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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강 창세기 17:15~27 다 할례를 받았더라 57.49
26.09.29(화)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해서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히브리 말로 엘 샷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그랬죠. 전능자라는 의미인 동시에 충분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정도로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기에 하나님만 전능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죠.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더 이상 너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마라 이제부터 아브라함이라고 해라 그리고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이루게 해주겠다는 그 약속이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해주겠다.
그리고 이 가나안 당할 너와 너의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 즉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 그리고 내가 너뿐만 아니라 너와 너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러니까 언약도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시고 가나안 땅도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네 후손들의 영원한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그런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한때만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마치 식품점에 파는 음식 식료품처럼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두 영원한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할례를 받으라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 그 언약을 믿는다는 믿음을 표징을 몸에 새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표증이 공간 속에 있는 것이 무지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물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겠다. 그 언약의 표정이 무지개다.
그 무지개는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표정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시간 속에 나타난 표증이 안식일 신약시대의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를 위한 시간 속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죠.
우리는 그 언약을 믿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 주일날 주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을 내 개인의 몸속에 새기는 것이 할례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같은 신앙 공동체에 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그 언약의 표징을 개별적으로 내 몸에 새김으로 신약시대에는 내 심령에 새김으로 비로소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 할례를 받으라라고 명령하시는가 하나님과 그 관계가 형성됨으로 하나님께서 비로소 아브라함의 백그라운드가 되어 주심을 아브라함이 늘 의식하고 살아갈 수 있거든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까 너는 내 앞에서 행해서 완전해라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서 아브라함의 백그라운드가 되어 주신단 말이죠.
바로 그것을 믿는 표징을 네 몸에 새겨라 너와 나의 믿음의 관계를 이루어 가자 이런 의미셨죠.
15절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거기에 또 나왔습니다. 또 공표 한번 해 보십시다.
지금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랬던가요.
3절 보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부복했습니다.
그랬더니 3절에
아브라함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엎드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또 아브라함의 심령속에 흘러내렸습니다.
9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 앞에서 부복한 낮은 자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또 흘러내립니다.
15절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래서 우리가 지금 세 시간째 확인합니다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낮고 낮은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고이게 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법이다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분 누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사람만 인생을 허망하게 갉아먹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인생을 살다가 왜 끝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회합니까?
인생을 갉아 먹어서 그렇습니다.
인생은 절대 짧지 않습니다. 허망하게 갉아먹는 사람에게는 백년을 살아도 인생을 짧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 안에서 매일매일의 삶을 영원한 진리로 건져 올리는 사람에게는 인생은 충분히 깁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영원 속에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을 통해서 시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고 내 길에 빛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이 없으면 내 발은 엉뚱한 대로 갈 수밖에 없고 나는 바른 길을 찾지 못해서 내 인생은 미궁을 헤매다가 끝날 것입니다이 말이죠.
이 말씀은 제가 젊은 시절부터 잘 알던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이 말씀이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허락방탕한 삶을 살다가 36살이 되던 해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거든요. 제가 만난게 아니라 그분이 사로잡아 주신 것이죠.
그리고 29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올해 우리 나이로 65세로 제 인생을 되돌아보면 만약에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잡아 주시고 제 팔에 등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 길에 빛이 안 돼 주셨으면 그 이전에 36년 동안을 허망하게 다 흩날려 버린 것처럼 29년도 다. 산산조각 때 되었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푯대가 되어 주시고 내가 어디로 가야 될지 말씀으로 밝히 일깨워 주셨으니 이 말씀이 정말 맞는 말씀이고 이 말씀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말씀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우리가 낮은 심령을 지니느냐 지니지 않느냐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심령이 부복하기만 하면 내 곁에 와 계신 이 말씀은 내 심령 속으로 계속 스며드시는 것이죠.
15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이 본래 사래 아닙니까?
