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이 되기 전 그녀의 자서전。

[복수씨,우리그냥막살아요.]

1999. 2. 25 - 4. 5 동안 일간 스포츠에서 연재되었던 스타 스토리 내용입니다



[1] 평범했던 나의 어린시절

지난 22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일본에선 내가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있는 일본영화 <에이지>를 촬영해야하고, 국내로 돌아오면 MBC TV 수목극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대본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서야한다.
또 CF촬영일정에도 시간을 쪼개야하니 한가한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그래도 성년식을 겸해야하는 스무번째 맞는 생일이라 이날만은 만사 제쳐두고 친구들과 어울려 모처럼 실컷 놀았다.

내가 배우의 길로 나선 것은 너무도 우연이었다. 지난해 4월께 친구와 함께 지하철 강남역 근처를 걷는데 사진작가라는 분이 “의류제조사의 카탈로그 모델을 찾고 있는데 해볼 생각없느냐”고 제의했다. 나는 그저 용돈이 아쉬운 탓에 아르바이트 돈벌이 쯤으로 생각하고 선뜻 응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생각도 못했던 배우의 길로 나서게 됐다.

단 한번 TV카메라 앞에 단역으로 섰고 4개의 CF에 출연한 것이 연예생활의 전부였던 내가 갑작스럽게 그 것도 불과 반년만에 신세대 스타로 떠올랐다니 너무도 꿈만 같다. 혹시 내가 ‘신데렐라’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허벅지 살을 꼬집어도 보지만 분명 현실이었다.

어렸을때 연예인이 되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럴만한 별다른 재능도 없었다. 꿈많은 시절에 “너커서 무엇될래”라고 물으면 그저 간호사 피아니스트 스튜어디스 정도였다. TV 보기를 즐겼지 TV에 나올지는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난 사진기만 들이대도 도망가곤 했던 내성적인 아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했고 특히 남자아이만 있으면 줄행랑쳤다. 중학생(오금중)시절 까지도 이런 성격이어서 카메라 앞에서 포즈취하는 걸 너무도 창피하게 여길 정도였다.

나는 초등학교를 두 곳(잠동, 오륜) 다녔는데 학교 근처에서 왠 아저씨가“너 배우해라”고 했는데 “저 안할거예요”라며 고개를 저었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1남2녀인데 내가 막내딸이다. 아빠는 건축관련 일을 하시고 엄마는 옛날에 금은방을 하셨다. 요즘은 부업으로 드레스 수선을 하신다.

언니(이상숙.25)는 캐나다에서 유학중인데 요즘 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비자를 기다리고 있다. 오빠(이상득.24)는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인터넷 캐릭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태어났으나 다섯살때 잠실(장미 아파트)로 이사해 그곳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고 잠동초등학교 4학년때 송파구 오금동으로 이사해 오륜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오금중고를 거쳐 신구전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것이 나의 학력이다.

지난 19일이 전문대 졸업식이었는데 일본에서 영화촬영 하느라 참석하지 못해 졸업장과 앨범도 못받아 섭섭했다.

어린 시절은 무척 평범했다. 오금고 시절 성적도 그랬다. 1학년때 반에서 25등 했고 2학년때는 열심히 공부해 10등, 3학년때는 18등에 그쳤다.

당시 나는 배우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주변에서 나의 얼굴이 다소는 이국적이라는 칭찬(?)을 듣기는 했지만 특출난 것이 없었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가 연기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다. 한번은 아빠와 MBC TV <뽀뽀뽀>를 구경갔는데 PD선생님이 아빠에게 “저 아이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시키지 않겠느냐”고 권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꿈많은 여고시절 방송사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지만 바람뿐이었지 실천의지가 없었다.






[2] 로데오 거리의 인신매매범?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대학을 다니면서도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써야했기에 주머니 사정은 궁색했다. 다 컸으니 용돈만큼은 내가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이궁리 저궁리했지만 뽀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확히 말하면 대학 2학년이던 지난해 4월초였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였고 지금은 미국서 공부하고 있는 지연이(이지연)와 강남역 부근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재잘대며 걷다가 그만‘로데오’거리까지 가게 됐다. 그곳에서 사진모델로 발탁돼 용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이것을 인연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줄이야.

그때만 해도 나는‘로데오’거리에 잡지모델을 찾으려는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못했다. 그런데 내 앞에 사진작가가 나타났다. “직업이 사진작가”라며 길을 막아선 두 분(김현성 안성진)은 “중고생들에게 인기 있는 잡지 <보이 밋 걸>에 쓸 이국적인 이미지의 사진모델을 찾고 있다”면서 내가 바로 자신들이 찾던 인물이라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순간 우선 두려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것이 두 분중 한 분(안성진씨)의 외모가 아주 기괴했다. 지금은‘성진오빠’로 부르며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성진오빠는 빡빡 깎은 머리에 험악한 인상이었다. 그런 분위기 탓에“혹시 인신매매범 같은 나쁜 사람들 아냐”라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고 성진오빠의 제의에 의심부터 솟았다.

