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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36
3월16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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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구세주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보통 큰 경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고향마을 사람들! 예수님께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 정겨웠던 사람들, 꿈과 추억을 만들어준 따뜻한 이웃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 예수님께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계셨던 사람들이었기에, 그 어떤 사람들에 앞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하고 싶으셨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대상자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경한 사람으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즉결심판에 처하려고 합니다. 일정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습니다.
죽입시다! 옳소! 하는 식의 인민재판식으로, 다수의 폭력으로 예수님 한 사람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구사일생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셔서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단죄하는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십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다보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고향마을을 등지십니다.
이제 고향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비록 동향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복음의 수혜자가 됩니다.
세례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수도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많다고 해서, 성당 가까이에 산다고 해서, 단체장을 맡는다고 해서 절대로 신앙의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가려는 매일의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가 몸담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지 진지하게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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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충고를 들을 때 화가 난다면 나의 확신에 교만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망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그의 불같은 성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만, 어찌나 화를 잘 내는지 자기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려도 미움과 분노가 충천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과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도 참모들의 말을 무시하고 주력부대를 빼돌려 러시아를 침공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일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러시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크기와 날씨 탓에 히틀러의 군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긴박한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한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러시아로 향하는 기갑 사단을 만 쪽으로 돌렸다면 상륙을 저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충고를 할 때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암울할 뿐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나병이 치유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사람이었는데 거의 자신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이스라엘로 나병의 치유를 위해 내려옵니다. 이때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도착했을 때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합니다. 미국 국방성 장관이 한 시골 본당 신부를 찾아왔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냇가에 가서 목욕이나 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무시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화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들어 높인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이때 부하들이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설득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누그러져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고 그 덕분으로 나병이 치유됩니다. 나아만은 화를 이기고 자신의 의견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나아만과 사렙타 과부의 사례를 그 예로 들었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절벽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이 만약 화가 난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이 교만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간을 이식해주려면 간과 붙어있는 쓸개도 함께 잘라내야 합니다. 간만 따로 잘라서 이식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기술상으로는 간에 붙어있는 쓸개를 분리하고 자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나 확신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믿음 안에는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얽힌 것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바꾸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 때 자주 쓰는 방법이 ‘화’라는 감정입니다. 화를 내어서 분명 자신에게 화가 나니 자기 생각이 옳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화를 자신의 확신을 바꿀 수 없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천지에 빠진 이들이 왜 신천지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일까요? 사실 교리는 허접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몇 달 동안 친구들과는 다 끊어지고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 주위에서 자신을 따듯하게 맞아준 신천지 신도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만이 아니라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그것을 잃기 싫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이 몇 달, 몇 년 동안 확신을 두고 믿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 믿음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이 바보였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창피해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을 바꾸라고 충고하면 성을 내며 그 핑계로 절대 믿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을 바꾸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만약 나에게 무언가를 충고할 때 화가 올라온다면 이는 분명 암세포가 섞인 오염된 확신입니다. 분명 그 확신과 나의 교만이 함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확신은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교만에 의해 생긴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일 확률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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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고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 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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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믿음의 점진적인 발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아 갑니다. 생명수와 진실한 예배에 관한 대화는 여인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합니다.
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을 통하여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알고 고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믿음의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죄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믿음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확고한 믿음에 다다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해해 갑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또 믿음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들이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이에게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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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4ㄴ-27)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분입니다.(루카 22,27) 따라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안 믿던 이방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느냐?”라고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받는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특권의식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즉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마태 5,45) 그러나 그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은총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선택이 유대인들에서 이방인들로 넘어간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중에 취소하실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지위를 잃은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택을 취소하신 일이 아니라, 유대인들 자신들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아서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28-29)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또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사업은, 또는 우리가 구원받는 일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닌”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이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도 불신을 고집하지 않으면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대가 본래의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래와 달리 참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다면, 본래의 그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로마 11,17-24)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이 말은, 그리스도교 전체 교회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고, 각 개인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의 자리를 그리스도교가 차지하긴 했지만, 제대로 살지 않으면 유대교처럼 잘려 나갈 수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끝까지 충실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가지라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즉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면서 구원과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질” 것입니다.(요한 15,6)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과 생명을 자동적으로 보장받지 못합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8-30)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이 특권의식과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잘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충실하게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더욱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쪽으로 가지 않고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라는 말은, 그들을 ‘버려두고’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셨다는 뜻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과 구세주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으려고 애쓰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지만, 양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등지고 떠나버리면, 목자도 그 양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내리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 말씀들을 듣지 않고 세속의 헛된 소음들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나자렛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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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편견과 소문>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어느 해 아버지의 병이 발견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부터 고향 마을에는 아버지와 나에 대한 특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천주교 신부가 되기 위해 가족을 뒤로하고 신학교에 갔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이다. 당시 고향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도 많았고, 무속의 영향력이 컸다고는 하지만 그 소문을 전해 들으면서 마음이 무척 착잡했다.
