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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화
La Fable Cinénatographique
[ 차례 ]
서문
프롤로그 : 엇갈린 우화
<제1부>
가시성의 우화들 - 연극시대와 TV사이에서
에이젠슈타인의 광기
무성의 타르튀프
두 가지 인간 사냥 : 두 시대 사이의 프리츠 랑
소년 감독
<제2부>
고전주의적 서사, 낭만주의적 서사
해야 하는 어떤 것: 안소니 만의 시학
누락된 장면 : 니콜라스 레이의 시학
<제3부>
영화의 모더니티는 존재하는 가?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하나의 이미지로? 들뢰즈와 영화 시대들
신체의 추락 : 로셀리니의 물리학
<중국여자>의 붉음 : 고다르의 정치
<제4부>
영화 우화, 한 세기의 이야기들
다큐멘터리와 허구 : 마르케르와 기억의 허구
도덕 없는 우화 : 고다르, 영화, 이야기들
서문
자크 랑시에르와 영화, 이 양자 간의 관계는 매우 각별하다.
다른 것을 차치하더라도 그가 아주 특출한 영화잡지 <카이에 드 시네마>의 충실한 기고가라는 점은 그것을 잘 나타
내고 있다. 그렇다고 시네필-철학자가 영화의 영역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우화』는 바쟁이나 다네(Serge Daney)식의 순수 영화비평이나 들뢰즈식 영화의 존재론을 비켜나간다.
랑시에르가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 영역에 국한되는 이론을 생산하는 것은 그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그는 뭔가가 솟아나거나 단절되는 지점과 그 경험적 의미가 외연을 확대하는 지점을 파악하여 그것을 다른 분야와
결합시켜 새롭게 반향하는 지점을 포착한다.
영화의 물질적 조건이 있다. 영화는 카메라의 기계적, 수동적 눈과 카메라맨의 조직적, 지성적 눈사이의 갈등으로
부터 탄생한다.
1920년대의 영화인들은 빛과 운동을 조합하는 영화의 기술적 장치에 감탄했다.
문학, 음악, 미술, 연극의 표상방법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예술의 시대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젊은 영화인 장 엡스탱은 “이 기계 눈이 보고 전사하는 것은 정신과 동등한 질료이며 파동과 미립자들이 만드는
비물질적인 감각적 질료”라고 선언한다. 이 질료는 기만적인 외양과 실체적 현실 사이의 대립을 페기하는 기적의
도구가 된다.
세계의 스펙터클을 창조했던 표상적인 예술, 인과적 연쇄에 입각하여 신비스런 영혼의 영역을 탐험했던 드라마를
낡은 예술에 귀속시키는 반미메시스적 유토피아가 탄생한 것이다.
이미지들의 현전 -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가루, 담배연기나 융단의 아라베스크 문양등 - 은 이제 진정한 비극의 주체
가 된다. 랑시에르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을 엡스탱을 상상한다: “영화는 참이며 이야기(우화)는 거짓이다”.
『영화우화』는 엡스탱이 거짓이라고 부른 우화, 더 나아가 우화의 예술로서의 영화를 상정하고 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영화는 아리스토레스적인 예술이다.
이야기 또는 플롯으로 번역해도 무방할 우화라는 낱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술하는 뮈토스(muthos)를 위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의 제6장에서 비극의 여섯 가지 구성요소들 - 뮈토스, 성격, 조사(문자를 선택하거나
배열하는 용법), 사상, 장경(스펙터클) 및 노래 - 을 열거하면서, 뮈토스가 비극의 요체임을 강조한다.
뮈토스는 내적 인과관계를 지닌 사건들을 결합시킨 이야기이다.
이미지들의 현전을 토대로 하는 영화를 앞에 두고 이처럼 이 영화가 동시에 우화의 부활을 이끈다고 주장하는
랑시에르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은 랑시에르의 문예관에서 비롯된다. 그의 문예관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두 시학에 그 기반을 둔다.
고전주의 시학은 뮈토스의 구축에 관심을 갖는다.
뮈토스는 어떤 위대함, 하나의 고유한 크기, 하나의 템포를 지니고 있는 행동하는 인간들의 표상이자 사건들의 결합
이다. 이 시학이 구축하는 이러한 플롯은 허구의 특정한 시, 공간의 객관화를 상정하는 관습과 진실임직함의 체제를
기초로 한다.
따라서 고전주의적 예술행위는 필연적이면서 동시에 의외적인 인과적 도식에 따라서 잘 구성된 적합한 줄거리들을
끌어내는 허구적 질료의 선별, 이야기의 이해와 감정의 소통을 적합하게 끌어내는 데 알맞은 어법의 선별과 관계한다.
고전주의 시학의 원칙은 이렇듯 사건들의 인과적 합리성, 양식의 구분, 주제의 위계, 등장인물의 존재방식을 규정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원칙에 의존한다.
반면에 랑시에르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낭만주의 시학은 미학 시대의 산물이다.
“모든 것이 말한다”라는 노발리스의 명제처럼 낭만주의 시학은 허구의 객관화된 공간을 글쓰기의 불명확한 공간으로
대체한다.
에피소드의 위계가 파기되고 모든 것은 예술의 질료가 되다.
무의미한 조짐이나 일상의 모든 대상 역시 의미와 표현의 역량을 기술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삶의 진실을 표방하는 낭만주의 시학은 미메시스적 논리의 중심부, 즉 경험적 현실에서 무질서와 허구적 질서를 분리
시키는 규범체제를 해체하여 그것을 관념의 순수한 능력과 감각적 현전, 사물들의 말없는 글쓰기로 대체한다.
낭만주의적 자아는 외계의 인상과 성질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법칙도 모델도 없는 순수 창조행위와 사물들의
표면에 새겨진 표현의 역량이라는 순수한 수동성 사이를 오간다.
허구의 객관성을 폐기하는 낭만주의 시학은 무언의 사물들에게 빌려주는 말의 능력과 작품에 부여된 자기반성적 능력
의 결합을 시도한다.
예술의 새로운 척도는 고전주의에 적용되었던 모방의 대상으로서 선행하는 현실이 아니라 내부의 빛에 의해 창조
되는 현실이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이를 ‘진보적 보편시’, 노발리스는 ‘절대시’라고 명명한다.
낭만주의 미학은 버지니아 울프, 말레비치, 쇤베르크의 작품등에서 나타나듯이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으로 변이한다.
이 패러다임은 각 예술이 외부적 지시체를 표현 수단으로 삼았던 재현에 대한 예속, 이 예속으로부터의 단절과
(각예술의)자기만의 고유한 물질성에 대한 전념으로서 예술적 모더니티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가장 뒤늦게 탄생한 예술인 영화는 이 두시학을 무효화시키며 새로운 현실의 첨병이 되는 것일까?
이것은 ‘순수 영화’의 존재 유무에 대한 물음과 동일하다.
그러나 카메라의 수동적, 자동적 눈과 영화 감독의 자각적 눈은 사태들의 내밀한 현전을 전면에 내세우는 빛에 의한
글쓰기라는 영화의 새로운 현실을 실현하지 못했다.
영화의 시각적 역량은 전통적인 서술과 표현의 연쇄적 결합을 대체하지 못했다.
빛과 운동의 조합을 통한 예술로써 낡은 인간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개혁하고자 했던 베르토프, 에이젠슈테인, 메드
베드킨, 도브젠코, 카뉘도, 델뤽 또는 엡스탱 등은 오로지 머릿속의 관념으로만 존재했던 영화를 꿈꾼 것일까?
영화는 낭만주의 시학에 의해 미리 예고 됐으며, 어긋난 시간성과 이질적인 이미지들 체제의 교착으로서 감각적 현전,
사물들의 말없는 글쓰기를 천명하는 이 시학의 기표적인 형식의 변신에 가까운 예술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영화는 형상추출 작업을 통해 전통적인 이야기 기법과 다시 관계를 맺는다.
영화는 예술의 모더니티가 그 타당성을 의심했던 미메시스적 질서를 다시 복원한다.
게다가 영화는 전통적 우화들과 전형적인 인물들, 표현규칙들과 파토스를 위한 전통적인 수단들, 그리고 장르들의
엄격한 구분까지도 재건한다.
이처럼 영화는 “이야기들의 낭만주의적 왜곡에서 유래하는 후발 예술이며, 이 왜곡을 고전주의적 모방으로 이끄는
예술이다”
『영화 우화』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영화를 가능케 했던 미학 혁명과 영화 사이의 연속성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모순 속에 랑시에르의 ‘우화’가 자리를 잡는다.
대표적인 현대 예술인 영화는 태생적으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두 시학에의 갈등을 감내하거나 혹은 두 시학의
결합을 시도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다.
그러므로 영화우화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영화우화는 ‘엇갈린 우화’, 즉 이 두시학이 엇갈리게 구성된 우화다.
가시성과 서사성은 영화의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어쩌면 영화의 이미지는 계속해서 증발하여 자신을 부정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이미지인지 모른다. 『영화우화』는 영화의 본질을 조형적인 예술과 동일시하거나 또는 ‘광학적’충동과 결부시키려는 영화 담론을 배격한다.
랑시에르는 서사적, 조형적 울타리를 뛰어넘어 영화를 예술의 패러다임 속에 위치시킨다.