근데 이제 더 이상 사래라 하지 마라 앞으로 사라라 하라 사래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 샤르라는 말에서 파생이 된 건데 샤르라는 것은 지배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이름 사라라고 하는 말은 그 밑에 주 난에도 있지만 여주인 혹은 귀부인 또는 왕비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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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 수천 년 전에 중근동 지방에서 사래라는 이름의 뜻이 지배자라는 뜻인데 여자가 지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당시에 무슨 장관이 있습니까? 총리가 있습니까? 여자 대통령이 있습니까? 여자가 지배자 되는 경우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재산이 뭐라 그랬죠. 자식 아닙니까?
자식 많이 낳는 겁니다. 자식이 많아지고 그 자식들 배우자가 또 들어오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에게 많은 노비가 딸리면 여자는 지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래는 지금까지 아이 한 명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름 쓰지 말고 이제부터 귀부인 여주인 왕비라는 이름의 사라라 해라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았죠.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본래 존귀한 아버지 그런 뜻이라고 그랬죠. 고귀한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가 고귀한 아버지가 되려면 자식이 있어야 아버지가 되는 거 아니에요.
자식이 없으면 남자 여자가 결혼해서 평생 남편일 뿐이지 아버지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자기 정실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고 해라 그것은 여러 무리 많은 무리의 아버지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인생이 고귀해지고 존귀해지는 것은 절대로 너희들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타치해 주셔야됩니다
하나님이 타치해 주실 때만 인생은 영원히 존귀할 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존귀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존귀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절대로 정도를 걸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자기 스스로 자기를 존귀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수단으로 밖에 사용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때 세상에서 물질을 많이 가져서 높은 직위에 올라가서 존귀해지는 것 같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를 존귀하려고 하는 사람의 존귀는 결국은 무너집니다. 천박하게 끝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해 주셔야 세상으로부터 모함을 받아도 세상 사람들이 한때 오해해도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 복을 주어라는 말이 두 번이죠. 공표 한번 해 보십시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 사라에게 내가 복을 줄 것이다.
내가 복을 줄 것이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디 무슨 영감을 얻으셔서 외부에서 들어온 영감으로 인간을 만드신게 아니고 당신의 모습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 여자를 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게 뭡니까?
창세기 5장 1절 하반절에서 2절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직후에 가장 먼저 하신 것이 복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으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 속에 있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으로 살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아버지 되거든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면 좋은 어머니는 저절로 되는 겁니다.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대통령 되는 것이고 그런데 그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부터 시작되는가 하나님의 복 속에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신자반에서 배웠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고 간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복속에서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의 복 없이는 짐승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기복주의라고 그랬죠.
기복주의는 하나님보다도 복을 더 중요시하는 겁니다. 아이가 생일날 아빠가 선물을 사 오는데 선물을 주시면 아버지보다도 아이들은 대개 아빠의 선물을 더 중요시 하거든요.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지 않습니까? 기복주의는 우리가 배격하되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복속에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그것은 바른 믿음의 양상이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라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내용이 뭔가
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니라
지금까지 사라는 자기 태로 한 명의 아이도 낳지 못했지만은 그 태를 통해서 여러 민족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열왕들이 나올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렇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시는 이 내용이 이미 우리가 본 내용이죠. 누구하고 누구한테 약속하신 내용과 똑같습니까? 아브라함한테 주신 약속과 똑같습니다.
6절입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하셨던 복의 내용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약속하신 내용이 똑같습니다.
만약에 똑같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똑같지 않다면 문제가 생기죠. 똑같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으로 안 보시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를 두 개의 별개의 개체로 보시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 하나님께서는 부부를 두 몸으로 보시지 않고 한 몸으로 보신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한테 하신 약속의 내용과 사라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은 동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뭘 깨닫습니까?
남편과 아내는 동일한 신앙관을 지녀야 합니다.
같은 인생관을 지녀야 합니다. 같은 가치관을 지녀야 합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 그 부부를 한 몸으로 보시고 내가 너희들 몸을 통해서 여러 민족이 나오게 할게 너희들 태를 통해서 여러 왕이 나오게 할 거야 그것은 그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보시고 두 사람을 향한 약속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통해서 태어날 자식을 향한 약속이기도 하잖아요.