그런데 지연이가 “저 아저씨 나도 잘 알아. 의심할 사람은 아니야”라면서 성진오빠를 아는 체했다. 지연이는 또 “아르바이트로 사진모델 하는 아이들이 많다”면서 한번 해보라고 권유했고 용돈이 궁했던 나는 그 아저씨들에게 연락처를 적어주고 말았다.

로데오거리에서 만난 사진작가에게 연락처를 적어주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왠지 불안했다. 그분들이 집에 전화를 걸어온다면 연예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부모님들이 어떤 말씀을 하실까 하는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들은 이튿날 전화를 했는데 아빠가 받으셨다. 걱정과 달리 아빠는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신 뒤 “한번 해 보라”면서 승낙 해주셨다. 백만 원군을 얻은 듯했다.

첫 일거리는 청소년 잡지에 게재된 의류광고의 사진모델이었다. 카탈로그 사진 두 컷찍느라 온종일 시달렸다. 사진찍기는 처음이라 나의 포즈는 엉성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저런 포즈를 요구하는 사진작가의 성화에 울고 싶을 정도였다.

어찌됐든 모델로 데뷔했고 첫 모델료로 15만원을 손에 쥐니 날아갈 듯 했다. “다른 애들은 3만원이나 5만원 정도를 주는데 너에겐 특별 배려했다”는 성진오빠의 말에 어줍잖게 신바람도 났다. 또 “괜찮은 돈벌이”라는 생각에 성진오빠를 비롯한 사진작가와 스탭진과 친하게 어울렸고 아마추어 모델 일거리를 챙길 수 있었다.

사진모델은 힘든 일거리였다. 학교를 다녀야했으니 주말에만 사진을 찍었는데 스튜디오 촬영의 경우 밤샘을 해야했고 야외촬영 때는 1박2일 일정으로 배낭을 꾸려야했다.

두주일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꽤나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으로는 중고생들이 많이 보는 <보이미 걸> <게그> 등 잡지에 실릴 의류광고 3건에 <휘가로> <마리클레르> 등 성인잡지의 표지모델까지 다양 했다.

얼마를 벌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친구들에게 밥사주며 기분낼 만한 액수였다





[3] 홍콩이나 일본 여자 아니냐?


잡지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분주할 나날을 보내던 4월 중순께 나의 인생을 바꿔 놓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바로 새내기 연예인을 발굴하고 뒷바라지를 해주는 매니저먼트사 <백기획>과의 만남이었다.

그날도 나는 잡지의 카탈로그를 찍기 위해 광고주인 의류제조회사인 <신원통산>을 찾아 기획 미팅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곳에 전혀 낯선 이들이 나를 반겼다. 한분은 광고기획사의 차장이란 분이고 또 다른이는 자신을 <백기회>의 실장이라고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연예계의 새로운 인물을 발구하는 일을 맡은 김이정 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성진 오빠의 추천을 받았다면서 "어떤 아가씨인가"하고 만나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나를 면담한 뒤 "특이한 얼굴이다.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나를 추켜 세운뒤 프로데뷔(?)를 적극 권했다, 함께 자리했던 시진작가들도 "좋은 기회"라면서 얼떨떨해 있던 나를 몰아세웠고 나는 별 생각도 없이 "오케이"하고 말았다.

다음날 나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여의도 <백기획> 사무실을 찾았다.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 회사라는 것이 무엇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전속계약을 해야하느니 일주일 동안 카메라 테스트를 받아야한다느니' 이런 저런 주문을 하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판단조차 못했던 나로선 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주일동안 몹시도 시달렸다. 온종일 카메라에 앞에 세운고 다양한 표정들을 담겠다면서 온갖 포즈를 청했다. 인화된 사진에 찍힌 나의 얼굴을 보면서 사실 나도 놀랬다. 말 그대로 '천의얼굴'이었다. 나는 전속계약을 했고 <백기획> 소속 연기자가 됐다.

<백기획>에 소속된 뒤에도 잡지모델 생활을 계속했다.

'얼굴' 하나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고 연기라고는 전혀 할 줄 몰랐기에 잡지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주일에 5일, 그것도 온종일 시간을 빼앗겨야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나도 이제는 프로"라는 생각에 힘든 것도 잊었다.

일감은 많아졌지만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모델 일감은 전속사에서 주선했지만 그네들이 모델 출연료를 받아주지 않았기에 내가 직접 잡지사를 찾아다니면서 챙겨야했다.

돈 몇푼 받으니까 왠지 염치없는 듯해서 받지 못한 출연료도 많았지만 그래도 손에 쥔 돈을 대략 월 60만원 가량 됐다.