영화는 대표적인 혼용예술이다. 고전주의 시학과 낭만주의 시학은 그 원칙에 있어 대립되나 영화의 중심부에서 뒤섞
인다. 영화가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형적인 측면을 강조하든지, 또는 대중적인 이야기 기법을 도입하든지 간에 영화
에는 두 시학이 모순적으로 혼용되고 있는 세계가 출연한다.
바로 이 두 시학의 교차를 전체하면서 『영화우화』는 이상주의적 영화인들(장 엡스탱, 장 뤽 고다르,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 마르케르와 질 들뢰즈)의 작품들에서 이념적-미학적, 유물론적 의미를 찾아내어 이것을 이미지의 역량과 유약
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우화의 영화인들(안소니 만, 프리츠 랑, 로베르토 로셀리니, 니콜라스 레이, 프리드리히
푸르나우)의 작품들에 내재된 비관주의와 비교하고 있다.
프롤로그 : 엇갈린 우화
“영화는 진실이며 이야기는 거짓이다” 장 엡스탱이 쓴 이 글은 영화우화라는 개념이 제기하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21년 24살의 젊은 청년은 「안녕하셔요, 영화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영화가 선도한다고 생각하는 예술혁명을
예찬하고 있다.
장 엡스탱은 이 책의 주제 - 진실이 기만으로 귀속되는 것처럼 영화는 이야기 기법으로 귀속된다 - 를 무효화하는것
처럼 보이는 표현을 통해 이 예술혁명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영화가 배제하는 것은 단지 결혼의 성사 여부, 몇 명의 자식을 두었는지 알려주는 동화의 결말과 같은 유치한 기다림
뿐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우화(fable), 예컨대 줄거리의 얽힘과 대단원을 통해 등장인물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또는 그 반대로 이행하는 필연적인 또는 진실임직한 사건들의 결합이다.
배치된 사건들의 이러한 원칙은 비극시뿐만 아니라 예술적 표현이라는 관념 자체를 규정했었다.
그런데 젊은 엡스탱은 이 원칙이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원칙은 자신이 모방한다고 주장하는 삶을
부정하고 있다.
삶은 이야기들, 하나의 결말로 향한 사건들이 아닌 오로지 제 방향으로 열린 상황들로 구성된다.
삶은 극적인 진전이 아닌 수많은 미시 사건들로 이루어진 긴 연속적 운동이다.
이러한 삶의 진실이 표현될 수 있는 예술이 마침내 발전된 것이다.
이 예술속에서 변화무쌍한 운명의 부침과 의지들의 갈등을 창조하는 지성은 또 하나의 지성, 즉 기계의 지성에 예속
된다. 그 자체로 충만해 하는 기계의 지성은 어떤 이야기도 만들지 못하지만 극적인 운명의 부침보다 훨씬 강렬한
드라마를 만드는 무한한 운동들을 기록한다.
“철저하게 정직한” 예술가가 영화의 시원에 있다. 이 예술가는 속임수를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기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기록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기록은 보들레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동일한 사태의 재생산과는 전혀 무관하다.
영화의 자동운동은 “현실”의 지위자체를 변화시키면서 기술과 예술사이의 분쟁을 종결한다.
영화의 자동운동은 사태가 우리의 시선에 제시된 대로 그것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영화의 자동운동은 그 묘사적,
서사적 특성을 통해 식별 가능한 대상들, 인물들 또는 사건들로서 사태들이 규정되기 전에 인간 눈이 포착하지 못
하는 파동과 진동의 상태로 존재하는 사태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바로 이런 연유로 움직이는 이미지 예술이 뮈토스(muthos) - 플롯의 합리성-를 강조하면서 오프시스(opis) - 스펙
터클의 감각적 효과 - 를 등한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낡은 위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이미지 예술은 그 운동성 덕분에 서사능력을 합병한 육안으로 보는 예술이 아니며, 가시적 형태들을 모방
하는 예술을 대체한 육안으로 보는 기술도 아니다.
움직이는 이미지 예술은 ‘예술과 의미중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느냐’라는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감각의 내적 진리에
다가가는 통로를 제공한다.
이미지 예술은 무엇보다도 사유와 감각의 중요한 분쟁을 종결짓는다.
만일 영화가 낡은 미메시스 질서를 폐기한다면 그것은 미메시스의 물음을 그 뿌리로부터 해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이미지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 감각적인 모사와 지성적인 모델의 대립을 해결한다.
기계 눈이 보고 전사하는 것은 정신과 동등한 질료, 파동과 미립자들이 만드는 비물질적인 감각적 질료라고 엡스탱은
말한다,.
이 질료는 기만적인 외양과 실체적 현실 사이의 대립을 폐기한다.
세계의 스펙터클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눈과 손, 신비스런 영혼의 영역을 탐험했던 드라마는 낡은
예술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낡은 과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빛에 의한 운동의 글쓰기는 허구적인 질료를
감각적 질료로 이동시킨다.
빛에 의한 이 운동의 글쓰기는 배신의 악랄한 범죄를 위한 독약이나 멜로 드라마의 애통함을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
가루, 담배연기나 융단의 아라베스크 문양을 통해 나타낸다.
그리고 이 글쓰기는 모든 것을 비물질적 질료의 내적 운동으로 환원시킨다.
이것이 영화를 통해 예술가가 발견한 새로운 드라마이다. 영화에서는 사유와 사태, 외부와 내부가 무차별하게 동일한
조직 속에서 포착된다.
사유는 “암페어의 방출”을 통해 관객의 이마에 새겨지고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사랑은 지금까지 어떠한 사랑도 함유
하지 않았던 “적정한 지분의 자외선”을 함유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확실히 오늘날의 시각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첫 번째 방식은 향수적이다.
향수적 방식은 실험영화라는 충직한 보루를 제외하고 영화의 현실이 과거의 우화들과 등장인물들보다는 사태들의
내밀한 현전을 전면에 내세우는 빛에 의한 글쓰기라는 아름다운 희망을 오래 전부터 배신했다고 인정한다.
젊은 영화예술은 전통적인 이야기 기법과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이 기법의 가장 충실한 수호자가 되었다.
영화예술은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과 사랑의 시련이 등장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예시하기 위해 자신의 시각적 역량과
실험적 수단을 활용했을 뿐 아니라 문학, 미술과 연극이 그 타당성을 의심했던 표상적인 질서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영화예술은 플롯들과 전형적인 인물들, 표현규칙들과 파토스를 위한 과거의 수단들, 그리고 장르들의 엄격한 구분까
지도 재건했다.
그래서 향수적 시각은 두 현상으로 귀착되는 영화의 퇴화를 규탄한다.
첫 번째 현상은 할리우드식 영화산업이다 할리우드식 영화산업은 플롯의 표준화와 등장인물과의 동일화에 입각하여
상업적 이득을 추구하는 시나리오만을 연출하도록 영화감독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두 번째는 겸양적인 방식이다. 이 방식은 확실히 우리가 영화의 꿈과 너무나 동떨어진 시대에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 영화가 근거 없는 유토피아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꿈은 한 시대의 원대한 유토피아와 함께 새로운 세계의 미학적, 과학적, 정치적 꿈과 함께 태동했다.
이 시대는 빛 에너지의 군림하에서 모든 역사적, 물질적 장애물들이 극복될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이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에너지로 용해된 질료의 초과학 유토피아는 영적인 시를 추구했던 상징
주의자들의 몽상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세계의 구축을 겨냥했던 소련의 기획에도 영향을 주었다.
장 엡스탱은 자신의 텍스트에서 새로운 예술의 본질을 그 기술장치에 입각하여 정의한다는 구실아래 빛 에너지에
대한 수많은 송시들 중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대에는 카누도 성향의 상징주의 선언서들과 마리네티 성향의 미래주의 선언서들, 네온과 무선송신의 영광을
위한 아폴리네르와 상드라르의 동시화법 기법의 시들, 흘레브니코프의 의미를 초월한 언어로 쓰여진 시들, 세베리니
성향의 대중 무도회의 역동성과 들로네 성향의 채색적인 원형들의 역동성, 베르도프의 키노 아이, 아피아의 무대미술
또는 로이 플러의 전기조명을 이용한 춤 등 수천 가지 방법으로 찬양됬고 예시됬던 빛 에너지에 대한 위대한 송시들이
있었다.
장 엡스탱은 새로 출현한 전기 세계의 유토피아에 흠뻑 취해 암페어의 방출로 각인된 사유와 자외선의 적정한 지분이
함유된 사랑을 찬미하는 「안녕하세요,영화여!」를 썼을 것이다.
그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 예술을 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예술은 장 엡스탱의 예술도 아니었고 우리의 예술도 아니다.
이 예술은 당시 영화관에 포스터가 붙었던 영화도 아니고, 그가 전통적 방식으로 불행한 연인들과 사랑의 고통을 이야
기했던, 그 자신이 몸소 실천했던 예술도 아니다.
장 엡스탱은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던, 예술 오로지 머릿속의 관념으로만 있었던 영화를 찬양했다.
겸양이 향수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고 단정할 수 없다. 겸양이 우리로 하여금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
예술의 겸허한 현실은 정확히 무엇일까?