왜 이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여러 왕이 나온다면 그 여러 민족 여러 왕은 바로 자식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것은 곧 사라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하고 그것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하고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와 너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만 동일한 신앙과 인생관 가치관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식도 같은 신앙관을 지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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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의 가정입니다. 다 같이 믿긴 믿는데 신앙관도 인생관도 가치관도 다 달라서 세상에서 우리가 직업은 다 다를 수 있지만 가치관은 같을 수 있잖아요. 그죠.
같아야 될 가족들이 다 뿔뿔이 제각각 살아간다.
그러면 가족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 성경 첫 번째 책을 창세기라고 번역을 했는데 창조 만들 창자에 세상 세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신데 영원 창세기 2장이면 끝나버리지 않습니까
이 제목 잘못 붙은 것이죠. 창세기 3장부터는 창세기가 아닙니다. 창세기의 핵심이 뭐라 그랬죠. 참 가정기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만드시고 그 후예들이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 노아 가정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시고 그 후에 바벨탑을 만들고 또 타락할 때 아브라함 가정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게 하시고 가정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의 첫머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어떻게 세우시는가 한 사회가 건강하다 한 국가가 건강하다
세수가 많으면 나라가 건강해집니까?
그게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가정이 건강한 국가가 건강한 국가다. 왜 사회와 가정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가정이단 말이죠.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리 예산이 많은 나라라도 그것은 허약한 병든 나라이고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똑같은 언약의 내용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10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하나님께서 네 아내가 너한테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말을 하셨더니 아브라함이 속으로 엎드린 채 웃었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아이를 낳는다면 1년 후의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99세거든요. 그러면 아이를 낳는다면 내년이면 내년에 자기 백세입니다.
자기 아내와 자기는 10살 차이니까 내년이면 아내는 90세여요 그런데 아이를 낳는다 한다 웃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하기를
18절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이르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스마엘은 사래였죠. 그때는 이름이 사래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임의대로 이루기 위해서 자기 여종 하갈을 남편 씨받이로 넣어주고 남편도 동의해서 얻은 이를테면 서자지요.
그 서자를 86세에 얻었고 지금 아브라함이 99세니까 이스마엘 나이가 13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히브리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스마엘이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면 하나님이 늘 이스마엘 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꾸어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나 잘 돌보아 주시고 책임져 주시면 저는 정말 감사 하겠습니다.
자 지금 17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나 엘샷다이야 나 전능자야 충분자야 그러므로 너 내 앞을 행해 내가 너 백그라운드 되어줄게 이러고 시작하지 않습니까? 17장이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래아내 사래가 아이를 너한테 아들을 낳았을거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걸 속으로 그 말을 듣고 웃었단 말이죠.
그리고 이스마엘이나 좀 잘 키워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게 뭔가 앞뒤가 잘 안 맞는 거 같습니다. 생뚱한 반응 같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잘 들여다보면 지금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13살된 이스마엘을 놓고 그 이스마엘을 통해서 자기 인생 남은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을 설계하고 있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99세 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 전능자야 충분자야 아브라함을 그리고 너 이름을 앞으로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고 해 너를 통해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많은 왕들이 나올 거야
그리고 내가 너하고 세우는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야 너와 나와 너 후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너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줄 것이다
그 말을 아브라함은 누구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지금 받아들이겠습니까? 이스마엘을 위한 약속으로 지금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 눈앞에 있는 아들은 이 아들 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어떤 그 이스마엘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여종의 피를 이어받아서 자기하고는 무관하니까 남의 자식과 마찬가지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들이거든요. 자기 핏줄이거든요. 그 아들이 나중에
장성해서 광야에서 활 쏘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사냥꾼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한 소년이었죠.
