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가듯이 / 김시헌
무료한 때가 있다.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지만 어디 쉬운가. 연령에 맞고, 적성에 맞고, 체력에 맞는 일거리는 세상에 많지 않다.
아침의 산책, 늦은 시간의 식사, 세수를 끝내면 아침 10시가 된다. 가야 할 곳도 없고, 부르는 사람도 없고, 꼭 읽어야 할 책도 없다. 커피 한 잔을 만들어서 3층 건물의 유리창가에 앉으면 길 건너의 맞은편 집이 보인다. 5월의 새싹이 가지마다 무수히 열려서 정원 가득히 서 있다. 나무는 집주인이 심어 놓았지만 감상은 내가 더 많이 한다는 생각도 해 본다. 거기 참새가 앉아서 짜륵짜륵 울고 있으면 봄날의 산골짜기를 연상한다.
나무에 취하는 감정도 잠시, 나는 또 다른 욕구를 일으킨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돌려놓는다. 왕-하면서 음악이 터져 나온다. 고전음악이다. 누구의 어떤 곡인가는 모르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또 선택의 자유도 없다. 보내주는 대로 듣기만 하면 된다. 생활에도 변화가 있어야 되는 모양, 음악에도 선율에 변화가 많다. 개울물처럼 잔잔하던 흐름이 갑자기 노도처럼 사납게 뛰다가 다시 잔잔한 흐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가슴으로 파고 들어가는 음악은 몸 전체를 짜르르 떨게도 한다. 음악으로 육체를 청소한다고 할까. 감정뿐 아니라 육체의 청소도 된다. 광활한 평원을 달리는 때는 나도 함께 들녘 사람이 되고, 맑고 높은 꿈을 더듬을 때는 20대의 청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디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온종일 한 곳에 있을 수는 없다. 밖에는 오월의 푸른 기운이 바람을 타고 넘실거린다. 발걸음은 어느덧 서실로 향한다. 10년을 넘도록 붓글씨를 써 왔지만 진전이 없다. 좀 나은 듯하다가 다시 돌아가고…. 그 반복의 연속이 있을 뿐인데도 싫증은 나지 않는다.
"안녕하십니까?"하고 들어서는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서실의 원장님이시다. 그도 학교에 근무하다가 정년 퇴임을 하고 서실을 열었다. 시간 보내기가 좋다고 하는 원장님은 순수하고 소탈하다. 손수 불을 때고 차를 끓이는 동작을 도와서 마주 앉으면 제한 없는 화제의 꽃이 핀다. 학생들이 몰려 올 때까지는 그도 한가한 시간이다.
글씨를 쓴다기보다 사람을 만난다고 할까? 어떤 때는 붓 한 번 잡아 보지도 않고 이야기만으로 서실에서 나온다.
다음에는 어떻게 하나? 시간은 앞에도 남고 뒤에도 남는다. 나는 홍수처럼 흐르고 있는 시간 위의 부표가 된다. 나가라고 떠미는 사람도 없는데 밀리는 사람처럼 서실 밖의 사람이 된다. 목적도 없이 버스 정거장 쪽으로 발을 옮긴다. '어디로 가나?'하는 의식조차 버리자. 버스가 가는 곳까지 가고,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 어느덧 나는 버스 안의 사람이 된다. 창으로 날아 들어오는 바람이 좋다. 먼지 바람이 아니고 5월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 착각이 더욱 정확하기를 기대한다.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제목이 생각난다. 그 때가 이십 년 전이었으니까 지금은 '초만원이다' 해야 될까? 밀려오는 수많은 차량이 그대로 기계의 물결이다. 바다의 파도가 다음으로 다음으로 해변을 향해 몰려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오면 어떠랴? 뒤에도 차, 앞에도 차이지만 나는 버스 안의 안전지대에 앉아 있다. 소란 속의 평화에 오히려 매력을 느낀다. 마음속에 들길을 연상하기도 하고 강변의 흰모래를 연상하기도 하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난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다.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를 다행으로 생각한다.
버스가 한강 다리 위로 올라간다. 왼쪽을 보아도 물결, 오른쪽을 보아도 물결이다. 말없이 흐르고 있는 한강에 끝없는 믿음이 간다. 한강은 표정이 없으면서 또한 있다. 항상 그대로 흐르고 있으니 표정이 없고, 항상 잔잔하게 물결을 치고 있으니 표정이 있다. 몇 십만 년을 흘러 왔을까 지구가 생기고부터 흐르기 시작했다면 몇 억만 년이 될까. 그때의 그 표정이 한강의 얼굴이라면 영원은, 바로 한강 위를 흐르고 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강물 위에 와서일까? 문득 이러한 시구가 날아 들어온다. 그렇다! 나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고 있는 지구 위의 나그네가 아닌가. 상상은 더욱 넓어지면서 달과 별과 해와 땅 사이를 가고 있는 내가 된다. 그것은 너무도 정확한 나의 파악이다. 내가 만약 달 속의 사람이었다면 그 또한 별과 달과 해와 지구 사이의 나가 아닌가? 우주가 무한대하다면 그 무한대의 중심에 나는 언제든지 존재하고 있다. 무한대에는 변두리가 없다. 변두리가 중심이고, 중심이 곧 변두리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무한대의 주인이 된다. 나라는 개체(個體)를 버리면 무한대가 된다. 비로소 나는 나를 초월한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진짜로 나그네일 뿐 그 존재는 나와 상관없는 그 무엇이다. 무료하다는 것은 나를 나에게서 떼내는 시발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