가시적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기술장치와 이야기 기법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 고유한 수단들의 견고한 기초에 입각하여 움직이는 이미지 예술을 확립하고자 했던 이론가들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어제의 아날로그 기계와 오늘날의 디지털 기계 고유의 수단은 공히 사랑의 시련이나 추상적 형태의 춤을 촬영
하는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입증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의 관념이라는 이름으로 이 기술장치와 어떠어떠한 우화유형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영화는 미술이나 문학이 그런 것처럼 그 과정이 고유한 재료와 기술장치로 환원되는 예술의 이름만은 아니다.
영화는 미술이나 문학과 같이 그 의미가 모든 예술의 경계를 관통하는 예술의 이름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안녕하세요, 영화여!」의 구절들과 예술의 관념을 새로운 눈으로 성찰해야 한다.
장 엡스탱은 해묵은 “극적 사건”과 “서스펜스 상태의 비극”, 즉 “진정한 비극”을 대립시킨다.
그런데 서스펜스 상태의 비극의 주제는 필름에 사태의 내밀한 얼굴을 새기는 자동운동 기계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는 기계적 자동운동의 능력을 전혀 다른것, 즉 하나의 비극이 또 하나의 비극을 희생시키는 능동적 변증법과 동일
시 한다.
엽궐련의 위협, 미세한 먼지의 배신, 독성을 품은 융단의 힘이 기다림과 폭력, 두려움을 드러내는 전통적인 서술과
표현의 연쇄적 결합을 대신하게 된다.
요컨대 엡스탱의 텍스트는 형상추출 작업을 행한다. 그는 다른 영화의 요소들을 차용하면서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
실제로 그가 「안녕하세요, 영화여!」에서 기술하는 영화는 영화의 역량을 입증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어떤 실험
영화 - 현실적 혹은 상상적 - 가 아니다. 우리가 곧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토마스 하퍼 인스의 멜로 드라마,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하야카와 셋슈가 연기한 <비극적 의혹>에서 추출된 어떤 영화이다.
우리에게 영화의 본래 역량을 진술하는 이론적, 시적 우화는 다른 우화의 내용에서 차용된 것이다.
엡스탱은 이 우화의 전통적인 서사적 측면을 지우면서 또 다른 극작술 즉 기다림, 행동, 상태를 결합하는 또 하나의
체계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처럼 영화단위는 완벽하게 분화된다.
장 엡스탱은 삶과 허구, 예술과 과학, 감각과 지성의 이원성을 근원적인 단위로 복원하는 하나의 예술을 찬미한다.
그러나 영화의 이러한 순수한 본질은 오로지 이미 촬영된 멜로 드라마에서 하나의 “순수”영화작품을 추출함으로써
구축된다.
그러나 다른 우화에 입각하여 하나의 우화를 만드는 이러한 방식은 한 시대의 사조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 방식은 경험으로서, 예술로서, 예술의 관념으로서 영화를 구성하는 소여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또한 영화를 모든 예술체제와 모순되는 연속성 속에 기입시키는 소여이기도 하다.
다른 영화작품에 입각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엡스탱이래 오늘날까지 영화가 앞세우는 세 주요 인물, 예컨대 영화
감독, 관객, 영화 비평가와 시네필이 멈추지 않고 해왔던 것이다.
감독은 시나리오의 미장센을 담당하지만 이 시나리오에 관여할 수 없으며, 관객들 - 영화는 이들에게 추억을 환기시
키는 혼성곡이 된다. - 영화 비평가와 시네필은 하나의 상업적 이야기의 몸통을 하나의 순수한 조형적 형태의 작품
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것은 또한 영화의 역량을 요약하고자 했던 거대한 분량의 두 작품 - 2권으로 출간된 들뢰즈의 「시네마」와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고다르의 <영화사> -에서 저자들이 시도했던 것이다.
들뢰즈의 두 작품은 기존 영화들의 총체로부터 빼낸 추출물에 의거하여 논증된 영화의 존재론을 구성한다.
고다르는 이미지 - 아이콘 이론을 주창하며, 히치콕이 자신의 이야기들에서 사용했던 불가사의와 심리적 감동을
유발하는 기능적 이미지들에 대한 조형적인 쇼트들을 제시하면서 이 이론을 증명한다.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에는 두 요소가 하나에 함축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의 존재론을 구축한다.
첫째, 영화 이미지는 사태 자체임과 동시에 보편적 생성의 내밀한 사건이다. 둘째, 영화 이미지는 세계의 사건들에
실제적인 힘 - 두뇌라는 불투명한 스크린이 박탈한 능력 - 을 복원시키는 예술의 조작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복원을 위한 들뢰즈의 극작술은 엡스탱이나 고다르의 기원의 극작술처럼 허구자료들의 추출에 의해
작동한다.
제프의 마비된 다리<이창>, 스카티의 현기증<현기증>은 “감각운동 도식의 단절”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운동
- 이미지가 시간 - 이미지에서 떨어져 나온다.
고다르와 들뢰즈는 장 엡스탱이 이미 주목했던 극작술을 반복한다.
영화예술의 최초의 본질은 허구 자료들 - 전통적인 이야기 기법은 영화예술과 함께 이것들을 공유한다 -에서 사후에
추출된다. 영화의 열광적인 개척자, 환멸에 빠진 영화사의 기록자, 세련된 철학자, 아마추어 이론가, 이 모두가 동일한
극작술을 공유하는 것은 이 극작술이 예술로서, 사유의 대상으로서 영화사와 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화를 통해 자기의 진실을 말하는데, 이 우화는 스크린이 진술하는 이야기들에서 추출된다.
그러므로 장 엡스탱이 자신의 분석에서 실행한 대체는 젊은 날의 망상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영화 우화는 영화예술과 동체를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우화가 영화와 함께 탄생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엡스탱이 영화의 기계장치에 접목한 이 극작술이 오늘날까지 전달된 것은 이것이 영화는 물론이고 예술 일반의 극작
술이고, 영화의 기술적 수단의 특별성보다 더 미학적 계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관념으로서의 영화는 기술적 수단과 특별한 예술로서의 영화보다 선행했다.
사태의 내밀한 조직을 드러내는 “서스펜스의 비극”과 “극적 행동”기법의 대립은 젊은 영화예술과 노화된 연극의
대립구도를 성립케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영화는 연극에서 이러한 대립을 물려받는다. 메테르링크, 고든 크레이그, 아피아, 메이어 홀드시대에 공연
됬던 연극들에서 이미 이러한 대립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극작가들과 연극연출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태의 급변을 세계의 내밀한 서스펜스로 맞서게 했다.
전통적 플롯의 영역에서 서스펜스 비극을 발췌하라고 가르쳤던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었다.
장 엡스탱의 “서스펜스의 비극”은 “부동의 비극”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부동의 비극은 메테르
링크가 그보다 30년 앞서 세익스피어의 사랑과 폭력을 다룬 이야기들에서 추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상징주의적 시학에 영화우화가 빚진 부채의 특별한 성격이 아니다.
메테르링크 후에, 그리고 질 들뢰즈와 고다르에 앞서 장 엡스탱이 다른 우화에 입각해서 실행한 우화의 추출작업은
영향력의 문제도, 특수한 개념적, 어휘적 세계로의 귀속문제도 아니다.
이 과정에 연루된 것은 바로 한 예술체제의 논리이다. 이러한 형상추출 작업은 19세기에 공쿠르 형제들 또는 많은
이론가들이 행했던 예술비평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었다.
이들은 동일한 극작술에 의거하여 루벤스 작품에서 종교적 장면, 렘브란트 작품에서 부르주아지 장면이나 샤르댕
작품에서 정물화를 추출하면서 이 작품들의 구상적 내용을 배경으로 쫓아보내고 작품 재료의 모험을 무대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이 미학 시대의 예술이다. 후발적으로 출연하는 이 예술은 표상적인 예술의 인과적 연쇄를 해체하고 글쓰기의
생성-수동성을 통해 연쇄적 사건들의 결합을 배격하며 옛적 시들과 미술작품들을 다시 형상화한다.
이 작업은 과거의 모든 예술작품의 활용 가능성을 상정하며, 이 작품들을 다시 독해하고, 다시 관찰하며, 다시 그리
거나 다시 쓴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상, 벽의 얼룩, 상업 광고물 등 - 은 한
시대, 한 역사, 한 사회를 해독하는 상형문자와 그 반대로 대수롭지 않은 것에 의한 새로운 광체로 장식된 적나라한
현실의 순수 현전이라는 이중적인 수단으로써 이 예술에 활용된다.
장 엡스탱이 영화에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예술체제의 특성, 즉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동일성, 예술의 대상
으로서 제 사물의 지위상승, 극적 사건에서 비극적 서스펜스를 차용하는 형상추출 작업이다.
셀링과 헤겔이 예술의 원칙으로 천명했던 의식과 무의식의 동일성은 그 완벽한 구현을 영화감독의 의식적 눈과 카메라
의 무의식적 눈의 이중적 능력안에서 발견한다. 엡스탱과 몇몇 이론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미학시대 예술체제의
실현된 꿈이라고 결론내릴 수 도 있다.
...화가나 소설가는 스스로를 생성-수동성의 도구로 만든다. 그런데 기계장치는 이 생성 - 수동성의 작업을 제거한다.
