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요동의 제왕, 이성량(이여송의 아버지)
이성량(1526∼1618)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李如松, 1549 ~ 1598)의 부친이다. 그의
조상은 본래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 초기에 요동으로 건너가 철령(鐵嶺)에 정착했다. 뒤에 군공을 세워 철령위 지휘첨사
(指揮僉使)가 되었고 40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1570년부터 1591년까지 만주에서 여진과 몽골 세력을 견제
하는 명의 최고 군사책임자를 역임했다. 승패가 무상하고, 그에 따른 상벌이 엄격할 수밖에 없는 무장의 세계에서 무려
22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역사는 이성량을 '채수(債帥)'라고 부른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조정의 고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그들의 비호 아래 자리를 유지하는 장수를 말한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와 결탁하여 만주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모피와 진
주를 밑천으로 명 조정의 중신들을 구워삶았다. 그 결과 그의 패전은 '없었던 일'이 되고, 시원찮은 승전은 '대첩(大捷)'으
로 둔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이여백(李如柏, 1553 ~ 1620)은 누르하치 동생의 딸을 첩으로 맞이했다.
요동에서는 '오랑캐 추장의 사위가 요동을 지킨다.'는 비아냥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부를 한손에 거머쥔 이성량이
누르하치를 제대로 견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장기집권'으로 타락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부패한 명 조정의 중
신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뒤에는 태만하고 무능한 만력(萬曆) 황제가 있었다. 이같은 배경에서 1583년은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성량의 군대가 좀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누르하치의 부조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누르
하치가 복수심에 불타 명과의 전쟁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궁극에는 조선도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며, 명·청 교체와 같은 대격변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지만 누르하치와 이성량의 행보를 보면 문득 '나비효과'라는 용
어가 떠오른다.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한달 후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물리학의 비유 말이다.
사소해 보이는 인간의 행동 하나가 엄청난 파국으로 이어졌던 역사의 거울 앞에서 문득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출처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서울신문 제공 기사
**이여송(李如松, 1549년 ~ 1598년)은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의 한사람으로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이다. 본관은 원래
성주였다. 후일에 농서(陇西)의 시조가 되었다.
명나라로 귀화한 조선인 출신의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樑)의 아들로서 이영(李英)의 5대손이다.
이영은 이천년(이조년의 친형)의 아들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벼슬한 까닭으로 이영이 원나라에 정착해 명이 세워진 후에
도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여송은 닝샤(영하:寧夏)에서 발배(틋拜)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서 이를 평정하여 장수로서의 명
성을 높였다.
1592년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간쑤 성(甘肅省) 닝샤(寧夏)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명나라의 제2차 원군으로 방
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부하 천만리(千萬里), 이여백(李如柏), 추수경(秋水鏡) 등과 4만 3천의 병력을 이끌
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여송은 조선의 보급 문제로 인해 군마를 잃은 뒤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
선을 도와주러 왔다는 원군을 제대로 돕지 못했다며 갖가지 횡포를 자행하면서 정작 일본군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에 분개한 류성룡(柳成龍)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은 이여송에게 트집을 잡아 제대로 싸울 것을 재
촉하였다.
1593년 1월 드디어 남하하여 류성룡 등이 이끈 조선 군과 합세하여 일본 군을 대파하여 평양을 탈환(제4차 평양성 전
투)하였다. 평양을 탈환하고 그 길로 남진하여 한양으로 향하던 도중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매복한 고바야카와 다카
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병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 패한 후로는 기세가 꺾여 더 이상의 진격을 중지하고 후퇴하여 평양
성을 거점으로 화의 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에 철군하였다. 이때 조선 측에서 재차 공격을 하라고
했으나 이여송은 무시하며 듣지 않았다.
1597년 요동총병관이 되었으며 1598년 정유재란이 종결되고, 토만(土蠻, 몽골족)이 이끄는 타타르와의 전투에 임하지만 전투 도중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여백(李如柏, 1553년 ~ 1620년)은
명나라 말기의 장군이다.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이다. 만력 20년(1592년) 임진왜란 때는 벽제관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만력 48년(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에 대패하여 자결하였다.
사르후(랴오닝 성 푸순, 撫順 근처)전투는 1619년 명나라에 쳐들어오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 조선, 여진족까지
참전한 대전투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는 크게 패하여 쇠퇴하게 되고, 후금은 만주 지역을 차지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파
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부대(13,000명)는 명군의 패배소식을 듣고 급히 진을 쳐서 청군을 막고자 했지만 평지에서 조총
수가 병력의 반이상이였던 조선군은 후금의 기병대에게 크게 패하고, 후금군에게 2일동안 포위되어 결국 항복하게 된
다. 이들 다수는 청의 조선팔기군에 편입된다. 또 그 일부는 1627년 정묘년 조청전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