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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演好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신세계
목록 7. 배울 것 많은 일본의 교훈들 군함도, 배울 것을 놓고 모략부터 하고 보는 한국 좌파 하시마섬, 일본 남쪽 끝녘 나가사키시에, 제주도를 마주보고 있는 초소형 섬이다. 섬의 크기와 모양이 꼭 군함 같다 해서 군함도라 불린다. 남북 480m, 동서 160m, 전체 둘레 1.2km, 뒷짐지고, 산보하면 18분 정도 걸린다. 이 섬의 원래 크기는 지금의 3분의 1 정도였는데 1897년부터 1931년까지 무려 34년에 걸쳐 매립공사를 했다고 한다. 매립공사는 누가 무엇 때문에 했는가? 미쓰비시가 지금의 3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섬을 1800년에 사들였다. 해저 1km에 석탄이 매장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기 1,800년이면 우리 조선에서는 정조가 왕이었고,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이태리를 점령했고, 미국에서는 자유가 법을 향도해야 한다며 미국 민주주의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토머스 제퍼슨이 백악관에 입주했던 시기다. 그시기에 미쓰비시라는 한 기업이 해저 1km 아래 석탄이 대량으로 매장돼 있다는 것을 탐지해서 그 석탄을 캐낼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한편으로는 석탄을 캐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층의 미니 도시를 건설했다. 그 시대에 10층짜리 아파트촌을 건설하고 학교, 병원, 상가, 위락시설을 컴팩트하게 건설한 토목기술과 건축기술이 참으로 놀랍다. 인구 5,000명, 헥타르당 835명, 당시 도쿄 인구 밀도의 9배로 세계 최고의 인구 밀도 지역으로 기록돼있었다고 한다. 1750년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석탄이 산업의 동력이었던 시절, 일본의 한 기업이 잽싸게 해저에 있는 탄광까지 개발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정조가 즉위하던 그때의 조선과 그때의 일본을 대비시켜 보자. 5천 년 역사는 뭐 하는 역사이고, 5만 년 역사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석탄 시대가 석유시대로 전환되자 군함도는 제1차 석유파동이 있었던 1974년에 폐쇄됐고 무인도가 됐다. 170년 동안이나 일본 산업의 동력을 제공했던, 일본의 전설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서도 신사도가 있고 멋이 있는 법이다. 일본 해군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연합군 장군들은 독일의 롬멜 원수를 존경한다. 적국이라 해서 모든 것을 조선 좌익들처럼 적대시하고 모략하고 비하한다면 이 세상은 벌써 지옥이 됐을 것이다. 초미니 섬을 3배로 확대해서 그 위에 10층짜리 고층 아파트를 1800년대에 건설했다는 사실은 분명 경이로운 역사다. 서울의 아파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와우아파트로 출발하지 않았던가? 이는 배움의 대상이지 모략의 대상이 아니다. 당시의 미쓰비시의 파이어니어 정신은 우리가 이제라도 연구하여 지혜와 교훈을 이끌어내야 할 학습의 대상이다. 이후에 소개되겠지만 우리는 특히 일본 문명과 문화의 원동력인 일본 유수기업들의 족적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떻게 일본의 신화를 창조해 냈는지 겸허한 자세로 배워야 할 것이다. 옷깃을 여며야 할 이 학습의 대상 앞에서 북조선 신봉자들은 무슨 짓을 했는가?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어 군함도를 살인섬이라고 모략했다. 조선 청년 수백 명을 강제로 끌어다 혹사시키고,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굶기고 학대해서 122명이나 살해(killed)했다고 모략했다. 영화 [군함도]는 그 증거를 두 가지로 부각했다. 하나는 1965년 조총련이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탄광 벽에 끄적인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낙서 영상을 1940년 전후에 조선 청년들이 쓴 글이라 거짓 모략을 했고, 시기를 알 수 없는 일본인 광부들 사진을, 조선인 광부였다고 사기를 쳤다. 금방 탄로가 나서 일본인들의 비웃음을 살 이런 짓들을 저들은 왜 업무 삼아 하는 것인가? 거울로 삼고 학습을 해야 할 기념탑에 가서 겨우 '지옥섬'으로 매도하고 모략할 생각만 할 줄 아는 인종이 바로 김일성 추종자들인 것이다. 초호화 유람선, 온갖 화려한 장식과 화려한 쌍쌍 무도회가 열리는 공간에 가서 겨우 한다는 것이 어디에다 배설해 놓을 것인가만 생각하는 북조선 추종자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서산대사의 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이 한마디 말뿐이다, 식민지? 좌익들은 주장한다. 