13살 정도 되면 그 체격이 커졌을 텐데 그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아버지가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 되어줄게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줄께 네 후손을 통해서 여러 민족이 나올것이야 이스마엘이지요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게 하나님께서 너 정실 사래가 나한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그랬더니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 마음속에서 점점 굳혀가는 자기 확신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심정 속에서 일치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하나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살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의 심정을 풀이하면 이런 것이죠.
하나님 제가 내년이면 백세인것 하나님 모르십니까?
제 처는 내년이면 90세입니다. 제 처는 지금 생리도 끊어진 것 모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13년 전에 저한테 아들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마엘 이렇게 잘 크고 있습니다. 주님 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계속 보살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당신을 계시하셨으니까? 믿는 거지요.
믿는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기 생각 속에 가두어두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이건 해결 못 할 거야
그러니까 요즘 주일에 우리가 사도행전 통해서 아테네에서 바울이 복음 전한 그 상황과 연결시켜서 보면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자기 생각이 만들어낸 하나님의 우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19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아니라 네 아들 네 아내 사라가 내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
30:00
여기에서 우리말 아니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리는 진실로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아 그것 아니야 내가 말하는 전능함이란 그런 거 아니야
네 생각하고 내 생각은 달라 내가 말하는 전능함이란
네 생리가 끊어진 아내 내년이면 100세대는 너 노년인 너 너희 부부를 통해서 아들이 태어나게 하는 거예요.
내가 진실로 나한테 이건기한 것이다 너 이건 믿어야 돼 20절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그 아들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이것을 이스마엘을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 그저 명사들을 집합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받아들여서 직역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해서는 내가 너의 말을 들었나니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록 실수해서 씨 받이를 통해서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자식은 얻었지만
자기 피붙이를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다 들으시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 안다 네 마음 다 안다.
그래서 내가 너희 아들들도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그 아들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해줄 것이다.
그러면 사라가 날 아들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19절 보십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네 아내가 낳는 아이 이름은 아이를 낳으면 이삭이라고 해라
이 히브리말로 잇스하크입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네 아내가 아들을 낳으리라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엎드려서 속으로 웃지 않았습니까?
그 웃었다는 동사가 히브리말로 사아크입니다. 그 명사가 있스하크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웃었던 것은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종의 비웃음이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낳으면 잇스하크 웃음이라고 해라 정말 네 인생이 그 아들로 인해서 행복의 웃음을 짓게 될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비웃음을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이시죠. 그런데 그 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고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신다면 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가 뭐가 있겠는가
21절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여기 우리 21절에 우리 한글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습니다마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러나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내가 크게 해주겠지만 그러나 내 언약의 대상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육적 아들과 언약의 아들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 영원한 기업 영원한 하나님 그 약속은 바로 이삭을 통해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식을 키우는데 우리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식들이 육적 번성만을 누리는 자식이 되게 할 것인가 언약의 자식이 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부모들도 대게 자식을 키울 때는 육적 아들로 키웁니다 이 세상에서 육적 아들로 커서 아무리 많은 것을 누려도 세상의 것은 코 끝에 호흡이 멎는 순간에 책임 못 져 주지 않습니까?
언약의 자식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을 백그라운드 삼는 것 아닙니까?
그 영원한 백그라운드는 이 땅에서 살았을뿐만 아니라 죽음 너머에까지 백그라운드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믿음의 부모라면 그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 여기에서 15절에서부터 21절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이 반응을 보이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짧은 단락 속에서 우리가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 번째 교훈은 질문하는 사람만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질문이 진지한만큼만 진지한 답을 얻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도 질문이 없다. 그러면 답이 없다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질문하는데 불신하기 위해서 질문하는 질문이죠. 그건 믿음이 아닌 거죠.