특히 장남인 내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기에 본의 아니게 가족을 비롯해 특히 아버지께는 한동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복음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한테서 외면당하는 장면이다. 그들의 몰이해로 예수님이 이방인 지역에 가서 활동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설픈 편견 때문에 스스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편견은 사람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생각하는 것, 마음에 드는 것만 보게 한다.
인간은 수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과거의 특정 모습이 계속 고착될 수도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고, 사실 늘 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러기에 만일 누군가가 편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예전 잣대로 그 사람을 재는 것과 같고 그한테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부정하는 자세와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예전 잣대로 재는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미 지난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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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말씀이신 예수>
말씀이신(요한1,1) 예수님,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저희들이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시리아 장군 나아만처럼 말씀인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희의 가슴을 열어주소서.
저희들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믿고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당신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들입니다(갈라3,2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저희를 당신의 몸인 신비체의 지체(1코린 12,27)라고 가르칩니다. 당연히 당신의 말씀이 저희들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요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당신 자신이 바로 말씀(요한1,1)이심으로 당신이야 말로 저희들의 삶의 길잡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당신은 지금 고향 나자렛 사람들을 한탄하셨듯이 오늘 저희들을 한탄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저희들이 당신 몸의 지체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말씀보다 나의 주장과 고집을 내세우고, 당신의 뜻보다 나의 욕망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사렙다 마을의 과부도, 시리아 장군 나아만도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히브4,12)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한 그들은 이방인이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편,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당신과 동향인 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말씀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말씀이신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말씀이신 당신께 순종하는 삶으로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시리아 장군 나아만처럼 구원받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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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작은 것이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그것이 태평양 넘어 아시아에 태풍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는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일들로 커다란 변화를 겪기도 했습니다. 보건과 위생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달랐던 중세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에 의한 전염병은 커다란 재앙이었습니다. 전염병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은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교회의 권위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작은 세균이 인류의 사상과 문화를 바꾸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의학이 발달하면서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전염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던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였고, 인간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신분과 계층으로 이루어지던 사회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사회로 변하였습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농촌 중심의 사회는 도시 중심의 사회로 변하였습니다. 세균보다 훨씬 작은 바이러스가 과학이 발전한 21세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교통수단의 발달,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와 사상이 만들어 놓은 성벽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생태계와 인류의 역사에만 나비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도 나비효과가 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전쟁터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었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많은 사람의 칭송도 나병환자인 나아만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몸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아만 앞에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작은 소녀가 나타났습니다. 소녀는 나아만을 엘리사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엘리사는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의심하였지만 부하들의 말을 듣고 몸을 씻었습니다. 나아만의 몸은 깨끗해졌습니다.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나아만이 소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아만이 소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전쟁에서는 승리자였을지 모르지만 고통과 좌절 속에서 인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의 호숫가에서도 작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 잡던 어부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는 찻잔 속의 태풍인줄 알았습니다. 로마의 권위와 힘이 태풍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득권과 권위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바람은 멈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바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희생의 바람, 겸손의 바람, 사랑의 바람, 희망의 바람은 이기심과 욕망, 교만과 시기심으로 이루어진 바벨탑을 무너트렸습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강물이 나아만을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치유된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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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무도 그분을>
루카 4,24ㄴ-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도착하시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무도 그분을>
아무도
그분을 선택할 수 없고
다만 그분께 응답할 수 있을 뿐
그분은 주님이시니까
아무도
그분을 독점할 수 없고
다만 그분에게 안길 수 있을 뿐
그분은 사랑이시니까
아무도
그분을 가둘 수 없고
다만 그분께 내어드릴 수 있을 뿐
그분은 모두이시니까
아무도
그분을 조작할 수 없고
다만 그분을 따를 수 있을 뿐
그분은 창조이시니까
아무도
그분을 거역할 수 없고
다만 그분을 품을 수 있을 뿐
그분은 진리이시니까
아무도
그분을 내몰 수 없고
다만 그분을 보내드릴 수 있을 뿐
그분은 자유이시니까
아무도
그분을 막을 수 없고
다만 그분께 한가운데를 열어야 할 뿐
그분은 길이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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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1960년. 살면서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 없고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살던 50대의 한 남자가 아르헨티나의 버스 정류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계가 집중하는 가운데 이 남자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가 붙잡힌 이유는 2차 세계대전 때에 유대인을 실어 나르던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운영, 관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샤워형 가스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로 인해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그는 그 죽음의 책임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대 앞에서 말했습니다.