해방 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해방 후 지금까지 79년 동안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이들이 아는 건 식민지 하나뿐이다. 일본은 미국을 배웠다. 같은 패전을 했어도 일본은 온 세계인이 벌벌 떠는 원자탄 폭격을 받아 비참하게 패했다. 그 후유증이 자손대에까지 대물림되는 고약한 방법으로 패했다. 통상의 민족이라면 미국을 두고두고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을 쿨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미국이 일본보다 잘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Made in U.S.A! 미국이 만든 제품이 아니면 쓰레기였고, 미국의 GNP가 세계 GNP의 54%를 차지했던 시기, 자만에 차 있었던 미국 땅에 깃발을 든 일본인들이 줄줄이 건너가 미국을 견학했다. 미국 공장에마다 견학을 시켜달라는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 "저 코 납작한 잽(Japanese)은 왜 저 소란이야?" 공장장이 물었다. “아, 네. 공장을 견학시켜 달라 합니다." "그래? 다 보여줘서 얼른 보내. 일본은 백년이 가도 미국 못 따라와, 그러니 다 보여주라구." 일본인들은 특유의 감사를 표시하면서 열심히 견학했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일본인들의 구호였다. 한국인들처럼 실속도 없으면서 아는 체부터, 잘난 체부터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1893년 윤지호 일기장의 글이다. "조선인들은 허영심이 강하다." 마리니 콜라앙투앙 프랑스 선교사의 말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떡잎부터가 달랐다. SONY, 소니의 신화를 만든 사람은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리오'였다.. 이 두 사람은 태평양 전쟁 때 동굴에서 해군이 추진하던 열 추적 유도탄, 오늘의 ‘사이드 와인더’를 연구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헤어지기가 싫어 미지를 개척하자는 뜻으로 천막을 쳤다. 이들은 두 사람의 모임을 '미지의 개척자' (Seeker of the unknown)라고 이름 지었다. 녹음기를 만들기로 했다. 가느다란 철사에 녹음을 시키는 것까지는 성공을 했지만 편집했을 때 자르고 때우는 과정이 문제였다. 이때 맥아더 사령부에서 활성기가 울려퍼졌다. 저것이 녹음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달려갔다. 모리타 아키오는 미군 장교를 설득해 녹음기를 몇 시간 빌렸다. 녹음은 철사에 돼 있는 것이 아니라 질긴 테이프(질긴 종이)에 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을 다 뒤져도 질긴 종이는 없었다. 마분지에 자석 가루를 칠해 만들기는 했지만 상품 가치가 없었다. 이들의 두 번째 목표는 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들어, 손에 들고 다니면서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는 진공관 라디오, 덩치가 크고 가구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됐었다. 이 진공관 라디오는 미국 TI(Texas Instrument)사가 발명했다. 트랜지스터는 1948년 미국의 벨 연구소 (Bell laboratory)에서 발명했다. 모리타 아키오는 벨 연구소에 가서 트랜지스터 사용 권리를 사겠다고 했다. "무엇에 쓰려구요?" "네, 라디오를 만들려구요", "그렇다면 공짜로 사용하세요" 그것이 상품 가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1955년, 모리타 아리오는 세계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미국시장을 노크했다. 손바닥만 한 라디오에 관심을 갖는 바이어가 없었다. 3일 동안 생각을 한 모리타는 신문광고를 생각해 냈다. 고객에 직접 알리면 바이어가 대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신문광고의 효시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계 제작 회사 부로바사 중역이 찾아왔다. 20만 개를 주문하겠으니 OEM으로 해달라고 했다. 라디오에 SONY 마크가 아니라 부로바 마크를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 본부에 의사를 타진했더니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계약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모리타는 이를 거절했다. 부로바 중역이 놀래서 찾아왔다. "부로바사는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소니 제품에 부로바 마크를 넣는 것이 얼마나 횡재인지 모르십니까?" "네, 잘 압니다. 부로바사도 50년 전에는 우리 SONY사와 같은 처지에서 출발하셨겠지요. 우리도 부로바처럼 열심히 하면 50년 후에는 부로바사처럼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니사 제품은 소니 마크로만 판매하고 싶습니다" 그 후 40년 만에 두 회사의 프로필은 완전히 역전돼 있었다. 그다음 목표가 워크맨이었다. 모리타의 발상이었다. 