카메라는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들 수 없다. 카메라 자체가 이미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카메라는 자신을 조작하는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도입부에서 사물
들의 보이지 않는 얼굴을 탐험하도록 고안된 키노아이는 일견 장 엡스탱의 주장을 예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한 카메라 맨이 두 번째 카메라의 삼각대를 설치하려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두 번째 카메라는 애초부터 첫 번째 카메라가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여러 용도를 위해 그것을 적절한 셀룰로이드
조각들로 배열할 수 있는 의지의 도구이다.
기계눈은 그야말로 서스펜스의 비극, 소련의 키노 아이 작업, 이해관계,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에 대한 낡아 빠진 예시
등 모든 주제에 적합하다.
일반적으로 모든 것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봉사하도록 운명이 정해진다.
예술의 미학체제 프로그램을 달성한다고 간주된 기계의 “수동성”은 미술과 문학의 세기가 전복하려고 시도했던
수동적 질료를 가공하는 능동적 형상의 낡은 표상적인 역량을 복원하는 데도 이용된다.
기계의 수동성과 함께 차츰 표상적인 예술의 논리가 복원된다, 하지만 수동적 기계를 자율적으로 명령하는 예술가
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자신의 통제력을 예속성으로 전화하고 자신의 예술을 집단적 상상체계를 경영하고 그것을
통해 수익을 챙기는 기업에 헌신하도록 강제된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말레비치나 쇤베르크 시대에 영화는 예술의 미학적 자율성에 맞서 낡은 표상적인 세계에
대한 예술의 복종을 내세움으로써 예술의 모더니티라는 순박한 신학을 저지하기 위해 일부러 온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는 예술의 원칙과 레저활동의 산업화와 대중을 위한 쾌락에 예속된 대중적인 유희의 원칙 사이에
대립을 낳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학시대의 예술은 이러한 경계를 폐기하면서 모든 것을 예술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소설은 연재소설로 그 외연을 확장했으며, 시는 군중의 리듬을 쫒았고, 그림이 선술집과 뮤직홀의 벽에
걸어졌다.
장 엡스탱 시대에 연출된 새로운 영화예술은 어릿광대의 공연과 운동선수의 기량에서 영감을 끌어냈다.
동일한 시기에 소비품의 허섭스레기가 쇠시리 위에 걸어지고 시의 삽화로 이용된다.
산업적 압박감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일찍이 영화인을 “장인”으로 만든다.
영화인은 강요된 배우들을 내세워야 하는 시나리오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나타내기 위해 애쓰는 장인이 된다.
후발적으로 출현하는 것, 기존의 예술에 자신의 예술을 접목시키는 것, 진부한 이야기와 이미지로 만든 산문과 거의
식별 불가능하도록 조작하는 것, 이것이 미학체제의 기본 법칙이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산업은 이 법칙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이다.
우리의 시대는 광고의 미학주의가 “작가들의 정치”를 완성하고 있다는 딜레마에 맞서 기꺼이 장인들의 영화를 복원
하고자 한다. 이 시대는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예술가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헤겔의 진단을 다시 제 것으로 취한다.
오늘날 우리가 첨가해야 할 것은 이 이미지는 결국은 상품의 브랜드와 일치된다는 점이다.
영화예술이 제작자와 시나리오 작가 다음에 오고 이들이 제안하는 프로그램을 예시해야 할 의무 - 자신의 고유의
논리를 통해 이 프로그램을 엇갈리게 구성한다 할지라도 - 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냉엄한 시장의 법칙만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 예술적 성격의 중심에 있는 결정 불가능성이다.
영화는 예술의 세속적 관념을 그대로 표현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반박을 실현한다.
영화는 이야기들의 낭만주의적 왜곡에서 유래하는 후발 예술이며, 이 왜곡을 고전주의적 모방으로 이끄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가능케 했던 미학혁명과 영화사이의 연속성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가 이 혁명의 원칙인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의 동일성이라는 기본적인 기술장비를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세속적 변증법의 나사를 한번 더 돌린 후에야 비로서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예술은 경험적으로 산업이 부과했던 임무에 맞서 자신의 예술을 입증하도록 강요받았던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방해는 보다 내밀한 것을 숨기고 있다. 영화가 자신의 예속됨을 저지하려면 먼저 자신의 훌륭한 기량을 거역
해야 한다. 영화는 예술적 조작을 통해 자신의 자연적 능력을 엇갈리게 구성하는 극작술을 구축해야 한다.
영화의 기술적 성격에서 그 예술적 소명의식에 이르는 반듯이 뻗은 길은 없다. 영화우화는 엇갈린 우화이다.
...오토마론은 앙드레 바쟁의 이론에서 핵심적 주제가 되며, 여전히 오늘날의 체계화 작업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조작되지 않은 사물들”에 대한 로셀리니의 카메라 시선이 있고, 연극 표현의 기교에 맞서 영화의 자동
운동의 진실을 내세우는 브레송의 “모델”사용에 대한 이론과 실천이 있다.
우리는 이 극작술들 중에 실제로 영화에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으며, 오히려 영화가 이 극작술들에 귀속된다는
것을 여렵지 않게 증명할 수 도 있다.
이 극작술들이 영화에 귀속되는 이유는 엇갈린 구성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앙드레 바쟁은 찰리 채플린의 마임이 영화시대, 셀룰로이드 테이프를 질산은으로 고정한 형태의 구현임을 현란하게
보여주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미학적으로 만들어진 형식으로서, 전통적 심리주의를 배격하는 순수 스펙
터클의 영웅으로서 익살스런 오토마톤은 이미 영화 이전에 있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기능했던 오토마톤의 역할은 기술적 오토마톤의 구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우화를 근본적으로
탈규칙화하는 도구였다.
...우리가 브레송의 “영화예술”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변증법이다.
브레송은 명령된 제스처와 억양을 기계적으로 재생산하는 수동적 “모델”과 화가이자 편집인인 영화감독이라는 한
쌍의 커플을 통해 이 변증법을 요약하고자 한다.
.. 영화의 허구적 영도(le degré zéro)는 두 원리의 상보성, 즉 행동의 논리와 현실시계의 효과를 공히 입증하는 것
이다. 우화의 예술적 작업은 이와 반대로 두 원리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 간극을 증대 또는 감소시키는 것
이며 그 역할들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현실의 감정을 생산할 의무가 없는 다큐멘터리라고 불리는 영화의 특권은 이 현실을 문제로서 취급하고 행동과 삶,
의미와 하찮음의 변화무쌍한 유희들을 아주 자유롭게 실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 문서들을 통해 새로운 플롯을 발명하는 다큐멘터리 허구는 이야기와 등장인물, 쇼트와 시퀀스의 관계 속에서
가시적인것, 말과 움직임의 역량들을 결합하고 분리하는 영화우화의 작업과의 공통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 영화 <도시가 잠든 사이에>에서는 이 모든 소품들이 사라지는 대신에 오직 하나의 시각기계가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TV기자 모블리는 살인마와 “대면”하면서 상상의 포획을 실질적인 포획의 무기로 변형시킨다.
TV상자는 예술의 죽음을 의미하는 “대량소비”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TV는 보다 심층적으로 보다 아이러니하게 미메시스의 간극을 제거하고 자기방식대로 즉각적인 감각의 현전을 위한
새로운 예술의 범미학적 기획을 실현하는 시각기계이다.
이 기계는 영화의 역량이 아니라 영화의 “무능”을 무효화한다. 이 기계는 영화우화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엇갈린 구성작업을 무효화한다. TV는 이 유희를 통해 영화를 “완성한다” 감독의 임무는 이 유희를 또다시 전복시키는
것이다.
현대의 오래된 탄식은 우리를 정보와 광고기계를 위해 계획된 이미지 죽음의 증인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이미지 예술과 그 사유는 자신들을 엇갈리게 구성했던 것으로부터 그치지 않고 양육되어 왔음을
밝힘으로써 위와 반대되는 시각을 선택했다.
<제1부>
가시성의 우화들 - 연극시대와 TV사이에서
에이젠슈타인의 광기
..미메시스에는 두 가지 측면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먼저 미메시스는 정신적, 사회적 역량이며, 말과 행위, 이미지는 이 역량에 의해 각자의 유사물을 촉발시킨다.
그리고 미메시스는 한 예술의 결정된 체제, 예컨대 장르들의 규칙들, 이야기의 구성, 행동을 수행하고 감정을 표현
하는 등장인물들의 표상 속에 정신적, 사회적 역량을 삽입하는 예술체제이다.
따라서 세태의 기류에 편승해서 새로운 삶의 구축이라는 현실과 전통적 우화및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대립시키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예술의 미메시스 체제의 틀 속에서 정신적, 사회적 역량을 끄집어 내어 그것을 사유의 역량으로 변형시켜야 한다.
이 사유의 역량은 특정한 감각화의 양태 속에서 미메시스 예술이 이야기의 급변과 등장인물과의 동일화에 위임했던
효과를 직접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관객이 이야기와 등장인물에서 느끼는 동일화라는 전통적인 효과를 예술가가 기획하는 감동과의 직접적인 동일화로
대체해야 한다.