“제가 살인이라도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남을 해치는 것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맡은 일을 잘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라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한 명의 인간이자 관리였을 뿐입니다. 양심의 가책도 전혀 없습니다. 월급을 받으면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행동의 무능.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고향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찾으셨으나,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는 편견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이에 그분은 “사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시면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리하여 생각나는 구약의 말씀이 바로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즉,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외면할 때, 주님께서 보살피시는 손길은 유다인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나병이 걸린 이방인의 장군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따릅니다.
이방인의 장군으로써 작고 지저분해 보이는 요르단 강에 가서 씻는 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편견을 버리고 엘리사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자 그는 거짓말처럼 낫게 됩니다.
이 말씀은 곧 다른 이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이유는 보이는 것만 보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주 작은 고장 출신의 목수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편견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심리학 학자들이 두 명의 학생을 한 명의 교사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한 명의 학생은 지적수준이 굉장히 높게 측정된 재능 있는 학생이니 잘 가르쳐 보라고 말했고, 또 다른 한 명의 학생은 학습 부진에 빠져있지만 어떻게든 잘 이끌고 가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후 테스트가 시행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인지 재능이 있다고 평가된 학생은 높은 점수를, 학습부진이라고 평가된 학생은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교사의 평가 역시 상반되었습니다. 학생평가서에는 전자의 학생은 독창적이고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는 반면, 후자의 학생은 교과과정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해 주제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질문만 한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실 교사에게 맡겨지기 전 두 학생의 지적 수준은 차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동일한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똑같은 수준의 질문이 교사에게는 한쪽은 ‘창의적인 질문’으로, 다른 한쪽은 ‘어리석은 질문’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인간의 편견이 “무능의 죄”를 낫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사가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후자의 학생을 배려하고 그가 왜 학습이 부진한지 살펴보며 오히려 그를 이해하려 애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 부르는지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발적 무능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 앞에서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나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여기서 하느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신학적 지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의 동화, 사랑의 실천입니다. 아이가 예절 교육을 받아도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하느님의 말씀 또한 그러합니다.
머리로만 하느님을 알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이는 결국 기도와 사랑에 무능한 자가 되어 결국 예수님의 도움과 은총에도 아무런 감화가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혹시 내가 하느님의 말씀에 다소 무능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강론을 쓰는 저 역시도 많이 부끄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하느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저 역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듯 예수님이 제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기 전에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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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루의 시작과 끝…>
대형 교통사고를 겪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자신의 두 발로 병실을 나서기까지 1년이란 세월이 걸렸고, 그간 겪었던 고통은 이루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되새길수록 자매님에게 일어난 일은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구겨진 차 속에서 목숨을 건졌고, 다들 가망이 없다고들 했었는데, 자신은 자신의 두 발로 퇴원을 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매님은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어떤 큰 힘이 자신을 늘 떠 바치고 있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답니다. 물론 자매님은 항상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어떤 힘이 ‘예수님이셨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큰 사고를 당한 후에 자매님의 몸과 마음은 조금 불편했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든 일을 하느님 먼저….”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몸의 회복과 동시에 마음의 회복도 완전히 되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과 너무도 가까이 살았기에 자신들 사이에 이미 와 계셨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자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라는 선물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까이 와 계시고, 또 말씀을 해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고향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 24장 13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슬퍼하면서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동행하신 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들려줄 때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비로소 빵을 떼어줄 때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몸과 마음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나자렛 고향 사람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혹시 고운님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순간순간마다 화가 나 있고, 슬픔에 빠진 것은 아닙니까?
이제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의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본당에 주일 저녁 미사는 청년들이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마침 그 청년 미사 중에, 주님의 기도를 손을 들고 손뼉 치면서 노래를 하는데 한 형제가 손뼉을 치지 않고서는 자기 뺨을 때리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 형제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바라보면서 슬그머니 옆자리를 피합니다.