소니의 초대 회장은 이부카 마사루, 그는 모리타의 연장자였다. 미국을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영문 포켓북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바로 요만한 사이즈의 캠코더를 만듭시다." 경박단소! 작고 가볍게 만드는 기술, 이것이 없으면 최첨단 전투기도 인공위성도 없었다. 그는 SONY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오랫동안 길러온 젊은 음악가 출신 오가에게 물려주었다. 토요다의 카이치로, 자동차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에서는 한 개의 차종을 제작하기 위해 컨베어 벨트를 설치하면 수만 대씩 만들어 내고, 다른 차종을 위해 세팅을 했다. 그러나 일본에는 생활 수준으로 인해 한번 세팅을 하면 수천 개 정도만 생산했다. 생산효율상 미국 차와 경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치로는 세팅 시간을 10분의 1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소품종 대량생산 체계에 대항해 일본은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를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남과는 다른 옷, 남과는 다른 독특한 차량을 갖기를 원한다. 따라서 일본의 다품종 소량 생산시스템이 국제시장에서 미국을 따돌리게 된 것이다. '적시 생산'(JIT Just IN Time)시스템도 토요다의 창조물이었다. 간단히 모델화하여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2대의 기계가 있었다. 기계 한 대에 한 사람씩 서서 일했다. 각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할수록 기업의 손익계산서에는 이윤이 줄어들었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이윤은 더 많이 감소했다. 김영삼 시대인 1993년 서울공대 산업공학과 실력 교수인 이면우가 [W이론을 만들자]는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됐었다. 이론의 요지는 열심히 일하도록 신바람 문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바람 나게 열심히 일해서 1인당 생산량이 증가했는데 왜 토요다에서는 이윤이 더 빠르게 감소했는가? ‘참으로 이상하다. 왜 1인당 생산성이 향상되면 될수록 손익계산서 상의 이윤이 저하되는 것인가?’ 토요다의 '오노' 부장, 식사를 하면서도 화장실에서도 그 생각만 했다. 그러다 한순간 무릎을 쳤다. 12사람의 작업대 앞에는 각자가 작업한 부품이 많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쌓여 있는 재고는 1개월 동안 소화가 안됐다. 1개월 후에 가공해도 되는 것을 미리 가공해 놓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이자가 더 많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아하~. 전 공정은 후공정에서 소화한 것만큼만 생산하고 시간이 남아도 일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 된다." 기막힌 논리를 찾아낸 것이다. 차라리 쉬는 것이 더 이익이었다. 각자에게 남는 시간이 또 아까웠다. 그래서 1인이 2개의 기계를 다루도록 했다. 결국 12사람이 다루던 12대의 기계를 한 사람이 다루게 된 것이다. 12대의 기계를 한 사람이 다루게 하려면 기계를 U자형의 연속으로 배열해야 했다. "전 공정은 후공정이 소화한 것만큼만 생산하라" 재고가 쌓이지 않았다. 커플링! (Coupling)! 에누리 없이 찰카닥 궁합처럼 공장이 가동되어 공정과 공정 사이에 재고가 없도록 한 것이다. 이를 이름 짓기를 JIT시스템(적시생산)이라 했고, 이는 토요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일본 사원들의 학습능력, 몰두능력,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그것이 일본의 강점이다. 일본을 욕하고 멸시하는 한국인들에 묻는다. 왜 일본에는 노벨상이 많이 떨어지는데 한국에는 노벨상이 김대중이 탄 이상한 평화상 말고는 단 한 개도 안 떨어지는 것인가? 일본이 이렇게 노력하는 동안 미국은 자만했다. 1957년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구름처럼 운집한 일본 군중에게 연설을 했다. "존경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파자마를 만듭니다. 그리고 손수건도 만듭니다. 왜 이런 걸 더 많이 만들려 하지 않습니까?" 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보이면서 일본인들을 비꼬았다. 이런 거나 만들면 됐지 왜 Made in U.S.A를 흉내 내겠다고 공업제품과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애를 쓰느냐, 비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25년 후인 1982년, 미국인의 자동차 선호도 조사에서 일본이 1, 2, 3등을 차지했다. 미국차는 겨우 7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거리거리에 일본차가 미국차보다 많아보일 정도였다. 