미메시스의 위용에 오로지 새로운 삶 형태의 구축으로 대항했던 예술가들에 맞서 에이젠슈테인은 미학적인 예술이
라는 제3의 길을 연다.
이 예술은 종래에 성행했던 동일화, 연민이나 공포를 야기하는 플롯의 구성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고유한 감각적
형태속에 직접적으로 새겨진다.
영화는 이 예술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영화라는 용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영화는 단지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술은 물질적 매체의 표현적 활용과 일정한 표현수단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술이란 예술의 관념을 의미한다.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영화예술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영화”를 언급하면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그는 영화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영화의 본질을 이 나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화의 본질을 일어의 표의기호 원칙이 실행되는 하이쿠, 판화작품 또는 가부키 연극 따위의 예술에서 찾는다.
영화예술의 원칙은 사실상 표의기호의 원칙이다.
표의기호는 두 이미지의 조우에서 파생된 의미작용이다. 물과 눈이 합쳐지면서 눈물이라는 의미를 만드는 것처럼
두 쇼트나 한 쇼트 속의 두 시각적 요소의 충돌은 표상된 요소들의 미메시스적 가치에 맞서 하나의 의미, 한 담론의
구성요소를 만든다.
관념은 대립물들의 결합이라는 변증법적 원칙에 따라 직접적으로 이미지들이 된다.
가부키의 “표의기호적”예술은 몽타주(편집)와 모순의 예술이다.
가부키는 등장인물의 전체모습과 신체의 세분화된 자세들, 미메시스적인 감정 표현의 “뉘앙스”와 적대적인 표현들의
충돌을 서로 대립시킨다.
영화편집은 이 언어의 특성을 승계한다. 하지만 표의기호는 또한 부수들과 감각적 구성요소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융합언어이다.
영화도 이 언어처럼 융합예술, 즉 시각적, 청각적 요소들을 “동일한 하나의 연극 단위”로 환원시키는 예술이다.
이 단위는 한 예술이나 결정된 의미의 요소가 아니라 “뇌의 어떤 통로를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가를 개의치 않는,
뇌 전체의 피질을 위한 자극”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 “연극”은 새로운 “영화”를 위한 프로그램 - 예술의 고유한 요소
들에 대한 “언어”의 구성 - 을 제공한다.
뇌를 자극하는 이 예술의 직접적 효과는 이중적 요소 - 첫째, 이미지 언어 속에서 관념들의 정확한 소통, 둘째, 감각적
자극들의 결합에 의한 감각적 상태의 직접적 변화 - 로 산정된다.
이처럼 영화예술이 없는 나라의 연극이 연극 시대에서 영화시대로 이행하는 한 나라에 길을 열어준다.
따라서 “연극에서 영화로의 이행”은 한 예술이 다른 예술로 대체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예술체제의 표명이다. 그렇다고 그 과정 자체가 새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함 포테킨>의 감독이 제작수단을 찾지 못해 글쓰기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을때 그는 몽타주의 원리가 하이쿠와
가부키뿐만 아니라 엘 그레코의 그림, 피라네지의 소묘, 디드로의 이론서, 푸쉬킨의 시, 디킨슨과 졸라의 소설들과
그밖의 수많은 예술적 표명들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밝혀낸다.
영화는 예술들의 종합으로써, 이를테면 카스텔 신부와 디드로가 시각적 클라비코드, 바그너의 음악극, 다색 광선의
움직이는 형태와 음악을 조화롭게 일치시키는 스크리아빈의 색채 콘체르토, 폴 포르의 향기 연극 등이 이상적으로
추구했던 목표들의 종합으로 자처한다.
하지만 예술들의 종합이 말, 음악, 이미지, 움직임, 향기 등을 모조리 동시에 무대에 올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합은 예술들의 이질적인 과정과 다양한 감각적 형식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관념적인 요소와 감각적인 요소사이의
공통적인 근원의 통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몽타주라는 용어가 요약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계가 영화 언어를 통해 포착하는 세상의 이미지는 미메시스의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관념들을 조합하는 형태소가
된다. 하지만 이 추상적 형태소 역시 하나의 감각적인 자극제가 된다.
아르토는 감정을 토로하는 등장인물이 이끄는 플롯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신경체계에 도달하는 이러한
감각적 자극제를 꿈꿨다.
영화는 카누도가 찬미한 빛의 언어가 아니다.
보다 간결하게 말하면, 영화는 관념들의 소통과 감각적인 감동의 황홀한 분출을 계산의 공통 단위로 환원시키면서
미메시스적 효과의 요소들을 비미메시스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보장하는 예술이다.
..브레히트와 달리 에이젠슈테인은 관객을 교육시키고, 보는 방법을 깨닫게 하며, 거리를 두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브레히트가 연극 공연에서 동일화, 열광, 흡수를 제거하고자 했던 반면 에이젠슈테인은 이 모든 것을 포착하고 그
역량을 배가하고자 했다.
그는 새로 탄생한 영화예술을 공산주의에 공헌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영화의 실험을 위해, 영화가 구현한다고 믿었던 예술과 모더니티의 관념의 실험, 즉 감각 언어로 화한
관념의 실험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했다.
그에게 공산주의 예술은 비판적 예술이나 의식의 자각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예술은 새로운 감수성 체계를 위해 관념을 이미지들의 연쇄작용으로 변화시키는 황홀한 예술이었다.
이것이 문제의 요체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상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한 에이젠슈테인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탓하는 것은 그가 이른바 모더니티를 배후에서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예술적 모더니티의 관념을 환기시킨다.
영화는 한동안 이 관념을 자신의 기술 - 과거의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관념/ 감각과 감동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대체
하는 반표상적인 예술 - 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스럽게 찢겨진 마르파의 치마는 저편으로 사라진 혁명의 환영이 지배했던 세기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 찢겨진 치마는 들뢰즈 책을 꽂은 채 1등석의 젊은 여인과 3등석의 젊은 사내가 침몰하는 배에서 벌이는 연애에
열광하는 우리가 도대체 어떤 세기에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무성의 타르튀프
프리드리히 무르나우는 1925년과 1926년 사이 <타르튀프>와 <파우스트>를 연출한다.
이 영화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 예술과 연극과의 관계가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사람들 - 장 엡스탱에서
로베르 브레송까지 - 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거장들을 포함한 몇몇 영화인들은 두“언어”가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무성시대에 연극의
걸작들을 영화에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들이 무성 이미지라는 유일한 수단으로 연극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를 원했으며,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영화는 위선자의 희극을 표현하기 위해 원칙적인 두 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첫째는 비이중성의 원칙이다.
이미지는 언제나 보여주는 것만을 보여준다.
이미지는 말의 이중성을 의도적으로 폐기한다. 우리는 이것을 ‘문프리트 효과’로 명명할 수 있다.
이 경우 이미지는 “나를 믿지마, 너에게 거짓말하고 있거든” 하고 말하는 사람을 스스로 반박한다.
둘째는 보충성의 원칙이다. 한 쇼트가 말하는 것을 반대로 말하려면 이 쇼트가 시작한 것을 완성하고 전복시키는 또
다른 쇼트가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연쇄의 계속성을 전제로 한다. 거리를 두고서 어떤 쇼트를 반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인간 사냥 : 두 시대 사이의 프리츠 랑
1955년 프리츠 랑이 감독한 <도시가 잠든 사이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와 영화예술에 대한 할리우드의
관행에 염증을 느낀 한 작가의 극단적인 비관주의를 표현하는 영화로 간주된다.
랑이 표현하는 비관주의의 대상은 정확히 무엇이며, 그는 이 비관주의를 어떻게 우화로 만드는 것일까?
혹자들은 이 영화 플롯의 핵심은 아모스 카인이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제국의 간부들 간의 냉혹한 경쟁이라고 말한다.
..그를 직접 보지 못하는 모블리는 (카메라를 통해)그를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통해 그에게 자신의 시선 앞으로 오라고
명한다.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살해범 앞으로 시점을 회전하는 역앵글 쇼트를 실행하는 카메라의 극적인 이동은 그가
TV앞으로 다가오는 효과를 예측한다.
기자가 집집마다 전하는 문자 그대로의 “대면”은 또한 “텔레비젼”이라는 용어의 의미자체를 전복하는 하나의 전의법
이다.
텔레비제는 TV에서 보여진 것이 아니라 TV가 겨냥한 것이다.
여기에서 TV가 겨냥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모블리가 말을 거는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하라고
호명된 살해범이다.
그러므로 카메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연극기법의 등가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발견이란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이다.
발견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해주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신원이 확인된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의
겹쳐놓기를 실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플로베르와 버지니아 울프 사이에서 문학이 획득한것은 바로 이 감성의 순수한 힘이다.
장 엡스탱이나 몇몇 영화감독들이 이미지 언어의 질감으로 삼고자 했던 것도 바로 감성의 힘이다.
프리츠 랑은 이미지 언어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았다.
