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칼의 대결-서희와 소손녕
"와아아아! 안융성을 함락시켜라!"
10만의 거란족 병사들은 자비령의 안융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맹렬히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고려의 군사들도 서희를 주축으로 강하게 저항했다.
"힘을 내라! 우리가 어찌 거란족에게 패배할 수 있단 말이냐!'
싸움은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거란족은 안융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싸움은 장기
화의 조짐을 보였고 붉게 물든 저녁 노을처럼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압록강 건너 만주 지방에 요나라를 세우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
시키고 있었다. 그들과 맞서는 고려가 북진정책을 수립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요나라는 10
만 병사를 동원하여 993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했다.
"요나라가 저렇게 많은 군사를 몰고 와 우리 고려를 괴롭히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고려 임금 성종은 소손녕이 이끄는 요나라 군사들이 연일 승리를 거두며 파죽지세로 밀려
들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하들도 모두 의기소침하여 임금만을 쳐다볼 뿐 별다
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마, 요나라에 파견되었던 이몽전 대감이 돌아왔사옵니다."
"그래, 어서 들라 이르라."
"마마, 신 이제 돌와왔사옵니다."
"인사는 그만 두고. 그래, 요나라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이유를 소상히
말해 보아라."
"네, 신이 적장 소손녕을 만나 의견을 알아본즉, 자비령의 북쪽땅을 모두 내놓으면 당장에
철수할 수 있다고 하옵니다."
"뭣이 자비령 북쪽 땅을?"
"그렇습니다, 마마. 저들의 태도는 매우 불순했으며, 또한 10만이나 되는 대군이 있기에
미처 싸움을 대비하지 못한 우리한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옵니다."
이몽전의 말에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긴장된 얼굴을 펴지 못했다. 모두들 요나라와의 싸
움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손녕의 군사들은 단숨에 봉산군을 함락시킨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마, 저들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러니 이번 싸움은 피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사려되옵니
다."
"그렇습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자비령 북쪽은 수확이 적어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지역이므로 내준다 해도 큰 손해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그대들의 의견은 알겠으나 그들이 다시 우리를 침략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자비령의 군량미들을 모두 대동강에 버려 요나라가 쓰지 못하게 하여 우리도 군사를 키
워 침략에 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모두들 요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있던 서희는 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이 무슨 망발이오. 어떻게 우리의 땅을 거란족과 같은 아둔한 무리들에게 내줄
수 잇단 말이오. 이번 요구를 들어준다면 저들이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요구를 해올지도 모
르는 것이 아니오. 마마, 비록 우리가 힘이 약하나 군량미나 물자면에선 저들보다 유리한 입
장이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전략에 달려 있습니다. 맞서 싸워야 합니다! 저희
가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물자가 떨어져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
다."
서희가 강하게 싸울 것을 주장하자 성종은 그의 기백에 감동하여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고려는 거란족의 침입에 맞서 대항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전쟁이 별다른 변화없이 지지부
진하게 진행되자 요나라 군사들은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맥빠지는 접전만이
거듭될 뿐이었다.
"장군, 싸움이 장기화된다면 저희가 불리합니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식량은 얼마가지 못
해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사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고려 군사들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대항하지 어쩔 도리
가 없지 않소. 무슨 뾰족한 방법이 없겠소?"
"저들이 맞싸움을 전개한다면 모르겠으나, 저렇게 방어만을 하면서 시간을 끌어대니 별다
른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계속 공격을 감행하여 적이 지치도록 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소손녕은 가슴이 답답했다. 참모진들은 안융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알지 못했다. 또한 식량
도 거의 떨어져 간다는 소식에 마음만 조급할 뿐이었다. 소손녕의 군대는 처음과는 달리 점
차 사기가 떨어지고 피로도 누적되어 오히려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이들의 동태를 눈
치챈 서희는 임금을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
"마마, 제가 저들을 찾아가 이 싸움을 끝내도록 해보겠습니다. 부디 소신을 보내 주시옵
소서."
서희를 신임하고 있던 성종은 그의 말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서희의 기백이라면 능히
소손녕과 맞설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좋소. 그대의 생각대로 한번 해 보시오."
임금의 승낙을 받은 서희는 혼자서 거란 진영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
에 놀란 소손녕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올 것을 명하였다.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 자리에서 밀린다면 싸움에서 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서희는 마음을 차분
하게 가지려 애를 썼다.
"적장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소손녕은 서희의 진의를 알기 위해 천천히 입을 뗐다. 하지만 서희는 서두르지 않았다.
"요나라가 자비령 북쪽을 내놓으라는데 그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궁금합니다."
소손녕은 잘 다듬어진 수염을 매만지며 서희를 노려보았다. 대의명분이 적절하지 못할 시
에는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요나라가 고구려의 옛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이었던 자비령은 우리 요나라의 것이
당연하지 않소."
소손녕의 대답에 서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구려의 후손이라면 그건 당연히 우리 고려가 아니오. 무엇보다 나라 이름이 그렇지 않
소. 또 옷 입는 것이나 먹는 음식 그리고 풍습과 말이 고구려와 같지 않소?"
자신들이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라고 주장하던 소손녕은 서희의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떠한 말로도 서희의 말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서희는 소손녕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때
를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두 나라가 싸움을 한다는 것은 국력의 낭비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소손녕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희의 말은 적절했으며, 싸움은 지지부진하
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도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고려가 자신들과 외교관계를 맺
자는 제안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문제는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니 전령을 본국에 보내어 고려의 뜻을 전달
해 보겠소."
소손녕은 급히 서희의 의견을 적은 전문을 자신의 임금에게 보내었다. 그리고 고려와 강
화를 맺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요나라 본토에서 회답이 오려면 7일을 기다려야 하니 이곳에서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그렇게 하겠소."
소손녕은 비록 적일지라도 지적이고 기백이 넘치는 서희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매일
잔치를 베풀어 서희를 깍듯하게 대접해 주었다.
"장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본국의 전문이 도착했다는 보고에 서희와 소손녕은 요나라 임금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무척 궁금했다. 전문을 읽던 소손녕은 미소를 지으며 서희를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서희가
모를 리 없었다.
"우리 임금께서 그대들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소."
이로써 고려는 요나라로부터 홍화진, 귀주, 용주, 철주, 통주, 곽주 즉 강동 6주를 되찾게
되었다.
"아주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이제 양국은 친구의 관계로서 싸움보다는 서로가 어려
울 때 도움을 주는 선린관계가 되었으니 잔치를 베푸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 날 요나라 진영에서는 거대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그리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해서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 서희의 인간됨에 소손녕뿐이 아니라
요나라 임금도 그의 기백에 감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손녕은 서희와 헤어지면서 낙타 10
마리와 말 1백 필, 양 1천 마리와 비단 5백 필을 선물로 주었다.
서희는 994년에는 두만강 쪽의 여진족을 무찌르기 위해 출정하기도 했다. 고려를 받들던
여진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동북지방의 두만강 국경을 자주 넘어와 고려의 백성
들을 괴롭혀 그를 제지하기 위함이었다. 서희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곳에 여섯 개의 성을
쌓는 큰 공적을 세워 다시는 여진족이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서희가 직접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지음으로써 전쟁의 위험에서 고려를 구한 그의 기백
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적장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조리 있는 말솜씨로 강동 6주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되찾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서희가 있었기에 고려는 거란과 여진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의 뛰어난 외교실력은 싸움보다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감이 되었다.
자비령 북쪽의 땅을 두고 벌인 두 사람의 담판은 전쟁의 위험에 슬기롭게 대처한 외교적
사건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