무엇이 잘못됐느냐 Vs. 누구를 처벌해야 하나 기업에서나 공공의 공간에서는 늘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본,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문제의 발생 원인을 규명하고 교훈을 이끌어내서, 다시는 같은 종류의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창조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기업에서나 공공 공간에서나 이러한 노력이 전혀 없다. ‘누구를 처벌하고 잊을 것이냐?!’ 이것부터 따진다. 잘못의 원인을 가장 잘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사고에 관련돼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감옥에 넣겠다며 분석 능력 없는 경찰이나 검사들부터 달려드니 그들이 사고의 원인을 밝혀 주겠는가? 모두가 은닉하고 변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같은 사고가 연년세세 이어지고 반복되는 것이다. 역사를 위조하고, 사실을 위조하는 이런 국민은 역사로부터 절대로 배우지 못하는 '후진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1942년의 IBM 왓슨(watson)회장, 중역 중 한 사람이 회사에 당시 화폐로 1천만 달러의 손해를 끼쳤다.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어 사표을 우송하고 칩거했다. 왓슨 회장이 그를 불렀다. “자네,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나는 자네에게 1천만 달러나 투자했네, 자네가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그 역시 자네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을 걸세,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면 그것이 바로 돈일세, 분석가들과 함께 잘못의 원인을 규명하고 교훈과 대책을 이끌어내게. 그리고 당신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한번 실수했다고 자르면, 그 누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도전적으로 일을 하겠는가? 모두 다 안전 빵으로 몸을 사릴 것이 아닌가? 그러면 회사는 끝장나는 거라네.” 1993~98년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시절, 성수대교 붕괴, 위도 페리호 침몰 사고, 수학여행 간 학생들이 불에 타서 집단 사망한 사고, 대구지하철 사고 등 끔찍한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 그때마다 경찰과 검찰은 억울하고 힘없는 말단들만 잡아넣고, 손을 털었다. 김영삼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청와대 고급의자에 앉아서 '뼈'만 깎는다고 발표했다. IMF 사고를 스스로 일으켜놓고도 그때는 뼈를 다 깎아내고 없어서인지 뼈를 깎겠다는 말도 못 하고 내려왔다. '위도'라는 섬을 향해 휴가인들을 과밀하게 태우고 가던 페리호가 침몰한 사건을 기억하는가? 그 얼마 전, 영국에서도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영국에는 지브러히라는 섬이 있다. 그 섬을 왕복하는 페리호 선박이 관광객은 잔뜩 싣고 가면서 커브를 틀자 사람들이 우루루 쏠려 집단으로 물에 떨어져 사망했다. 똑같은 종류의 사고가 났는데, 영국과 대한민국이 취한 조치가 하나는 선진국, 하나는 미개국이었다. 대한민국은 검찰이 몇 명만 잡아 감옥에 보냈고, 그것이 끝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달랐다.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찾아낸 것이다. 문을 단속하는 선원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선박이 출발하기 전에 문을 잠그지 않았는가?" 선원이 답했다. "이날은 휴일이고 원체 승객이 많아 선장이 이를 고려해 출발 시간을 약간 늦출 줄로만 알았습니다. 승객이 너무 많아 승객을 안으로 밀어 넣고 있을 때 선장이 갑자기 출발하면서 커브를 틀었습니다." 그럴듯한 이유였다. 이번에는 선장에 물었다. "당신을 왜 승객 사정도 고려하지 않고, 정시에 출발했는가?" "저는 원래 시간을 준수합니다. 선원들이 그 시각에 맞춰 출발 준비를 완료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정시를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이에 영국 조사관들은 무슨 결론을 내렸을까? 대한민국처럼 희생양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고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부재’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 관리 선원들과 선장 사이에 소통하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 이 시스템 하나만 있었어도 사고는 예방될 수 있었다. 시스템! 