그는 낡은 미메시스 예술을 배격하면서 영화를 새로 출현한 미학예술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프리츠 랑은 아주 이른 시기에 영화가 두 논리를 혼합하는 예술 - 에피소드들을 구조화하는 서사 논리와 서사를 중단
시키고 그리고 서사를 다시 낳는 이미지 논리 - 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또한 그는 영화적 미메시스의 혼합된 논리는 그 자체가 미메시스의 ‘사회적’ 논리와 관계를 지닌다는 사실, 영화적
미메시스는 사회적 논리에 대항하고 동시에 그 비호를 받으며 전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목소리의 전달과 타자의 시선이라는 구속이 탈주할 수 없는 상상의 역앵글 쇼트속에서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이런 연유로 <도시가 잠든 사이에>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독일 이민자의 환멸 이상의 것이 표현되고 있다.
영화가 연출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TV의 동일화 이다.
소년 감독
<제2부>
고전주의적 서사, 낭만주의적 서사
해야 하는 어떤 것: 안소니 만의 시학
.. 만은 프루스트가 지적한 대로 물건에서 붙어 있는 가격표를 떼고 그것을 선물하는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예술가이다. 그는 전설과 그 반향보다는 양식들과 그 잠재성들에 관심을 갖는 고전주의적 예술가이다.
고전주의적 예술가는 신화나 탈신비화에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단 하나의 분명한 작업, 신화를 하나의 우화로 만드는 작업에,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는 뮈토스에
관심을 갖는다. 뮈토스는 어떤 위대함, 하나의 고유한 크기, 하나의 템포 - 시작, 중간과 대단원이 없는 시간에서
뮈토스를 빠져나가게 하는 - 를 지니고 있는 행동하는 인간들의 표상이자 사건들의 결합이다.
따라서 고유한 시간을 지닌 어떤 것을 자율적 액션 체계속에 배치해야 한다.
자율적 액션체계는 한 이야기의 진행과정에서 추출된 것이라고 가정되는 어떤 에피소드를 여는 척하지 않는다..
누락된 장면 : 니콜라스 레이의 시학
<제3부>
영화의 모더니티는 존재하는 가?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하나의 이미지로? 들뢰즈와 영화 시대들
들뢰즈는 영화의 모더니티를 상정한다. 그는 서사적 연속성과 의미의 중요성을 위해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고전 영화와 이미지의 자율적 힘에 역점을 두는 현대 영화를 대별시킨다.
현대 영화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자율적인 시간성과 공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들뢰즈에 따르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오슨 웰스가 이 두시대의 단절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전통적 서사를 비연속성 및 현실의 본질적인 모호성과 대별시키면서 예측 불능의 영화를 발명
하고, 오슨웰스는 딥포커스의 발명을 통해 서사적 몽타주의 전통을 배격한다.
..그는 영화의 본질을 “자연적 통일성을 깨트리지 않으면서 인간과 사물의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사실주의적”
능력과 동일시 한다.
질 들뢰즈는 1980년대에 발간한 두 저작을 통해 영화 이미지의 엄밀한 존재론에 입각한 두 시대 사이의 단절의 근거를
구축한다.
들뢰즈는 우연의 철학자 앙드레 바쟁의 정당한 직관과 이론적 근사치에 그 견고한 토대 - 두 유형의 이미지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이론화 운동 - 이미지와 시간 - 이미지 - 를 제공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운동 - 이미지는 운동 - 감각적 구조 논리에 의해 조직된 이미지, 지각과 행동을 마무리짓는 연쇄
작용의 논리와 유사한 집합의 논리 속에서 다른 이미지들과 함께 자연적 연쇄작용을 하는 요소로서 파악된 이미지이다.
시간 - 이미지는 로셀리니 영화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더 이상 행동으로 변형되지 않는 시지작적, 음향적 상황의
출현에 의해 이러한 논리의 단절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공식화는 아주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들뢰즈의 분할이 낳는 두 개의 질문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검토하는 순간 이 분할은 불분명해 진다
첫째, 어떻게 이미지 예술의 내부적 단절과 역사 일반에 영향을 주는 단절 사이의 관계를 생각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작품들의 구체성 속에서 두 이미지 시대와 두 유형의 이미지 사이의 표지물들을 인식할 것인가?
첫 번째 질문은 “모더니즘” 사유의 근본적인 모호성과 관계를 갖는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더니즘의 사유는 예술의 현대적 혁명을 각각의 예술이 자기 고유의 본질을 표명하는 것
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현대”고유의 새로움이란 예술의 특성 - 그 본질이 이전 예술들의 표명들 속에 이미 표현되고
있었던 - 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미메시스의 틀을 부수면서 자율적 수식을 정복하는데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새로움은 항상 옛것 속에 예시돼 왔었다.
결국 “단절”은 감화적인 서사에 불가피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각 예술은 이 단절에 의해 항상 변함없는 고유의
본질을 증언하는 예술의 모더니즘 혁명의 완벽한 시나리오에 부합한다고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 고유의 예술성을
입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쟁은 웰스와 로셀리니의 혁명은 사실상 이미 무르나우, 프래허티나 스트로하임의 영화들에서
관찰됐던 영화의 자율적인 사실주의적 사명을 완성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유와 영화」라는 제목으로 『시네마 II 시간 - 이미지』에서 전개되는 브레송의 분석은 감동 - 이미지와
관련해서 들뢰즈가 이미 언급했던 것을 대부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제1권에서 운동-이미지의 구성요소들로서 분석됐던 동일한 이미지들이 제2권에서 시간-이미지를 구성하는 원칙들
로서 다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미지”의 대표적인 영화인에게서 “운동-이미지들”의 속성들과 대립되는 속성들을 지닌 어떤
“시간 - 이미지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운동 - 이미지와 시간 - 이미지는 어떤 경우에도 영화의 두 시대에 상응하는 대립된 두 유형의
이미지가 아니라고 기꺼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운동 - 이미지와 시간 - 이미지는 이미지에 대한 다른 두 관점이다.
비록 『시네마 I 운동 - 이미지』가 영화인들과 영화들에 대해 진술하고 있지만, 이 책은 물질 - 이미지의 사건들로서
영화적 형식들을 분석하고 있다.
『시네마 II 시간 - 이미지』가 『시네마 I 운동 - 이미지』의 분석을 다시 활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사유 -
이미지의 형식들로서 이 영화 형식들을 분석하고 있다.
『시네마 I 운동 - 이미지』과 『시네마 II 시간 - 이미지』는 한 영화 이미지의 유형과 시대에서 다른 영화 이미지의
유형과 시대로의 이행이 아닌 동일한 이미지들에 대한 두 다른 시각을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감정 - 이미지(운동 - 이미지 형식)에서 “시지각적 기호”(시간 -이미지의 본래적 형식)로 이행할 때, 우리는
한 친족의 이미지들에서 다른 친족의 이미지들로서가 아닌 동일한 이미지들의 한 가장자리에서 다른 가장자리로,
물질로서의 이미지에서 형식으로서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우리는 자연철학 요소들로서의 이미지들에서 정신철학 요소들로서의 이미지들로 이향하고 있는 것
이다.
자연철학으로써 『시네마 I 운동 - 이미지』는 영화 이미지들의 특수성을 활용하면서 카오스적 무한성으로 향하는
물질-빛의 변신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정신철학으로서 『시네마 II 시간 - 이미지』는 영화 이미지들의 특수성을 활용하면서 카오스적 무한성으로 향하는
물질 - 빛의 변신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정신철학으로서의 『시네마 II 시간 - 이미지』는 영화예술의 작업에 의해 어떻게 사유가 이 카오스에 상응해서
고유한 힘을 펼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 그리고 사유 - 의 운명은 사실 어떤 단순화시키기는 “디오니소스주의”에 따라서 이미지 - 물질 - 빛의 무한한
‘사이 표현성’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운명은 이 무한성을 자신에게 고유한 무한성의 질서 속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이무한성은 무한하게 큰 것에 필적하는 무한하게 작은 것의 무한성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표현은 “결정체 - 이미지”, 현재적 이미지를 잠재적 이미지와 연결하는 사유 - 이미지의 결정체 안
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지 - 결정체는 현재적 이미지를 잠재적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식별 불가능성 속에서조차 이 두 이미지를 구별
한다. 이 식별 불가능성은 현실과 상상세계의 그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예술과 사유의 현대적 이미지를 규정하는 사유와 비사유의 최초의 동일성을 완성하는 예술이다.
신체의 추락 : 로셀리니의 물리학
우리는 이 장면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운동 - 감각적 도식”의 계속성을 깨뜨리는 “시지각적 음향적 상황”을 식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레네의 “방향 상실”이 피나의 질주처럼 시대의 혼란에 대응하지 못한 이레네의
“방향상실”이 피나의 질주처럼 시대의 혼란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여자>의 붉음 : 고다르의 정치
1967년의 알튀세르주의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들이 여전히 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는 사조였다. 가장 기초적인 행동의 의미를 다시 배워야 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는 발명되어야 한다.
고다르는 자신 특유의 방법론, 예컨대 발췌, 특히 알튀세르 작품의 서문과 결론부분을 발췌하여 그것을 투사 오마르의
담론이나 기욤의 연설을 만드는데 이용한다.
..반대로 이미지는 담론이 된다. 우리는 이영화들에서 담론의 규칙에 예속되지 않은 ‘준’언어를 듣는다.
문제는 우리가 낱말을 “볼”때 우리는 더 이상 그 낱말을 들을 수 없게 되고, 이미지를 들을때 우리는 그 이미지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영화의 에피소드들 중 하나를 따라서 그릇과 토스트의 원칙으로 명명할 수 있다.
