 잘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인지 가르치셨고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9:31~37).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소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측근인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에게 당돌한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날에 그 형제를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부르셔서 이방인 권세자들처럼 남을 부리는 것이 진짜 힘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가 진짜 으뜸이 되는 자라고 한번 더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32~45).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는데 참으로 더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들도 그렇지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교회에 다닌 지 여러 해가 되었고 성경을 배울만큼 배웠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섬기는 일과 종이 되는 일이 어색하고 주목을 받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저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맹인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51
신약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한 신학자 리차드 헤이스는 말하기를, ‘마가복음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은 제자들의 더디 깨닫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예기치 않게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3. 결론 – 십자가를 지라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생활이라고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서 중에서 최초로 기록된 마가복음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마가는 교회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야기에는 직접적인 화법과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 속에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 상상을 통해서 이야기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이해합니다.
1. 누가는 먼저 예수님의 사역에서 처음과 마지막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전 휘장이 갈라졌다고 들려줍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첫 번째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새 일인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겠다는 결단과 희망으로 살아갑시다.
2. 마가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파노라마처럼 즉각적으로 잇달아서 보여줍니다. 세례와 제자를 부르심, 병자를 고치심, 귀신을 쫓아내심 이 모든 일들을 즉각적으로 실행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 권세를 가진 어둠의 권세를 단번에 물리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때 야고보 사도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악한 자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적하면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감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합시다.
3.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인싸’(중심인물)와 ‘아싸’(소외된 인물)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스스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인싸라고 여기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지 못하고, 아싸로 소외되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역사에서 주인공이 되어 은혜를 입고 고침을 받았으며 찬송하고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이로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섬김을 받는 인싸로 살기보다는 섬겨주고 낮은 자와 함께 하는 아싸로 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정한 인싸가 되는 길입니다.
4. 마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진짜 강한 사람은 남을 섬기고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권세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신의 양심과 소신도 지킬 수 없는 비굴한 사람이라고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고난에 동참하는 이들을 존경하고 우리도 복음을 위해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의 네 번째 자세입니다.
5. 마가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 매우 더딘 것을 봅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 세대에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일을 하면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냈건만 아직도 마음이 둔하고 완악한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겸손히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막 8:34).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1. 새 마음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새 시대를 살아갑시다.
2.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악한 자를 단호하게 대적합시다.
3. 섬기고 나누는 삶이 예수님의 ‘인싸’가 되는 길임을 기억합시다.
4.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합시다.
5.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