영국은 비단 선박뿐만 아니라 인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공공시설, 공공 공간에 대하여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요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치할 것을 강제화했다. 사고 예방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을 표준화시킨 것이다. 영국 표준 BS-5750, British Standard 5750이었다. 국제사회가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영국 표준 5750을 국제표준 2000(ISO2000: International standard organization)으로 채택하여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모든 세계기업은 최소한 ISO로부터 ISO-2000 표준에 합격했다는 인증서를 받아야만 국제시장에 제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냉장고를 출품하는 기업은 최소한의 품질을 제조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것을 인증서로 증명해야만 출품할 수 있었다. 바이어(Buyer)들이 제품 하나하나를 일일이 평가할 수는 없다. 생산 시스템이 훌륭해야 제품도 훌륭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기업의 기본 시스템을 ISO-2000 표준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 엄청난 발전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영국 지브러히 페리호 사고의 산물이었다. 사고 현장만 쓸어 묻어버리고 손을 털어버리는 대한민국의 오늘과 30여 년 전의 영국 사이에 얼마나 깊은 강이 가로놓여 있는가? 이런 후진국적 문화에서 어떻게 삼성, 현대, LG 등이 탄생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 그것이 불가사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오늘의 국민들, 현재 살아남고 있는 것은 생명이 국가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토정비결이 좋아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공공안전 시스템이 황무지에 가까운 나라, 그것이 잘난 체하는 한국인들의 나라인 것이다. 2010년에 해군 미니 구축함 천안함이 침몰됐다. 몇 줄의 뉴스만 봐도 북괴 소행이었다. 그런데 그 원인에 대한 진단들은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군사 전문가들 입에서 나오지 않고 물 밖 멀리에 떨어져 사는 붉은 주사파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붉은 좌익들은 "미군 잠수함이 침몰시킨 것"이라 했고, 당시 대통령 이명박은 "내가 배를 지어봐서 아는데 배가 낡아서 피로파괴한 것으로 보인다"고 예단했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던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이명박의 한심한 소리를 듣고 이명박에 전화를 걸었다. "미국, 영국, 스웨덴, 호주 등에서 잠수함 전문가를 모집해 보낼 테니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어떠세요?" 15명의 국제 전문가가 한국에 왔고, 여기에 한국 과학계 전문가를 합쳐 조사한 결과 북한 소행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래도 주사파들은 물러서지 않고 지금까지도 미국 잠수함 소행이라는 괴담을 뿌리고 있다. 그런데! 그다음 대에 대통령이 된 박근혜 시대의 2014년, 세월호가 침몰돼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학살됐다. 학살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사고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공작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사고였고, 침몰 후에도 선장과 선원들이 대량 인명피해가 날 수밖에 없도록 이상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 사고 역시 그 4년 전에 발생했던 천안함의 경우처럼 행정부가 나서서 전문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모집하여 조사팀(TF)을 꾸려 과학적 조사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4년 전의 천안함 사고로부터 아무런 지혜도 얻지 못해 행정부 소관 업무를 방기했다. 그래서 사고의 원인은 주사파들로 구성된 민주당 의원들과 반국가 분자들에 의해 괴담으로 발전했고, 그 괴담이 박근혜 탄핵에 물꼬를 텄다. 학습도 없고, 사색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민주주의 국가라는 허울이 있기에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고, 그 자유 속에서 피어난 창의력이 '열대의 대지에 드문드문 솟아난 선인장'처럼 꽃이 되어 경제적 부를 누리고있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권력자는 없다. 