온수기 앞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면서 공산당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언표하는 앙리를 보자,
그가 하는 말의 사실주의적 무게감은 전적으로 이러한 소품들에 달려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만일 앙리가 이 말을 칠판을 등지고 했거나 또는 옛 동지들이 사는 아파트 거실에 놓인 탁자 뒤에서 했다면 이 말은
“민중의” 부엌안에서 “민중의 제스쳐”가 이말에 실어주는 설득력의 80%를 잃을 것이다.
..로셀리니 영화의 제목은 전멸된 세계를 환기시키며 살인적인 이념에 희생된 한 어린 아이의 비명으로 쓰인다.
고다르의 부제는 로셀리니 영화가 보여준 것 - 폐허가 된 무대, 돌차기 놀이를 하는 소년 - 을 말하고 있다.
테러리스트 베로니크에 배우 기욤을 대별시킨 영화의 도덕은 바로 이것이다.
폐허의 세계나 폐허로 만들어야 할 세계라는 상황 영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막이 오르는 무대와 한 명의 소년이 있을 뿐이다.
이 소년 배우는 소년 등장인물을 가벼운 몸짓으로 연기한다. 붕괴된 세계의 무게와 태어나야 할 세계의 무게가 이
소년 등장인물을 짓누르고 있다.
소년 배우의 연기와 허구 속 소년의 죽음을 향한 질주, 연극 노동자들의 작업과 혁명 노동자들의 작업은 서로 분리
되어야 하는가? 이 양자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들의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연극에 대한 성찰로 종결되는 두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내비치는 것이다.
<제4부>
영화 우화, 한 세기의 이야기들
다큐멘터리와 허구 : 마르케르와 기억의 허구
..기억은 정보의 과잉과 그 결함에 반해서 구성되어야 한다. 기억은 자료들 간의 사실들의 증언과 사건들의 자취들
간의 연관성,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뮈토스라고 명명하는 “사건들의 결합”으로서 구축되어야
한다.
뮈토스는 어떤 집단적인 무의식을 환기시키는 “신화”가 아니라 우화 또는 허구이다. 기억은 허구의 작품이다.
역사에 투철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은 모순적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진실을 위한 참을성 있는 연구와 일반적으로 지배권력과 특히 독재권력이 만들어내는 집단
적인 기억의 허구를 대립시킬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허구”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서로 대립하거나 혹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나 비열한 거짓이 아니다.
허구의 어원인 라틴어동사 핀게레의 첫 번째의 의미는 ‘~인 체하다’가 아니라 ‘벼려서 만들다’이다.
허구는 표상된 사건들, 결합된 형태들, 서로 조응하는 기호들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예술적 수단의 작동이다.
지어낸 이야기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활용하는 대신에, 일상적 현실 속에서 포착된 이미지들 또는 입증된 사건들에
대한 기록 보관소의 문서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사실 때문에 “다큐멘터리”영화가 “허구영화”와 상반된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현실을 바로 보는 시각에 있어 허구적 발명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다.
이 영화에 있어 현실은 생산해야 하는 하나의 인상이 아니다. 현실은 이해돼야 하는 소여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예술적 작업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허구와 동일시 하는 것 - 현실의 진실임직함과 인상에 입각한
상상적 작품 - 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허구로부터 예술적 작업을 고립시킨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예술적 작업을 그 본질에, 예컨대 하나의 이야기를 시퀀스들로 재단하고 쇼트들을 이야기로 편집
하면서 목소리, 소리와 신체들을 덧붙이고 분리시키며 시간을 늘리거나 단축하는 작업으로 되돌린다.
..무덤은 단순한 석재가 아니며 은유는 더더욱 아니다. 무덤은 시다.
르네상스 시대에 무덤에 헌정된 시들이 쓰여졌고 말라르메의 시도 그러한 전통을 계승한다.
또한 쿠프랭이나 마랭 마레시대에 작곡됬던 음악, 그리고 최근에는 라벨의 음악이 그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처럼
무덤은 한 다른 작곡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음악이다.
<알렉산더의 무덤>은 금세기의 러시아에 대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는 시적 또는 예술적 의미에서
한 예술가에게 예술적 정의를 표하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특정한 시학에 호응하는 한편의 시이기도 하다.
슐레겔은 이러한 역량들의 이상적인 결합을 “시의 시”로 언어의 삶, 공동체의 정신, 심지어는 광물질의 습곡과 줄무늬
속에 이미 존재하는 시성을 보다 높은 힘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는 시로 공식화했다.
낭만주의 시학은 이처럼 두 축 사이에서 전개된다. 이 시학은 말 없는 모든 사물에 내제된 말의 역량과 함께 말의
양태와 의미의 층위를 증가시키면서 자신을 증가시키는 시의 무한한 능력을 표명한다.
..대표적인 현대 예술인 영화는 그 어떤 예술보다 더 이 두 시학의 갈등을 감내하거나 혹은 두 시학의 결합을 시도
한다. 영화는 결정짓는 예술가의 시선과 기록하는 기계시선의 조합, 구축된 이미지와 우연한 이미지의 조합이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이 이중적 능력을 고전주의적 시학의 아류를 위한 단순한 예시 도구로서만 활용할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영화는 말하는 무언의 인쇄물과, 의미 형성과 진실의 가치를 산정하는 편집이라는 두 수단을 그 가장
드높은 능력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예술이기도 하다.
관습과 진실임직함의 고전주의적 규범에 입각한 “현실”의 묘사라는 사명으로부터 자유로운 “다큐멘터리”영화는
이른바 허구영화보다 훨씬 더 서사적 목소리들과 일련의 가변적인 시대, 출처와 의미 형성의 이미지들 간의 일치와
불일치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인쇄물의 능력, 이를테면 기계의 무언과 사물들의 침묵과의 만남에서 탄생하는 말의 능력과 이야
기와 의미를 구축하는 편집의 능력 - 기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가장 광의적인 의미에서 - 을 한데 통합할 수 있다.
편집은 의미들을 자유로이 조합하고 이미지들을 다시 검토하고 새롭게 연결하면서 이미지들이 지닌 표현방식과 의미
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확대시키는 권한을 갖는다.
진실영화와 변증법적 영화 - 철로 닿도록 납작 엎드려 있는 카메라맨을 향해 돌진하는 지가 베르토프의 열차와 유명한
오뎃사 항구의 계단을 가혹할 정도로 아주 천천히 내려가는 <전함 포테킨>의 유모차 - 는 동일한 시학의 두 모습이다.
..영화는 낭만주의 시학에 의해 미리 형성된 것처럼 이 시학으로부터 탄생한다. 영화는 어긋난 시간성과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체제의 교착으로서 기억의 구축을 허용하는 낭만주의 시학의 기표적인 형식의 변신들에 아주 적절한
예술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또한 예술적, 기술적, 사회적 본성에 있어서 현대의 살아있는 은유이다.
영화는 19세기의 유신이며, 20세기와 19세기의 관계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영화는 공산주의의 예술 - 과학과 유토피아를 동일시하는 예술 - 이었다.
1920년대 빛과 운동의 조합으로 낡은 인간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쫓아내려고 했던 곳은 베르토프, 에이젠슈테인,
메드베드킨과 도브젠코 등이 활동했던 혁명의 모스크바 뿐만이 아니었다.
카뉘도, 델뤽, 또는 엡스탱 등이 활동했던 미학의 파리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영화는 20세기의 단절을 구축하는 19세기의 소산물이었더. 영화는 빛의 왕국이 되도록 호명된 어둠의 왕국이었고,
마치 철로처럼 그리고 철로와 함께 혁명운동과 일체가 되는 운동에 대한 글쓰기였다.
마르케르는 <알렉산더의 무덤>에서 소비에트 체제와 영화와의 이중적 관계에 대한 영화사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영화감독들의 운명을 통해 그리고 이들이 제작했거나 제작하지 않았던 영화들 또는 제작을 강요받았던 영화
들을 통해 소비에트 세기의 역사를 말할 수 있다고 시사하고 있다.
영화제작이 강요된 이유는 영화가 공동 운명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예술로서 영화가 소련 체제 속에서 정치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세기의 관념과 역사의 관념에 대한 은유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케르의 진술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고다르 <영화사>의 의도와 부합한다.
<영화사>는 20세기의 역사를 역사가 아닌 이야기들 또는 영화 이야기들을 통해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영화가 20세기와 동시대에 속할 뿐만 아니라 이 세기의 “관념”그 자체를 구성하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소비에트 꿈의 공장과 할리우드 꿈의 공장이 거울에 좌우로 비춰진 이미지와 같이 친족성이 있음을 지적
했고, 국가 체제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영화 산업의 미래가 세기의 두 유산 사이에서 동일한 갈등에 직면하고 있
다고 묘사한다.
..영화가 지닌 최초의 꿈은 낱말들의 언어보다 더 정확하게 신체들의 운동과 일치하는 언어 - 통사론, 건축 또는
교향곡 - 를 구축하는 꿈이었다.
이 꿈은 무성영화 시대와 마찬가지로 유성영화 시대에 계속해서 말하는 능력의 한계와 “낡은”언어의 복귀와 대결
해야만 했다.