3개월 가량 잡지모델 일을 했는데 7월초 어느 날 전속사에서 또 다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광고 대행사에 배표할 프로필 사진을 찍겠단다. CF모델로서 '이나영'이란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나의 다양한 포즈 사진을 본 광고대행사 관계자들은 한결 같이 "독특한 미인"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쉽게 CF에 출연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출연했던 CF는 청바지 <잠뱅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을 벗고 청바지를 입은 뒤 밖으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외출하는 장면이었다. 광고업계선 이제껏 보지 못한 독특한 영상인데다 "얼굴 이미지가 홍콩이나 일본 여자같다"면서 나의 색다른 이미지에 주목했다.

CF를 본 TV 시청자들도 "외국 연기자 아니냐"며 나를 일본여자라고들 했다. 또 <잠뱅이>에 뒤이어 바로 찍었던 또다른 CF<샤샤>(초콜릿)에서 나온 나의 얼굴 모습을 보고는 홍콩여자라고 했다.

처음에는 잡지를 본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이나영'이란 이름이 알려졌는데 CF 두편에 출연한 뒤에는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꽤 많아졌다. 때맞춰 잡지 <쎄시> 7월호의 표지모델로 나서면서 "CF에 나왔던 얘가 이나영이구나"하는 말을 여기 저기서 들을 수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연기자로


내가 연기자로 첫발을 디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짜릿한 기분이다. 첫작품은 SBS TV 여름 납량 특집극 <어느날 갑자기>이었는데 나는 드라마 제목처럼 정말 어느날 갑자기 TV드라마에 출연할 기회를 잡았다.

SBS TV로부터 출연 요청을 받은 것은 CF와 잡지모델로 일하느라 한참 바쁠때인 7월초였다.

<어느날 갑자기>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식구 모두가 자살을 했는데 소희라는 여고생이 죽은뒤 귀신이 돼 다니던 학교 근처에 나타난다.

원혼이 돼 학교를 배회한 소희는 스티커 카메라에 재미를 갖는다. 스티커 사진에 찍혀나와야 할 아이들 모습 대신 귀신모습을 한 소희의 얼굴이 찍혀 나오니 아이들은 몹시도 놀랐고 학교주변에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는 줄거리다.

유철형 감독님이 연출을 맡았는데 다른 역의 캐스팅을 모두 결정하고도 정작 주인공이랄 수 있는 소희역을 맡을 연기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CF와 잡지를 통해 나의 얼굴이 알려져 있어 유 감독님은 나의 '천의 얼굴'을 주목하곤 나를 찾았다.

'이제 나도 탤런트가 됐다'는 기쁨도 잠시뿐이었고 유 감독님으로부터 연기에 대한 이런 저런 주문을 받고 보니 주눅이 들고 말았다.

제대로 연기했던 경험이 없으니 자신감을 잃고 만 것이다. 내가 자신 없어 하니까 유 감독님은 "연기는 신경쓸 것 없다.

대사도 별로 없고 분장과 표정연기가 대부분이니 너의 독특한 얼굴을 잘 살려내면 된다"고 격려했지만 정말 막막했다.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소희역을 맡았지만 한달동안 촬영하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 내가 전혀 연기 경험없이 SBS TV 납량특집 드라마 <어느날 갑가지>의 귀신 소희 역을 맡은것은 아니다. 소희역이 분장과 얼굴 표정 연기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대사도 있는 등 어느 정도의 연기력은 필요했기에 나는 드라마 제작진들의 어줍잖은 시선을 느껴야 했다.

나는 이에 앞서 뮤직비디오 2편에 출연해 수박 겉핥기 나마 연기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하느는 4월말께 찍은 ,이젠>이란 작품인데 나의 전속사 연기자들이 모두 출연했다.

또 다른 작품은 6월께 출시된데 그는 한 남자를 사랑하다 실연의 충격으로 그만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실성한 여자를 그려내면서 '연기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가졌다. 지금도 그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실성해서 토끼와 놀고 옷입은 채 분수대에 들어가 물장난하는 장면이나 하얀 치마를 입고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을 나이 기억속에서 더듬어 보면 '그애가 정말 나였나'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갑자기>의 대본을 받아 든 나는 며칠 뒤 드라마 제작팀에 합류했고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에 들어갔다. "얘 봐라. 귀신가진가 나네."

SBS TV <어느날 갑자기>를 본격적으로 촬영하면서 제작진들은 귀신으로 분장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한결같이 무섭다는 반응이었다. 정말 그랬다. 거울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영락없는 귀신 그대로 였다.

감독님은 표정연기가 중요하다며 분장을 해 제대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통에 정말 죽을 맛이었다. 분장한 얼굴 모습에 다 질질 끌리는 저승사자 옷을 입은 자체가 무서웠는데 거기에다 무서운 얼굴연기까지 하라니.

