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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마태오 5,33-37
<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요즘 애인이 변심했다고 하여 애인을 찾아가 보복을 해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애인의 집을 차로 들이박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불과합니다.
정말 엽기적인 사건들도 많이 나옵니다.
영국에서는 여 치과의사가 변심한 옛 남자친구가 치통을 호소하자 치아 32개를 몽땅 뽑아 보복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믿어야하는데 그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나다보면 헤어질 수도 있을 것임을 몰랐던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에게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척이 잠깐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가지고 있는 현찰, 그러나 지금까지 모은 모든 돈을 차용증도 없이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억 단위를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잘 믿고 베푸는 사람인데 자신에게 왜 그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답답해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굳게 믿었는데 배신이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느님처럼 완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도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믿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완전합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까?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잘못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완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완전할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맹세를 한다는 의미는 그 맹세한 것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맹세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완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꺾으십니다.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이 맹세를 지킬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말은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나는 자꾸 자신을 높이고 내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맹세도 하는 것입니다.
아예 말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면 우리 힘이나 말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자꾸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는 미사도 빠지지 않고, 성경도 매일 읽고,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는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저는 당신 도움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것이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큰일을 이루어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여주기만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에는 성모님께서 많은 일을 한 이들보다 더 좋아 보이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우리 부족함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5,33-37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 맹세!
맹세 비슷한 용어가 있습니다.
공약입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어떤 사업이나 일에 대해 백성들 앞에 실행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유권자들은 ‘혹시나?’ 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당선이 되고 나면 ‘역시나!’하고 실망합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촛대, 금속판, 금화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간에 오고 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돌아보니 지키지도 못할 실없는 약속들을 참 많이 남발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습관처럼 빈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실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조만간 전화 한번 할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맹세합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주님,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선심 공약, 빈말, 거짓 맹세, 탓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도 말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가 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말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기도할 때도 깊은 침묵 기도보다는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이것저것 다 갖다 붙였던가 봅니다.
뿐만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강하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 심지어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머리를 두고까지 맹세하곤 했나 봅니다.
허언(虛言)을 남발하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맹세와 관련해서 정확한 한 가지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을 할때는 복잡하게 늘어놓지 말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잔머리를 굴리지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솔직해지라고 하십니다.
덧붙이지도 빼지도 말고 마음속에 있는 언어, 그대로를 표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내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표현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느낌, 사랑의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내용이라든지,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 상할 것이라면, 얼마나 또 망설여지는지요?
정직하고 진솔한 언어 사용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무한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상을 향한 기도와 정중한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그를 아예 무시한다거나, 깔보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조언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상대방을 향한 솔직한 언어 사용이지만, 상대방의 성장과 선익을 간절히 위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어려운 직언(直言), 고언(苦言), 충언(忠言)도 가능하게 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강론>
(2024. 6. 15. 토)(마태 5,33-37)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1) 이 말씀은, 십계명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와 제8계명,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와 관련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두고’, 또는 ‘하느님을 걸고’ 맹세하는 일은, 하느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죄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또 그 맹세가 거짓 맹세라면 십계명 제8계명을 위반하는 죄가 됩니다.
여기서 ‘하늘, 땅, 예루살렘, 자기 머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맹세할 때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피하려고 사용한 표현들인데, 그런 것들을 두고 맹세한 것은 사실은 하느님을 걸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니까 신성 모독이 아니라고 억지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 주장 때문인지,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맹세를 아예 하지 않으면, 맹세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2) 신약성경 히브리서를 보면 ‘맹세’에 관한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히브 6,13-14).”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히브 6,17).”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말씀은 창세기 22장 17절입니다.
창세기에서 그 부분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창세 22,16).
<하느님께서는 왜 굳이 ‘맹세’의 형식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맹세’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배려일 것입니다.>
그처럼 하느님도 ‘맹세’를 사용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맹세’ 자체가 악한 일이기 때문인 것은 아닌 것이고, 악한 의도로 맹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면, ‘맹세’의 형식을 사용한 경우가 보입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2코린 1,18).”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합니다. ......(2코린 1,23).”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한다.’ 라는 말과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한다.’ 라는 말을 겉으로만 보면, “아예 맹세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오로 사도가 정면으로 거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은 “내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 같은 세상 사람들의 맹세와는 다른 것이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3)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는 ‘선’을 뜻하고, ‘아니요.’는 ‘선’이 아닌 것, 즉 ‘악’을 뜻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선’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고, ‘악’을 ‘악’이 아닌 것처럼 꾸미는 인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는 것은
진실을 진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한 일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악한 일을 하면서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선한 일이다.” 라고 착각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바오로 사도를 죽이고 싶어 했던 자들이, 자기들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두고 맹세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마흔 명이 넘는 사람이 바오로를 치려고 매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오로를 없애 버리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사도 23,21).”
그들이 하느님을 두고 한 맹세를 지켰다면
굶어죽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진심으로 바오로 사도를 죽이고 싶어서 그런 맹세를 했을 텐데, 즉 거짓 맹세를 한 것은 아닐 텐데, 바오로 사도를 죽이려고 하는 일도, 그것 때문에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일도, 맹세를 지키지 않은 일도 모두 악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태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면, 신성 모독죄가 추가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