“다큐멘터리”영화는 언제나 진실영화의 모호성, 편집의 변증법적 기교, 거장의 보이스오버의 억압적 성격 사이에
포획 되어 있다.
보통 화면 밖의 목소리로 나타나는 거장의 목소리는 선율적인 계속성으로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연쇄를 중복시키
거나, 또는 이 말없는 이미지들의 현전이나 우아한 아라베스크 문양에서 독해해야 하는 의미를 신중하게 강조한다.
..<알렉산더 무덤>은 기억의 허구이며 공산주의와 영화가 교착되어 있는 하나의 기억이다.
하지만 마르케르는 예술적 수단을 통해 구축된 이 기억의 허구를 “기억에 대한 교훈” 기억의 의무에 대한 교훈으로
점철되게 한다.
그래서 화면 밖의 목소리는 이 이미지를 잊어서는 안 되며, 이 이미지는 어떠한 이미지와 연결해서 면밀히 관찰해야
하고, 이 이미지는 일차적인 이해를 뛰어넘어 다시 독해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강약을 조절하며 관객에게 말한다.
영화감독은 <전함 포테킨>의 쇼트들과 같은 계단을 보다 느리게 그리고 보다 빠르게 내려오는 오늘날 보행자들의
쇼트들을 교대로 보여주는 편집을 통해 에이젠슈테인의 기법을 시각적으로 입증한다.
이러한 입증은 이미 예견됐으며, 교수의 설명은 그것을 중복되게 한다.
그렇긴 하지만 교수의 해설이 생략됐다면 이 시각적 입증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처럼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하는 이미지나 이미지들의 편집을 이미지를 약화시키면서 의미를
보장하는 목소리의 권위에 끊임없이 되돌려 보내면서 작동된다.
의심할 나위없이 이러한 긴장은 다큐멘터리적, 역사적 허구가 영화의 역사적 능력에 있어 한편의 영화와 동일시 하는
경우 최고치에 도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죽은 감독에게 보내는 “편지”의 허구는 해설자의 목소리에 전적인 권위를 보장하는 수단이다.
이 쟁점은 비단 교육과 예술 사이의 난처한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가 속하는 낭만주의 시학의 요체, 즉 무언의 사물들에게 빌려주는 말의 능력과 작품에 부여된 자기반성적
능력의 결합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헤겔이 『미학강의』에서 어떻게 이러한 낭만주의 시학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배격했는지 알고 있다.
헤겔은 형식의 능력, 즉 작품 특유의 “사유를 넘어선 사유”의 능력은 개념적 사유 - “사유 자체” - 에 고유한 자기반성적
능력과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이 양자를 동일시하려는 의도는 작품을 오직 하나의 탁월한 기교, 한 개별적인 서명을
입증하는 것으로 귀착하거나 또는 작품을 형식과 의미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상징주의적인 유희로 돌려보낸다.
이 유희에서 형식과 의미는 서로의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가 자신을 영화의 영화로 간주하거나 또는 한 세기를 독해하는 도구로서 자신을 취급하는 경우에 영화는 동일한
위험을 안게 된다.
이런 경우 영화는 고다르의 스타일을 특징짓는 이미지, 소리, 형식, 의미의 끝없는 반송과 마르케르의 방법에서 드러
나는 해설하는 목소리의 권위 사이에 감금된다.
..컴퓨터가 만든 이미지 특유의 후광 없는 비현실성은 이 영화가 조합한 다양한 출처의 이미지들과 소통한다.
그리고 허구와 의미 층위의 축소는 비디오 공간의 단조로움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다.
“말하는 이미지들”과 이 이미지들을 말하게 하는 낱말들 사이의 긴장은 결국 이미지에 대한 관념과 이미지화된 물질
사이의 긴장으로서 드러난다.
이것은 기술적 배치가 아닌 시학과 관계된 문제이다.
고다르도 마찬가지로 비디오를 활용하지만 마르케르와 반대되는 결과물을 만든다.
고다르는 낱말과 이미지의 즐거운 무질서를 아이콘의 영광으로 이끈다.
그는 20세기 허구들의 단편들을 조합하면서 회화적 형상을 승계하는 영화적 그림자의 정신적, 조형적 왕국을 영속케
한다.
설치예술에 근접한 마르케르 영화가 영속케 하는 것은 반대로 그림자 왕국의 물질적 광채를 제물로 삼아 입증되는
조합과 간극의 조작으로서 이미지이다.
한 세기와 이미지의 기술혁명을 결산하는 시기에 “시의 시”는 이처럼 아주 근접하지만 근본적으로 대립된 두 개의
형상을 발견한다. 하나의 무덤에 맞선 또 하나의 무덤, 하나의 시에 반하는 또 하나의 시.
도덕 없는 우화 : 고다르, 영화, 이야기들
<영화사> 이중적 뜻과 가변적인 외연을 지닌 이 타이틀은 고다르의 복잡한 예술적 장치를 정확하게 개괄하고 있다.
이 예술적 장치는 영화의 역사가 자기 시대의 역사와의 어긋난 만남의 역사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영화가 자기 세기와의 만남을 그르친 이유는 영화가 자신 고유의 역사성, 즉 자신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이야기의
잠재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하지 못한 이유는 미술전통으로부터 계승된 이미지 특유의 역량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이미지를 플롯과 등장인물의 문학적 전통에서 계승된 시나리오가 제시하는 “이야기”에 예속시킨다.
이 테제는 이처럼 두 종류의 이야기들 - 집단적 상상세계를 현금화하려는 영화산업이 이미지들로써 예시했던 이야기
들과 이 동일한 이미지들이 간직하고 있는 잠재적인 이야기들 - 을 대별시킨다.
그러므로 <영화사>를 구성하는 편집은 20세기의 영화들이 지니고 있던 이야기들과 영화인들이 텍스트에 내재된
“죽음”에 이미지들의 “삶”을 예속시키면서 빠져나가게 했던 이야기들의 역량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고다르는 이 영화인들이 만들었던 영화들을 활용하면서 그들이 만들지 않았던 영화를 만든다.
..고다르의 영화가 표명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속죄이다. 닭이 울기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영화가
자신의 유죄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지’의 역량이 아직 영화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영화 이미지의 역량
에는 모든 배신에 저항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고다르에 의하면 재앙과 공포가 난무했던 시절에 이미지의 구원적 덕목을 보존했던 것은 “초라한 뉴스 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학살현장의 촬영을 위해 죽음의 수용소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는 넓은 의미에서 “거기에 있었다”영화는 자신이 찍었던 사태들, 파괴와 고통 앞에 있었으며, 이 사태
들을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들겠다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이 사태들이 스스로 말하게 했다.
..그림의 구성요소들과 영화의 시퀀스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라내고 다시 붙이는 조작자의 제스처가 아니고서는
순수 현전의 아이콘은 불가능하다.
순수 현전을 가치화하면서 이미지들을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작해야 한다.
여자 신체를 향해 부는 바람 이미지는 최초의 “속삭임”을 표현하는 은유로, 죽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블로뉴
숲의 가장 젊은 여인”은 영화가 직면한 위협의 증후로 총에 맞은 토끼들은 대량학살의 전조로 이해돼야 한다.
언어와 의미의 제국을 거부하면서 이미지들의 연쇄를 동음이의어와 낱말놀이에 예속시켜야 한다.
고다르의 영화는 이러한 조작을 통해 미학적 시대의 서로 대립하지만 유대적인 두 시학 - 형태의 물질성 속에서 사유
의 급진적 내재성을 표명하는 시학과 스스로를 대상으로 삼는 시들의 유희를 무한하게 배가 시키는 시학 - 사이의
끝없는 긴장을 연장한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모든 이미지들을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관계를 갖게 하는 이러한 내면성의 관계이며, 이 내면
성은 우리가 있지 않았던 곳에 있게 하고 산출되지 않았던 접속을 산출하며 모든 “이야기들”(역사들)을 다르게 재현
한다. 바로 이것이 “고발”의 기초가 되는 급진적인 우수의 원천이다.
역사는 전지전능과 편재의 약속이다. 하지만 전지전능과 편재는 관계하는 현재 이외에 다른 현재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능이기도 하다.
결국 자신을 죄인으로 고발하고 벌거벗은 이미지의 속죄를 간청하는 것은 바로 이 “초과된 능력”이다.
하지만 속죄는 또 한번의 초과와 다시 한번 나선을 조여야 하는 대가를 치른다.
그리고 이 보충물은 반대로 이미지들의 거대한 조작이 전적으로 무해하며 무한하게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이제 고다르 영화에 “누명 쓴 사람”이라는 형상이 자주 출몰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누명 쓴 사람”은 히치콕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으로 범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엡스키의 해석은 다르다.
그에 따르면 누명쓴 사람은 범인으로 지목되기 위해 헛되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대립된 추론에 의해 자신의 성스러운 임무를 증명하고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결백을 도처에서 증명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고다르 기획이 지닌 가장 내밀한 우수인지 모른다. 영화의 도덕은 그 우화처럼 엇갈리게 구성된다.
==The end ==
자크 랑시에르 지음, 유재홍 옮김(인간사랑, 2011)
(jupiterj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