내가 더 잘 믿기 위해서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브라함은 영원한 기업 영원한 언약 영원한 하나님 전부 이스마엘과 관련해서 지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때 만약에 아브라함이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1년 후에 이삭이 태어나도 먼저 태어난 이스마
엘이나 이삭이나 차이가 없이 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질문했기 때문에 생리가 끊어진 내 아내의 태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 태어날 수 있고 하나님의 언약은 그 아들을 통해서 이어져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묵상하고 질문한다는 것은 첫째 생각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읽으면서 질문이 있는 것을 언제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읽다가 답을 얻을 수도 있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다가 답을 얻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신문을 보다가 때로는 드라마를 보는 대사 속에서도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답을 얻어 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심비에 새겨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내 신앙은 감정에 좌지우지됩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질문하고 얻은 답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은 모두 내 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됩니다
제가 이제 책에도 밝혔습니다마는 제가 신학교 가기 전에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믿으면 안다는 거예요.
저는 20대 청년으로 30대 초를 지나면서 제 실존 속에서 이 답을 알아야 되겠는데 아무도 답은 안 주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 속에 있던 모든 질문들의 답이 여기 다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게 새 신자반입니다. 그게 성숙자반입니다. 그게 사명자반입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면서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얻을 수 없었을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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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6절에서 21절까지 한번 제가 읽어 볼게요.
내가 내가 공표하십시다.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공표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공표
그와 내 언약을 세우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공표
내 말을 들었나니 내가 공표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공표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공표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한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라는 주어가 몇 번 나옵니까? 다섯 번 나옵니까? 7번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먼저 약속을 드리는게 아닙니다.
약속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뭔가 그 언약을 믿는다면 철저한 믿음과 순종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 듣는다는 것은 참 말 잘 듣는다는 것은 청력이 좋다는 말이 아니고 잘 순종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 제물보다 낫다.
왜 순종이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걸 아는 사람 믿는 사람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 가지 더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16절에
내가 그에게 그의 그는 사라지요.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복을 준다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것 아까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본래 사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이루기 위해서 남편한테 씨받이를 준 사람도 사라고 그 씨받이었던 자기 여종 하갈이 임신한 것을 보니까 질투심을 느껴서 쫓아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복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복을 주시는데 이 복을 준다는이 단어가 히브리어 원형의 원문에 PL 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PL 형이라는 것을 우리 문법적인 용어로 번역하면 강의형이라는 겁니다.
강할 강 자에 뜻의자 말하자면 강조형이다 이 말입니다 당신의 의지 당신의 뜻을 강조하는 문법적인 형태 그래서 이 히브리 말을 그대로 한국말로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사라에게 기필코 복을 주어서 그 복의 상태가 기필코 유지되게 하고 살아 인생 속에서 그 복이 기필코
결실되게 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지금 사라는 그럴 만한 자격을 못 갖추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면 그 사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움 받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믿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더러운 죄인 인간을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로 버리시겠습니까?
형편없는 인간들이지만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저들을 죄를 씻어 주시고 내가 내 은혜로 함께 하면 저들이 바로 설 수 있다는 하나님의 믿음이 구원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뭡니까?
그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믿음에 대한 응답일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믿어 주시기에 그 믿음의 주님 저도 당신을 믿습니다. 순종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가?
22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공표하십시다
이 날에 공표하십시다.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다.
포피를 배었다. 공표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형편없는 존재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를 먼저 선택해 주시고 그들을 믿어 주시고 내가 너를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내가 세워지고 거기에서 태어나는 아들을 참 웃음 이스하크가 되게 하고 그들과 내 언약을 영원히 세우겠다라고 하나님께서 믿음을 공표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가?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 즉각 뭘 했다고요. 포피를 베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게 뭡니까?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잖아요. 그랬더니 그 즉각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24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공표하십시다. 99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 포피를 벤 때 또 공표
13세였더라 그날의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할례 받았다 공표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공표하시고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다. 할례를 받았다 공표하십시다.
포피를 베었다. 할례받았다 똑같은 말이죠.
포피를 베었다는 말 3번을 되풀이해서 썼고 할례받았다는 말을 두 번을 되풀이했습니다.