귀신 분장을 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메이크업을 하는데 화장에다 페인트칠까지 했으니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팬 여러분들도 생각해보세요." 오죽했으면 분장사마저 "너 얼굴 안 봤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낮에는 세트촬영에 매달리고 귀신 이야기니까 밤에도 촬영하는 바람에 4일동안 햇빛 구경을 못했다. 연기라지만 왠지 무서움에 사로 잡여 야간촬영 도중 화장실이라도 갈 때면 잔득 겁에 질려 코디어니와 함께 가야했다.

4일 동안의 야간촬영을 끝낸 날 아침 나의 매니저인 최진한 오빠와 함께 바깥세상에 나오니 따사로운 햇빛 구경을 하고는 정말 좋았다. 아침식사로 내가 좋아하는 북어국을 먹고나니 기운이 샘솟는 듯했다.

<어느날 갑자기>의 촬영이 끝날 때쯤 촬영도중 짬이 나기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발톱을 손으로 뜯었는데 덧이나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게다가 촬영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한달만에 내 몸무게는 49kg 에서 3kg이나 빠졌다.

한달 고생끝에 어렵게 찍은 <어느날 갑자기>는 8월초에 방영됐고 시청률도 괜찮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 그 귀신이 너였구나. 정말 무서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저 아이는 먼저 여자가 돼야 한다"


잡지모델과 뮤직비디오, CF와 TV드라마에서의 연기 경험등 다양한 체험은 나를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로 이끌었다.

SBS TV 납량특집극 <어느날 갑자기>의 촬영을 마친 나는 ‘다음에는 어떤 드라마에서 어떤 역을 맡을까’하는 기대감에 한껏 들뜬 채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일 때까지 잡지와 CF 모델 일을 계속했다.

잠뱅이 CF가 첫 선을 보일즈음 나의 모습을 담은 여러 CF가 거의 동시에 쏟아져나왔다. 동산의 샴푸 <섹시 마일드>를 비롯해 서울우유, 샤샤초콜렛등인데 특히 샤샤에서는 “너를 갖고 싶어”라는 멘트를 유행시켰다. 사람들은 비로소 나를 알아보고 ‘눈빛이 강렬한 이나영’에 주목했다.

CF에 이어 SBS TV 드라마로 안방 시청자들에게 나의 얼굴을 알리고 난뒤 잡지모델 요청이 쇄도했다. 여성지 <엘르>와 <마리끌레르>에는 화보가 실렸고 의류제조사인 나이스 클럽과는 이때 전속모델 계약을 했다.

서늘한 바람이 느껴질 때인 9월말 께부터 방송사의 TV드라마 출연 요청이 줄을 이었다. MBC TV의 인기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행운도 왔다. 연기하기는 무척 즐거웠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연기력을 키우는 데에는 썩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다.

연기력을 익히는 데서는 역시 정통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셋 여자 셋>에 출연 하면서는 줄곧 “카메라 앞에 어떻게 서야 예쁘게 나오는가”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그렇다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10월초에 출연했던 MBC TV <일요일 일요일밤에>는 연기력의 폭을 넓힌 배움의 장이었다. 개그맨 김국진 오빠가 출연하는 <감자골 아이들>에 단역으로 나섰는데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하는 보건소 여직원 역이었다.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얻은 것이 많다. 무엇보다 “모델 이나영이 바로 너였구나”하는 반응에서 보듯 나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래도 나에 대한 불만은 여전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서너 작품에 출연했다해도 신출내기 연기자 모습 그대로였다. 도대체 연기에 있어 나아진 건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그렇게 바보 같았는 지 모르겠다. 신인 연기자가 으레 그렇듯 나는 대사를 외는 데만 몰두했고 카메라 앞에서의 시선처리는 어정쩡했다. 긴장을 해서인지 대사만 하고는 다음 표정을 잃어버리곤 했다 .

하지만 10월 들어 MBC TV 베스트극장에 출연하면서 나의 연기력에서 미숙했던 부분들을 어느정도 치유할 수 있었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을까>에서 남자 주인공 최철우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여직원 역을 맡아 삼각관계를 그려냈다. 처음으로 해본 애정연기였지만 이 작품을 통해 나의 연기력을 한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창피하지만 숨겨진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을까>에 출연하면서 발음에 이상이 생겼다. 왜냐하면 연예인으로 첫발을 들여놓았던 4월 치아 교정을 했는데 이 작품에 출연할 때까지도 교정틀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더우기 치아교정틀을 안으로 했기에 혀가 굳어 있었다.

쵤영 직전 감독선생님은 “발음이 이상하다”면서 나에게 이유를 물었고“치아를 교정하고 있다”고 하니 당장 풀라고 호통을 치셨다. 어쩔 수 없이 교정틀을 풀었지만 혀가 굳은 탓에 발음이 엉망이었다.

발음 교정을 위해 이런 저런 방법을 다해봤다. 볼펜을 입에 물고는 혀를 움직이는 연습도 했고 배용준 선배님의 권유로 포도주 코르크마개를 물고 연습해 효과도 보았다.

나를 흥분시킨 작은 사건이 있었다.