학습 능력, 학습 습관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주위를 자기중심적으로 통제하려는 독재를 한다. 팔로우들의 창의력을 이끌어내려는 마인드 자체가 없다. 학교는 누구나 다 다녔다. 학교란 무엇인가? 물고기를 잡아 주는 곳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기초만 알려주는 것이다. 물고기는 각자의 창의력으로 잡아야 한다. 독서가 없고,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매너가 없고, 사색력을 습관화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재주 하나 길러가지고 출세들을 하는 세상이 대한민국 세상이다.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가장 많은 나라이지만 학습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적은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국 QC는 완장 QC 전투를 생각해보자. 전투는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지휘관이 이래라저래라 소리치는 행위는 자멸 행위다. 병사들이 내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지휘관은 오늘 싸워야 한다. 모의연습 즉 시뮬레이션을 다각도로 실시함으로써 병사들에게 내일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상상케하고, 그 각각에 대해 병사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미리 상상케 함으로써 병사들 스스로 살아남는 요령을 터득하게 해주어야 한다. 실제 전투는 병사들의 응용능력으로 치러지는 것이다. 전쟁은 지휘관의 고함에 의해 치러지는 것이 아니다. 내일의 전투 결과는 오늘 지휘관이 어떻게 병사들을 준비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는 지휘관은 한국군에 거의 없다. 이러한 준비 마인드는 기업인들에도 없다. 제조과정 역시 전투행위와 똑같다. 내일 수백 명의 작업자가 어떻게 일하는가는 오늘 간부들이 무엇을 어떻게 무장시켜 주어야 하는가에 달려있다. 내일의 작업장에서 근로자들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할지, 어떤 불량품을 만들어낼지는 오늘 관리자들이 어떻게 내일의 현장을 연출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국 QC는 참으로 한심하다. 1개월에 걸쳐 제작한 제품이 틀린 스펙과 틀린 디자인으로 제작돼있는 것이 오너 측 점검 단계에서 발견돼 엄청난 낭비가 발생하고 납기를 어겨 지체상금까지 보상해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계 자체, 스펙 자체가 맞는지 틀린지 체크하는 QC는 대한민국 기업에 없다. 작업장은 공정의 연속이다. 첫 공정에서 두 번째 공정으로 제품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QC요원(품질관리요원)을 기다려야 한다. 두 번째 공정으로 제품이 이동하기 전, QC요원이 나타날 때까지 대기하는 시간이 참으로 길다. 어떤 주문생산 공장에서는 QC요원을 기다리느라 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QC요원들은 시간 낭비를 의식하지 않는다. 불합격을 받으면 재작업을 해야한다. 여기까지에 대해 일본 QC요원들은 어떻게 하는가? 일본 QC요원들은 내일의 작업 내용에 대해 오늘 작업자들과 함께 제조과정에 대해 토의를 한다. 에러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예방해야 하는지 지혜를 찾아낸다. 하자를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QC요원들은 작업자가 저지를 수 있는 에러를 미리 예측하고 그 시각에 나타나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에러가 예방되고 시간도 낭비되지 않는다. 설계나 스펙이 잘못되는 경우도 없다. 일본 QC요원은 스승이고 코치다. 반면 한국 QC요원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하다. 작업자들에 한국 QC는 경찰관이다. QC요원만 가지고 비교해봐도 일본 기업은 인격적인 반면, 한국 기업에는 직급과 직종에 따라 인격적 차별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일본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스승이라는 사실이 QC분야에서도 드러나 있다. 한국식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시스템인가? 단순한 이념인가? 민주주의는 은행 객장의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처럼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정된 ’정치 시스템‘이다. 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담긴 의견들을 수렴하여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해 나가는 정치 시스템인 것이다. 