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색비공(非色非空)
[본문]
만약
내가 법을 설할 때에
그 음성을
분별하는 것으로
너의 참마음을 삼는다면
이 마음이
응당 음성을 여의고도
항상 분별하는 성품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어떤 나그네가
여관(旅亭)에 기숙하여
잠시 머물렀다가는
바로 떠나고
항상 머물지 못하지만
여관의 주인은
도무지 갈 곳이 없어
주인이라 하는 것처럼,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약
참다운 너의 마음이라면
갈 곳이 없을 것인데
어찌 소리를 여의었다고 해서
분별하는 마음의
그 본성까지 없어지겠느냐?
[若以分別我說法音爲汝心者인댄 此心自應離分別音코도 有分別性이라 譬如有客
寄宿旅亭하야 暫止使去終不常住어니와 而掌亭人都無所去할새 名爲亭主이니 此
亦如是若眞汝心인댄 則無所去리니 云何離聲無分別性고 ]
[해설]
<만약 내가 법을 설할 때에
그 음성을
분별하는 것으로
너의 참마음을 삼는다면
이 마음이
응당 음성을 여의고도
항상 분별하는 성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에서
소리를 듣고서야
안다고 하면
소리가 없어지면
그 성품도
없어지는 것 아니냐,
즉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소리를 듣고서
'이것은 내 마음이다'라고
여기는 건
참 마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 다음 구절에,
부처님의 설법하시는 소리를 듣고,
이것은 무슨 말씀이다
하는 걸 알지,
그 음성을 떠나서는
분별이 없지 않느냐,
그러니깐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소리를듣고서
그걸 마음이라고 하면
부처님 설법이 없어지면
그 마음도 없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여관집에 잠깐 묵었던 손님이
볼일이 끝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관집 주인을 찾아야 됩니다.
[본문]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어찌 음성을 분별하는
마음 뿐이리요!
그대가 여래의 얼굴을
분별하는 것도
모든 색상(色相)을
여의고는
그 분별하는 성품이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더 나아가
육진(六塵) 등을
전혀 분별 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는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닐 것이니
저 구사리(拘舍離) 들이
어리석게도 이를
명제(冥諦)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則豈唯聲分別心이리요 分別我客도 離諸色相이면 無分別性이니 如是乃至分別
都無하야 非色非空일새 狗舍離等昧爲冥諦니라 ]
[해설]
<그대가 여래의 얼굴을 분별하는 것도
모든 색상(色相)을 여의면
그 분별하는 성품이 없을 것이다.>
에서
부처님은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로
신체가 구족되어 있는데
그걸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이와같이 더 나아가
육진(六塵) 등을
전혀 분별 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는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닐 것이니>
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등등은
그 대상을 떠나서는
그 자체는 자성이 없고,
몸으로 지각하든
마음으로 생각하든
모두가
生과 滅을 떠나서는
없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작용하는 것도
모두가
환경을 분별하는 작용밖엔 못합니다.
이 환경을 떠나서
본성자리를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비색비공(非色非空)>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진(六塵)을
떠나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체는
색(色)이라고 할 수도 없고,
공(空)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자체가
허공과 같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설사 마음으로
가만히 선(禪)을 한다고 할 때
가만히 앉아서
듣고 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는
생각하는 것이니까,
즉 의심의 마음 작용이
있는 것이죠.
지금 간화선 수행도
의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니깐
모두
생멸심(生滅心)
작용이 있읍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불생멸(不生滅)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
부처님 자리에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인데,
생멸하는 마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수행은 처음부터
마음을
넘어선 자리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해탈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생멸심으로 시작해서는
참마음을
얻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 구사리(拘舍離) 들이 어리석게도
이를 명제(冥諦)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서
의근(意根, 원인체)
명상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이 6근의 작용이 다 없어지고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경계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의근의 작용인
생멸인데,
모든 의식작용의
멸(滅)입니다.
즉 6식의 끝은
원인체이고
원인체를 지나면
대원인체인 "내가 있다"인
존재의식에 도달합니다.
원인체와 대원인체도
역시
미세한 의식작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베단타 학파들은
대원인체
즉,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최종 해탈처라고
말하는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수행단체에서는
원인체의 망각상태를
마음의 본체라고 여기는
단체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원인체의 체험상태를
명제(冥諦)라고 하는 외도들에 대해서
부처님이
잠깐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원인체는
'망각상태인 깜깜하다'는 뜻의
명(冥)과
'옳다, 적당하다, 살피다'는 뜻의
제(諦)를 붙여서
명제(冥諦)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마음의 본체라고 여긴 것이
이 '명제(冥諦)'라는 것인데,
이것이
현대 베단타학에서는
'원인체'(原因體)라고
부르며,
'6식의 뿌리',
'무지',
'망각'
등으로 불리고,
그 원인체를 넘어 있는
대원인체를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뿌리,
또는
'지'(知)라고 부르며,
절대진아는
그 대원인체를 넘어서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일부 베단타 수행단체에서
원인체를
마음의 최종 바탕으로
잘못 가르친 곳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도 처음에는
이러한 외도(베단타파 수행단체)에서
6년 동안
수행(고행)을 하시면서
선정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 선정 경지가
'명제'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거기에서도 성이 차지 않아서
그 수행을 버리고 나서야
그 경지를
초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명제(冥諦)라는 경지가
원인체 혹은 대원인체
수준의
경지가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본문]
이와 같이
모든 대상과의 인연을 떠나
거기에
분별했던 성품도
따라
없어진다면
그러한 너의 심성(心性)은
각기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니
이를
어찌 주인이라고 하겠느냐?”
[離諸法緣하야 無分別性인댄
則汝心性이 各有所還이니
云何爲主리요 ]
[해설]
그 외도들이 말하는
'멸진정'(滅盡定, 원인체)은
멸진 때문에
생긴 것이니깐,
멸진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
온곳이 있다면
그 왔던 곳으로
돌려 보낼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망각의 원인체도
망각이라는
상태에서 왔으니,
망각으로
돌려 보낼 데가 있다는 것이죠.
이 말은 무엇인가
돌려 보낼 데가 있다면
그것은
주인(참나)이 아니고
객진(客塵),
또는
잠깐 지나가는 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ㅡ 능엄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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