10월 초쯤의 일이다. 내게 맞는 드라마를 수소문하던 나의 소속사 백기획으로 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MBC TV 수목드라마 <애드버킷>의 후속으로 준비중인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 캐스팅됐으니 빨리 준비하고 제작진을 만나러 가자는 것이다.

현재 방영중인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 내가 맡은 역은 배용준 선배(재호역)의 여동생 재영으로 요즘‘꽥꽥이 할머니’나문희선배님의 외동딸 미선(김영미 분)과 티격태격 사랑다툼을 하고 있다.

매니저 오빠와 함께 MBC 드라마 제작국에서 박종 감독님을 만나 인사했는데 초면치고도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였다.

박감독님은 나를 보고는 대뜸 "애가 머슴애 같다" 면서 “여자아이 맞느냐”고 했다. 나는 순간 당혹스러웠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속으로 화가 났다.“아니 이럴수가.... 아무리 내 얼굴이 섹시하지 않다고 처녀보고 머슴애 같다니”

박감독님은 매니저 오빠에게‘왜 하필이면 저 아이를 추천했느냐’는 식이었다. 나를 면전에 놓고 무안을 줄 정도였으니 아마도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혹독한 말투는 계속됐다. “저 아이는 먼저 여자가 돼야 한다”고 했고 “1년 정도 연기공부를 더 시켜서 나에게 데리고 오라”고도 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아무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감독님은 내가 딱해보였던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저아이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어디서 본듯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감독님은 망연자실 발길을 돌리려던 나를 불러세웠다.

박감독님의 한마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잠뱅이 그 아이였구나” 이렇게 해서 나는 참으로 어렵게 면접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박종 감독님으로부터 혹독한 면접시험을 치르고 어렵사리 MBC TV 수목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 캐스팅됐지만 왠지 나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

연기에 앞서 여자가 돼야한다는 박 감독님의 말씀은 꽤나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연기도 아직 설익은 판에 여자 냄새도 없다고?’하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시종 자신없어 하는 나를 보고 주변에서는 “너는 할 수있어”라면서 다독이고 격려해 주었다. 열심히 대사 읽고 연기 연습하면 누구든 잘 할 수 있다면서.

망설이던 나는 결국 거듭된 종용에 “해보자”며 팔을 걷어 부쳤고 11월 중순께부터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본격적인 촬영준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1회부터 4회까지의 대본이 주어졌다. 우선 며칠 밤을 새면서 대본 읽기에만 매달린뒤 연기 연습을 했다. 드라마 서너 편에 출연한 적이 있어 카메라가 겁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는 방영시간 50분에, 방영횟수도 50회에 이르는 정통 드라마여서 호흡을 길게 갖고 나 자신을 추스려야 했다.



연기 일기 쓰기


소속사에서는 나의 연기연습을 위해 개인 연기선생님을 소개해줬는데 이 분이 바로 방송사 주변에서는 널리 알려진 김지숙(여자)선생님이었다. 김선생님은 단국대를 졸업하고 극단 기획일도 하면서 연기강사로 개인레슨을 한다.

김선생님은 한밤중에도 소속사 사무실로 나를 불러내 연기지도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연기지도는 대략 이러했다. 대본을 보면서 어떤 상황, 어떤 분위기에서 오가는 대사인지를 대화를 통해 점검해주고 장면에 따라 얼굴 표정은 어떻게 해야하고 음량과 음색은 어떠해야하는지를 스스로 알도록 유도해주었다. SBS TV 납량특집 <어느날 갑자기>에서 분장과 얼굴 표정연기를 익혔다면 MBC TV 베스트극장에서는 단막극의 짧은 이야기지만 내가 연기해야하는 극 분위기를 파악하고 읽는 능력을 길렀다.

그때는 박종 감독선생님이“얼굴을 카메라에 보여줘라”라는 주문을 받았을 만큼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디었지만 MBC TV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나 오락 쇼프로그램인 <일요일 일요일밤에>서는 카메라를 바라 보는 시선을 야무지게 할 수 있었고 어떤 포즈로 서야 이쁘게 나오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드라마든 시트콤이든 서너 작품에 출연하면서 연기경험은 쌓였지만 개인 레슨을 받고서야 나는 연기 A B C를 꿰뚫을 수 있었고 어떤 역을 맡더라도 해낼 수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한마디로 연기를 머리로 하지 않고 감정으로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우쳤다.

큰 연기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개인레슨을 통해 얻었다. 바로 연기일기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레슨을 해준 김지숙 선생님은 나에게 너무도 큰 깨우침을 주었다.

김 선생님은 “연기는 나영이가 하지만 보는 이는 시청자라는 사실이다. 어찌됐든 연기자는 시청자 입장에서 자신의 연기를 보는 모니터 역할까지도 해야한다”면서 연기일기를 쓰도록 권유했다. 지금도 매일 매일 일기를 쓰는데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감독님한테 야단맞은 장면을 떠올리면서 내 자신을 평가하는 습관을 이때 길들였다.