그런데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그 형제가 손뼉을 칠 때 뺨을 때렸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뿔쌰, 자기 뺨을 치던 그 형제는 한쪽 팔이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미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 은총을 깨닫는 것, 거기에서 감사가 출발합니다.
특히, 작은 일에 감사하십시오. 오늘 눈을 뜨고 살았구나!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즉, “원수는 물에 새겨 흘려보내서 잊어버리고, 은혜는 돌에 새겨 오랫동안 감사하며 기억하라.”라는 것입니다.
저 두레박도 ‘모든 일에 하느님이 먼저….’라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루를 “모든 일에 하느님 먼저….”로 시작하고, 감사 기도로 마무리하는 몸과 마음이 회복된 마음으로, 주님께 자비를 청하고 자비를 입을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한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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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38)
♧♧ 시편 78편 1절…
"내 백성아, 나의 가르침을 들어라. 내 입이 하는 말에 너희 귀를 기울여라."
아삽은 스스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시작합니다.‘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말 대신에 ‘내 백성’ ‘나의 가르침’으로 말하고 있음은 아삽이 예언자적 입장에서 자기를 보내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말하여 가르침을 베풀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이사야서 51장 4절. 참조) 훗날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의 복음’을 ‘내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말했는데(로마서 2장 16절. 참조), 이것도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가 복음에 대한 중인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시편 78편 2절…
"내가 입을 열어 격언을, 예로부터 내려오는 금언들을 말하리라."
* 내가 입을 열어 격언을...
‘격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솰’은 ‘우화’ 혹은 ‘잠언’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편 78편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통한 현재의 사건들의 조명 내지는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 예로부터 내려오는 금언들을 말하리라...
‘금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다.’는 ‘수수께끼’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판관기 14장 12절. 참조), 또한 보관해야 할 가치가 있는 ‘감동적인 기록들’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감동적인 기록들’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다음으로 ‘말하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라는 말은 ‘풍성하게 말하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결국 하느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베풀어주신 기적과 업적들의 의미를 풀어 풍성하게 말함으로써, 이 기적과 업적들의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영원한 경고와 가르침이 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 시편 78편 3절…
우리가 들어서 아는 것을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을.'
이는 아삽이 백성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삽이 만들어낸 허무 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분명한 사실성에 입각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신약 시대에 사도 요한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와 같은 말을 한 바 있습니다.(요한 1서 1장 1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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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방송에서 표정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한 전문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표정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판단이 무조건 맞을까요? 만약 그 확률이 100%가 되지 않는다면 표정을 통해 판단하는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백인 사복경찰 4명이 잠복을 하던 중에 ‘기니’에서 이주해 온 22세 흑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청년은 전혀 죄가 없었고 어떤 혐의도 없었습니다. 단지 백인 사복경찰 4명을 보고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는 것, 또 그 4명을 강도로 생각해서 자신의 지갑을 꺼내주려다가 총에 맞은 것입니다. 백인 사복경찰은 자신들을 보고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용의자로 생각했던 것이고, 지갑 꺼내는 것을 총 꺼내는 것으로 오인해서 총을 쏜 것이었습니다. 판단의 오류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겉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의 의중을 알 수 있다는 것 역시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판단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블링크’의 저자이자 사회 심리학자인 글래드 웰은 말합니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정말 취약해진다.” 예수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편견도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그릇된 확신을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주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랐다가 나중에는 격렬한 분노를 느낍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뜨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별로 특별하지도 비범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을 보면서 질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그마한 우리 머리를 뛰어넘는 주님의 일에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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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편집>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것으로, 시청자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문맥을 빼버리고 때로는 표정만을 삽입하는 편집을 해서 방송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분명히 본인이 했던 말과 행동이지만 편집을 통해 전혀 다른 의도로 비칩니다. 2012년 미국 플로리다 주의 조지 짐머먼 사건이 크게 주목된 적이 있습니다. 동네 자경단 소속인 짐머먼은 마을을 수상하게 걸어 다니는 흑인 트레이먼 마틴을 보고는 911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후 짐머먼은 총으로 마틴을 쏘아 사망하게 합니다. 이를 정당방위인지 인종차별인지에 대한 것을 봐야 할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한 방송사에서 911의 통화 내용이 공개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짐머먼이 911 응답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 친구가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흑인처럼 보여요.”