다섯 번을 할례 받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부부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에 믿음으로 확실하게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자기 몸 살에 표징으로 새기는 것입니다. 자기 심비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안에 생리가 끊어져도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충분자이심을 이 순간부터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게 자기 인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이후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를 통해서 아들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마는 아내 사라가 본인이 아직 못 믿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사라에게는 어떻게 믿게 해 주셨는가 그건 다음 시간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을 믿게 되기까지 아브라함이 노력했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할례 역시도 하나님의 언약을 내 몸속에 새기는 행위이지만 그 할례도 무슨 결과입니까?
그 할례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 할례 역시도 하나님 은혜의 표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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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엘삿다이도 알지 못하던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은혜 베풀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다 알고 바울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로 이 할례가 지금 신약시대에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지난 시간에 세례라고 그랬습니다.
바로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내 심비의 새기고 그 말씀에 나를 드리는 공개적인 예식이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후서를 공부할 때 배웠습니다마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절 2절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지금 이게 어떤 장면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세에 의해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출애굽해서 지금 이제 그 시내 광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가리켜서 모세가 우리 조상들이 모두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바다에서 여러분 성경 출애굽기 아무리 봐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세워 놓고 세례 선서한 적이 있습니까?
머리에 물 뿌리거나 아니면 바다 속에 푹 잠겼다 나와라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세례 예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네는 도해 사건 자체를 세례라고 규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해 사건 자체가 세례의 의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고 구현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는데 애집트는 뭐에 상징입니까? 죄 어둠 육적 삶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할 때 가로막혀 있던 홍해 바다가 쫙 열렸습니다. 그래서 애집트에서 그 죽음과 어둠의 땅에서 벗어나서 시내 광야로 건너갔죠.
그리고 갈라진 바다가 그대로 갈라져 있었는가 만약에 그대로 갈라져 있다면 애집트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대로 열려 있는 겁니다.
건너자 마자 바다가 다시 합쳐졌습니다.
길이 없어졌습니다. 다시는 애집트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어디로 향하는 길만 남았는가?
가나안땅 하나님의 언약을 향해 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세례라는 것입니다.
어둠의 땅 죄악의 땅 육적의 삶을 살던 그 옛 삶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길을 가는데 되돌아가는 길은 없다.
왜 예전의 나는 그리스도에서 못 박히신 주님과 더불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간다. 가나안만 향해서 나아간다.
그게 바울이 그 홍해를 세례라고 규정한 것은 위대한 영적 통찰력이었죠. 아브라함 지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는 육적인 삶 자기를 의지하던 삶 그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언약에만 이제 내 자신을 내어드리겠습니다라는 표징이었지만 또 한 가지 의미가 더 있잖아요.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을 믿긴 믿지만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각 속에 가두어두는 하나님의 우상을 섬기는 신앙 차원이었거든요. 이걸 깨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우상 만들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내 생각을 깨겠습니다.
내 아내를 통해서는 절대로 아들이 주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을 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만 믿고 나아가겠습니다.
그것이 할례였다는 의미에서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 할례는 홍해 도해 사건과 같았던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지금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갇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우상을 만들고 붙잡고 있던 애집트의 삶을 버리십시다.
그리고 이제 홍해를 건너가십시다.
옛 삶은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막혔습니다. 우리에게 있다면 오직 가나안 땅 언약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세례의 삶만이 남아 있을뿐입니다.
그때 우리의 백그라운드 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이 시대 역사 속에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브라함 사라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해 주셔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믿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에 아브라함이 응답하고 할례를 받음으로 그는 명실공히 엘 샷다이 전능자이시자 충분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하나님을 자기 스스로 좌지우지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빽 그라운드 삼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주님 오늘이 밤이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홍해를 건너는 도해의 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미적거리던 내 삶을 미련 없이 버려 버리게 하시고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앞에 활짝 열어두신 언약의 땅을 향해 나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온전히 죽어지게 도와주셔서 옛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우리의 삶은 오직 가나안만을 향하는 말씀이 육신을 입는 삶이 되게 해 주시고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시대의 역사 속에 이루어지게 해 주시고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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