또 한가지 가르침을 주었는데 어쩌면 연기보다도 더 소중한 일이었다. 바로 체력이었다. 모든 일에서도 그러하지만 연기자에게는 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별히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요즘에도 시간이 나면 어떤 공간에서든 제자리서 뜀뛰기 등 가벼운 체조로 체력을 다진다.



신데렐라의 행운

MBC TV 수목극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의 출연을 위해 제작진과 캐스팅을 한참 논하고 있을때 나의 소속사인 <백기획>은 실로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바로 한일 문화교류 원년에 한국 여배우를 처음 일본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출연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사실 내가 이런 기념비적인 대사건의 주인공이 될지는 꿈에도 생각못했던 일이다. 너무도 우연하게 건져진 ‘신데렐라’ 이야기같은 행운이었다.

<백기획>은 다른 엔터테인먼트사도 그렇듯이 나의 TV 드라마 출연을 위해 3개 공중파 방송사에 나영이의 프로필을 집중배포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낭보가 날아든 것이다.

12월초 어느날인가 일본 3대 메이저 영화사인 도에이사에서 한국어 통역일을 하고 있는 안영희 선생님으로부터 전화연락이 왔는데 SBS TV 드라마작가라는 분을 통해 나의 프로필을 받았다면서 일본 영화에 출연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해왔다.

그런데 이 일이 그저 우연만은 아니었다. 나의 소속사의 꼼꼼한 일솜씨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백기획>은 SBS TV <좋은 세상만들기>를 제작한 정삼균 PD를 통해 나의 일본진출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이분이 안 선생님과 채널을 튼 것이다.

안 선생님은 “일본 도에이영화사는 일본의 톱스타인 나가부치 조요시가 출연하는 영화 <에이지>(英二)에서 그의 상대역인 여주인공을 맡을 신인 여배우를 한국서 찾고 있는데 15명의 프로필을 갖고 있다”면서 “그들 중 이나영이 가장 맘에 드니까 일본으로 건너와 오디션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일본 도에이영화사로부터 “오디션을 할테니 도쿄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나는 지난해 12월20일 2박3일 일정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이때 나 외에도 오디션에 참가한 동료연기자들이 더 있는데 KBS 2TV <야망의 전설>에 출연했던 선배탤런트 조은숙 언니도 그중 하나였다.

도쿄 도착 다음날인 21일 도에이영화사 사무실에서 카메라 테스트 등을 받았다. 나는 오디션에서 몸짓으로만 연기를 하는 ‘마임’을 했는데 제작진들은 나의 이런 저런 동작을 담은 스틸사진을 찍었다. 오디션을 마치고 나는 백기획 관계자들과 호텔에 머물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내가 뽑히리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생각에 무척 초조했다. 이날 저녁 도에이영화사 제작진은 오디션에 참가한 3명의 한국 배우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심도있게 논의했는데 나를 택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무엇보다 구로쓰치 감독이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귀띔해줬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영화 제작진들은 스틸사진에 찍혀나온 나의 모습 가운데 상대를 응시하는 눈빛서‘투명한 매력’을 읽었다며 나를 선택한 이유가 눈빛이었다고 전해주었다.

구로쓰치 감독은 영화 <에이지>(英二)의 주인공인 나가부치의 상대 여배우로 나를 선택했지만 캐스팅 여부가 최종 결정난 것은 아니었다.

영화 <에이지>는 도에이영화사 외에도 나가부치가 운영하는 프로덕션과 후지 TV등이 제작비를 각각 3분의 1씩 공동투자하는 영화여서 나가부치의 결정이 중요한 변수였다. 즉 나가부치의 마음에 들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나가부치가 도쿄에 없었던 관계로 12월26일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하고 나는 일단 귀국했다.

2박3일 일정으로 일본 영화 <에이지> 출연을 위한 오디션을 받으러 왔지만 당초 걱정하던 바와 달리 일이 술술 잘풀려 일정을 하루 당겨 22일 귀국을 서둘렀다.

21일 구로쓰치 감독을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캐스팅에 따른 구체적인 협상을 하려 했지만 시간이 맞지않아 결국 약속은 취소됐다. 그러나 일이 잘 풀려 마음도 부풀고 일본이 초행길이어서 나는 이날 밤 홀가분하게 도쿄 하나주쿠 거리를 배회하면서 일본 젊은이들의 세계를 피부로 느꼈다.

밤늦게 호텔로 돌아와보니 나의 매니저인 한승완씨와 통역을 해주신 안영희 선생님이 캐스팅 계약 마무리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다 이왕 일본에 왔으니 이곳 저곳 구경해야겠다는 생각에 귀국일을 하루 늦췄고 다음날 아침 일찍 도쿄 디즈니랜드를 비롯, 여러 곳을 구경했다.