사람들은 짐머먼이 인종차별주의자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짐머먼의 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911 응답원의 질문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친구 백인이에요? 흑인이에요? 아니면 히스패닉이에요?” 이렇게 질문을 받았기에 “흑인처럼 보여요.”라고 답변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판단은 주님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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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무지의 치유>
-참 사람이 됩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올해 사순시기가 참 각별히 생각됩니다. 인류의 무지와 탐욕, 교만을 경각警覺케 하는 하느님의 충격적 교육같습니다. 회개하여 겸손을 회복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의 물결’을 바꿔놓은 질병들이라는 신문 말마디와 더불어 새벽에 받아 본 어느 자매의 메시지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사순절 특별 보너스로 알아 절제, 보속, 희생 등 많은 것을 성찰했습니다. 한달동안 나가지 않고 기도, 기억 봉헌드립니다.”-
참으로 미증유의 천재지변 같은 사태로 잃은 것도 참 크지만 영적으로 얻은 것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관상觀想이 결핍된 외부지향적 활동活動만의 삶을 살다가 종파를 초월해 전국민이 잠시 멈추어 ‘은둔적隱遁的 삶’을 체험함으로 내적으로, 영적으로 삶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회개와 겸손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하느님께서 무지와 탐욕, 교만에 빠지 전세계인에게 주신 사순시기 특별 피정기간같기도 합니다. 이런 코로나 사태가 아니라도 1년 몇날 동안만이라도 전국민이, 아니 전세계인이 잠시 멈추어 활동을 최소화하면서 내적으로 깊이 성찰하는 영적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상상도 해 봤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새삼, 인간 무지로 인한 탐욕, 교만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닫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회개와 겸손으로 치유되는 무지의 병이요, 이는 평생과정의 공부에 속합니다. 어제 읽은 예화도 새삼스런 깨우침이었습니다.
-“폴란드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체스와프 미워시(1911-2004)가 어느 날 오후 오리들이 바로 곁에서 흐르고 있는 맑은 개울물을 놔두고 흙탕물 속에서 목욕하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늙은 소작농에게 오리들이 맑은 개울물을 왜 무시하는 것인지 물어 보자 그 노인이 대답했다. ‘몰라서 그렇죠’”-
인간의 무지를 빗댄 기막힌 일화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되는 데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래서 성경말씀을 통한 부단한 하느님 공부, 참 사람되는 공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참으로 현명한 두분,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엘리사 예언자를 만납니다. 더불어 주님을 만나 영육의 병이 치유된 참 멋있는 인물 나아만과 더불어 예수님 고향의 무지無知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 이 또한 무지의 산물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봅니다.
참으로 매력적인 이방인 나아만입니다. 하느님은 차별없이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고, 주님께서는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는데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다 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은 정말 나아만에게 전화위복의 복된 병이었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땅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를 다리로 하여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게 했고 참으로 평범한 요르단강에 몸을 담글 것을 명령받습니다.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는 하느님의 교육 과정이 참 신선합니다.
마침내 나아만은 부하들의 조언에 따라 엘리사의 명령에 겸손히 회개, 순종하여 요르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나병은 치유되고 또 하느님을 고백하니 일거양득 육신의 병인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의 치유까지 일어나는 말그대로 무지의 치유, 전인적 치유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나아만처럼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회개하여 무지의 편견과 선입견이 치유되어 겸손을 회복할 때 온전한 치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뚜렷이 부각되는 하느님의 사람, 참사람의 전형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 기세의 전혀 위축되지 않고 침착하고 지혜롭게 하느님의 처방을 제시하고 일체의 선물도 받지 않으니 그의 인품이 참으로 고결하고 매력적입니다. 오늘 독서 다음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끝내 선물을 거부한 엘리사요, 대신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청하면서 고백한 나아만의 겸손한 처신도 참 멋집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을 것입니다.”-(1열왕5,16-17)
진정 우리는 참 멋지고도 매력적인 인물, 엘리사와 나아만을 만납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함께 살아갈 때 무지의 치유와 더불어 겸손하고 무욕의 지혜로운 참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나아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복음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들의 편견과 선입견에 실망하여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의 아들을 살린 예화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치유에 관한 일화를 예로 들면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입니다.