수많은 의견들이 공동의 시장에 나와 다른 사람들의 창의력을 자극하고, 아이디어들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시장원리에 의해 채택도 되고 도태도 되는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 공공선을 추구하는 민주절차인 것이다. 따라서 공돈의 장은 넓게 개방되어야 하며 특정 세력이 독점해서는 안되는 민주주의 구동의 엔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법을 수호하는 임무와 책임을 가장 많이 지고 있는 판사와 검사들이 공론의 장을 제한시키고 있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만 발언권을 주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는 발언권을 차단시키고 인격적 모독을 시키고, 공직에서 추방하는 독재행위를 밥 먹듯이 하고 있다. 2024년 1월, 종합일간지, ‘스카이 데일리’가 2023년 추적한 5.18의 진실을 총편집하여 40면 분량의 ‘5.18 특별판’을 인쇄해 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배부했다. 신문의 대제목은 ‘5.18은 DJ 세력과 북이 주도한 내란’이었다. 인천시 시의회 의장인 허식이 이를 필요로 하는 주위 사람들에 나누어 주었다는 이유로 집권당인 국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저런 극단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국힘당에 설 자리가 없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자기는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굳게 믿고 이를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주장을 했는데, 인천시의회 의장이 반대의 소신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 한마디에 인천시의회는 허식 위원장을 탄핵시켰고, 그는 당을 탈당한 후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 국회는 5.18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국민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5.18 특별법을 제정해 2021년 1월 5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원시적 독재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이고 집권당 수장이라는 사실을 일본의 1950년대의 시스템 수준과 비교해 보라. 그는 대법원 판례까지 무시했다. 대법원 판례[2002.1.22. 선고 2000다37524.37531 판결]의 제5 판시사항의 요지는 이렇다. “공적 존재의 이념은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철저히 공개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문의나 의혹은 ’개연성‘이 있는 한,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가 허용돼야 하고 공개토론을 받아야 한다. 정확한 논증이나 공적인 판단이 내려지기 전이라 해도 찬반 토론을 통한 경쟁 과정에서 선택도 되고 도태도 되게 하는 것이 민주적이다.” 5.18은 이념의 주제이고 공적인 존재다. 이렇게 판례가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찰에서 출세하고, 법무장관까지 지난 다음 집권당 수장을 담당하고 있는 법조인이 민주주의 구동 엔진인 공론의 장에, 자기와 다른 의견과 이념을 가지고 있다 해서 말 한마디로 바닥에서부터 출세의 길을 걸어온 인천시 시의회 의장을 단칼에 인격살인하고 출세길을 차단시킨 행위는 허식이라는 인격에 대한 폭력 행위에 해당하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유린하는 질서 파괴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반민주주의적 폭력이 2024년에 집권당 수장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아직도 멀었다는 한숨이 나오게 하기에 충분하다. 1865년에 태어난 윤치호 선생, “나와 다른 것을 인정 못 하는 자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1900년경에 지적됐던 행위를 124년 후에 대한민국 집권당 수장이 아무런 가책 없이 저질렀다는 것은 국힘당 수장 한 사람의 수준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부끄러운 수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은 우리보다 새까맣게 앞서 있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거울에 투영된 유치하고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인 것이다.[펌] |
첫댓글 비교적 자세하고 논리 정연함은 인정안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들을 비교하여 비하할 필요는 없다.
우래도 우린 강대국 6위로 일본을 앞서가고 있지 않는가?
배울 점을 제시하는 것은 좋으니 필자 같은 분이 있기에
우리는 소신있는 국민으로 부각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