23일 저녁 귀국한 나는 이틀동안 바쁜 스케줄에 매달려야 했다. MBC TV 수목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밀린 촬영도 해야 했고 가수 박진영의 뮤직비디오 <키스 미> 출연 약속도 지켜야 했다.

<에이지>의 남자주인공이자 공동제작자인 나가부치를 만나기로 한 26일 나는 아침 일찍 도쿄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나의 촬영 스케줄때문에 이날 저녁 비행기로 돌아와야하는 강행군이었다.

나리타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뜻밖의 환대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구로쓰치 감독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 아닌가. 그는 21일 저녁식사 약속을 못 지킨데에 대한 미안하기도 하고 나를 한번 더 만나보고 싶어서 직접 공항에 나왔다고 했다. 더욱 놀란 것은 빨간색 스포츠카 포르세를 직접 몰고 나타났으며 나를 옆자리에 태우겠다는 것이다.

구로쓰치 감독이 모는 포르셰 스포츠카에 탐으로써 이색적인 면접시험을 치른 셈이다. 나와 동행한 이들은 도에이 영화사측에서 내준 미니버스로 포르셰를 뒤따랐다.

나는 일본어를 할줄 몰랐기에 차안에서 구로쓰치 감독과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짧은 영어였지만 의사는 통할 수준이었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든다면서 “나영이는 좋은 배우가 될 것이다. 배우를 캐스팅하고 나면 장점만을 본다”고 했다. 그는 내가 장점이 많은 배우이니 좋은 영화를 만들수 있겠다면서 잘해보자고 했다.

26일 오전 <에이지>의 남자주인공인 나가부치 조요시를 만나기로 했지만 그는 다른 곳에서 콘서트 일정이 남아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그를 만난 것은 해를 넘긴 1월20일 <에이지> 제작발표회에서였다.

이날 낮에는 도에이 영화사측의 초청으로 구로쓰치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과 점심을 함께 했는데 모두들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에이지>캐스팅과 노출신 등의 세가지 조건

바쁜 스케줄 때문에 귀국을 서둘러야했던 나와는 달리 주변은 왠지 바삐 움직였고 다소는 무거운 분위기인 듯했다. 나의 소속사인 <백기획>은 <에이지> 캐스팅 조건을 놓고 영화사측과 본격적인 협상에 나섰는데 해결이 쉽지 않은 조건들인듯 했다.

도에이 영화사는 구로쓰치 감독이 이나영 아니면 안된다고 하니 나를 택하겠지만 당초 제시했던 캐스팅 조건 ‘세가지’를 이행해달라고 요구했다. 도에이 영화사측이 일본영화 <에이지>의 여주인공을 캐스팅하면서 제시한 3가지 조건이란 ▲촬영기간동안 배우의 스케즐을 모두 비워야 하고 ▲노출신에 응해야하며 ▲키가 작아야 한다(165㎝이하)는 것이었다.

<에이지>의 여주인공은 ‘매화’역인데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한 중국여자이다. 야쿠자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매화’는 손님으로 만난 ‘에이지’ 역의 나가부치와 사랑을 나누다 야쿠자에 의해 죽음을 맞는 비련의 여인이다.

도에이 영화사는 나에게 ‘매화’역을 맡으려면 이 세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하는데 사실 단 한가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 MBC TV 수목극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 출연하고 있어 스케줄을 비우라는 요구는 무리였다.

더우기 노출신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배일감정이 깔려있는데 일본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 옷을 벗을 수 없는 노릇아닌가. 또 나는 기독교 침례교인이라 종교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처지였다.

키가 작아야한다는 조건은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저 ‘매화’가 중국여자이기에 키가 작은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남자주인공인 나가부치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나가부치는 키가 작으니 상대역을 맡은 여주인공도 그보다 키가 작아야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나의 키가 169㎝이니 나가부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소속사인 <백기획>으로선 뜻하지 않은 이들 조건때문에 비상이 걸렸고 해결을 위해 도에이 영화사측과 힘겨운 협상을 벌여야했다.

26일 저녁 서울에 돌아왔는데 협상을 벌이는 두 협상채널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국제전화가 오갔고 팩스도 어지럽게 널부러져있었다. 협상진행을 지켜보니까 ‘키가 작아야한다’는 조건은 타결된 듯했지만 남은 두 조건에선 해결기미가 전혀 없었다.

일본 영화 <에이지>(英二)의 제작사인 도에이 영화사측은 나의 소속사 <백기획>과 스케줄과 노출신 등 남은 2가지 조건을 놓고 지루한 협상을 벌였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도에이 영화사는 내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촬영스케줄을 맞추기는 무리라면서 영화 <에이지>에만 전념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노출신은 영화에서 자연스러운 장면이라면서 내가 노출신을 거부하는 것은 영화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부쳤다.

<백기획>의 거듭된 설득에도 이렇다할 타협안을 찾지못하자 일본 영화진출을 포기해야할 것같다는 어두운 분위기도 감돌았다.