참으로 차별없이, 국경없이 언제 어디서나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깨닫지 못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처신에 분노한 고향 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에 이어 분노까지 추가되니 참으로 눈멀고 완고해진 무지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 역시 독자들인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예수님의 당당한 처신을 배우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따라 살 때 비로소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빛속의 삶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은 물론 엘리사, 그리고 영육이 온전히 치유된 겸손한 나아만 모두가 참 멋지고 매력적인 고귀한 인품의 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지혜를 선물하시어 고귀한 품위의 참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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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첫 발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그야말로 정면 돌파를 하신 것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그런 확신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예언자도 예수님께서도 미움과 배척을 받으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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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들에는 '나아만'이라는 장수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이방인이고 나병환자였던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순종하여 치유를 받았습니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물론 그의 치유가 순조로웠던 건 아닙니다. 나아만 자신이 나름의 선입견과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영접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뭔가 눈에 보이는 주술적 치료 행위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니 엘리사의 비대면 말씀 전달 방식이 못내 서운했을 터이고, 게다가 그저 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는 지극히 평범한 처방전도 못마땅했겠지요.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다행히 나아만은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감히 부하들이 나서서 예언자의 말을 따르도록 그를 설득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따랐고 깨끗해집니다!
사실 기적의 효험은 요르단 강물보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심부름꾼을 시켜 전한 예언자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순종한 덕입니다.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이방인 장수 나아만이 고백합니다. 이 선언이 국경 안의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피 한 방울 안 섞인 국경 밖의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민족이 독점할 수 없는 온 인류의 아버지요 주인이십니다.
복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합니다. 방금 전까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은혜로운 말씀에 감탄하던 나자렛 주민들이, 자기들이 익히 아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왈가불가하면서 돌변하는 통에 불안한 냉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제1독서에서 보았듯이 누구나 선입견에 걸려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 주저 앉아서 어긋난 기대치와 과거 타령만 하고 있다면 구원은 요원하지요. 몸을 돌려 하느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4,2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4,25)
나자렛 주민들은 자기들이 방금 듣고 놀라워했던 말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 선입견에 넘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말씀하시지만 냉담하게 식어버린 그들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되려 그 말씀을 죽이려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기적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단번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날려버릴 약이 어서 등장했으면 좋겠고 아픈 사람은 얼른 나았으면 좋겠지요. 큰 피해를 입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제책도 하루빨리 시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살지 않으면 누가 아무리 많은 재화를 가졌다 해도 혼자만 안전할 수 없다는 걸 실감하고 사회적 연대성과 책임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구석구석 도처에서 작고 여린 하느님의 자취들이 보이고 또 들립니다. 가난한 이들의 나눔, 불편을 고수하는 양보, 이익을 포기하는 배려, 고된 희생, 용서... 사랑을 일으키는 그 마음마다에 하느님께서 속삭이고 계십니다. 그 선한 목소리에 순종하는 이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지요. 바이러스의 독한 기운을 사랑으로 희석시키고 정화하는 중입니다.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복음 환호송)
이 어려운 시국에 우리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말씀을 바라고 듣고 순종하는 이는 자기도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그 마음들이 모여 온 세상을 정화하는 강물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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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이 만지시면 고난이 환희의 춤으로 변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고난을 겪든, 당신의 고난을 통해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하라.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그 고난은 한 동작 한 동작 환희의 춤으로 변할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우리 귀에 초청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애통이 변하여 치유의 터가 되게 하고, 슬픔이 변하여 고난에서 춤으로 가는 길이 되게 하라는 초청이다. 우리는 상실을 피하진 않고 온전히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부정(否定)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삶의 고통을 맞이할 때 우리는 뜻밖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을 내 곤경 ‘속에’ 모셔 들일 때 우리 삶은 슬픈 순간 일지라도, 기쁨과 희망을 딛고 선다.
-헨리 나웬,<춤추시는 하느님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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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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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으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서 결코 당신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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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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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거부당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음모로 빠뜨리려는
사람들의 시선은 행동으로까지 옮겨집니다.
이에 깨우침을 주시고자
엘리야, 엘리사 예언자를 들어,
전혀 예기치 않은 사렙다 과부와
시리아 나아만이 치유받은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완고함은 받을 복마저 다른 사람에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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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
사랑과 인정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인간관계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법칙입니다.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선입견의 칼날은
언제나 서로를
향합니다.
다양한 길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들의
선입견입니다.
차갑고 차가운
시선이 우리를
더더욱 아프게
찌릅니다.
선입견과 믿음은
신앙 안에서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선입견을
깨뜨리는 것 또한
믿음입니다.
선입견을
내려놓는
가르침이
참된 믿음의
길입니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길은
선입견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믿음이지
선입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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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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