상황은 도에이 영화사가 세가지 조건을 철회하든가 아니면 우리측이 일본영화 진출을 포기하든가 양자택일하는 길에는 타결책이 없는 막다른 길로 몰리고 있었다. 팽팽한 줄다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협상 중개를 해주면서 애를 써준 분이 바로 도에이 영화사와 우리측의 통역을 맡아준 안영희씨였다.

안선생님은 MBC TV 수목극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 출연해야하고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이나 종교적 이유에서 노출신은 절대로 안된다는 나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도에이 영화사에 대해 꼼짝달삭못할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안영희씨는 영화 연출을 할 구로쓰치 감독이 내가 아니면 영화제작을 포기하겠다는 답을 받아냈다. 그리고 이 말을 협상카드로 제시한 것이다. 결국 도에이영화사의 ‘세가지 조건’은 철회되었다.

해는 바뀌고 99년 1월 초 지지부진했던 협상은 해결 실마리를 찾았다. 안선생님의 집요한 설득으로 도에이 영화사측이 백기를 든 것이다.

통역을 맡아준 안영희 선생님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인 도에이 영화사측은 조건을 철회하겠다는 뜻과 함께 1월10일 도쿄에서 다시 만나 캐스팅여부를 최종 결정짓자고 <백기획>에 알려왔다.

이때가 1월 4~5일께 였는데 그렇다고 불씨는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도에이 영화사측은 노출신에 대해선 좀더 이야기하자며 여운을 남겼다.

어쨌든 다소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10일 도쿄로 날아갔다. 그런데 잘풀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도쿄행 비행기안에서부터 실타래가 엉키기 시작했다.

아침을 거른채 비행기를 탔는데 배고픈 탓에 기내음식을 탐냈더니 그만 체하고 말았다. 속이 거북했고 화장실을 가는데 서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리타 공항에 내렸는데 컨디션이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영화에 한국 여배우가 주연으로 첫출연한다’는 뉴스를 취재하려고 몰려든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공항에서 간단한 인터뷰를 해야했다.

하지만 어지러움에다 식은땀까지 나는 몸상태였으니 사진 포즈는 물론 인터뷰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내 모습에서 일본영화 <에이지>의 제작사 사람들과 일본기자들로부터 엉뚱한 오해를 샀다.

그네들은 내 속사정을 모른채 “이나영이 이런 저런 이유로 출연을 기피 하려한다”는 엉뚱한 소문을 냈다고 한다.

간신히 몸을 추스리곤 구로쓰치 감독을 비롯한 영화 <에이지> 제작자들이 마련한 점심식사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을 빠져나왔다.

약속장소로 가는 차안에서도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도쿄 시내의 한 이탈리아 음식점에 도착했는데 사태는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10일 낮 도쿄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이뤄진 만남은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구로쓰치 감독은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뒤 나에게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이야기하라”며 서두를 꺼냈다.

나는 무엇에 대한 의문사항을 말하는 것인지 선뜻 이해를 못했고 무엇을 물어야할지 주저했다. “혹시 노출신에 대한 것이 아닐까”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질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참을 말없이 음식을 먹는데 식사 분위기도 어색했고 더우기 오전에 기내음식에 체했던 탓인지 또 탈이 나고 말았다. 구로쓰치 감독은 날 생각해서 특별히 이것 저것 많이 주문했는데 나는 거의 손도 못 댔으니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어색한 분위기는 계속됐고 나는 구로쓰치 감독의 눈치마저 살펴야하는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구로쓰치 감독은 분명 기분이 상한 듯했다. 나의 속은 계속 편하지 못했고 그나마 먹은 스프 마저 탈이나 살며시 자리를 떠 화장실에 가서는 토하고 말았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분위기는 정말 썰렁했고 상황은 '엎지러진 물'이었다.

구로쓰치 감독은 끝내 거친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는 “내 영화 찍기가 싫은거냐. 당신이 싫다면 나도 영화제작을 포기하겠다”고까지 말했으니 정말 돌이킬 수없는 상황에 몰린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통역을 맡은 안영희씨는 기내 음식이 잘못돼 탈이 났으며 스프마저 토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오해를 풀려고 무척이나 애쓰는 모습이었다.

구로쓰치 감독과의 점심식사는 일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 놓았다.

나는 핏기없는 얼굴로 이날 스케줄을 따라 일본 후지 TV의상쇼에 출연했는데 도무지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영화 <에이지>에의 출연을 위해 협상을 도맡아 진행해 온 <벡기획> 김희정 실장은"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며 야단을 치니 정말로 곤혹스러웠다. 결국 우리측은 도에이여화사측에 밤 12시까지 출연 계약 여부에 대한 최종입장을 밝혀달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도에이 영화사측은 입장정리를 못했는지 밤 늦게 "입장을 정리해 13일까지 최종결정을 짓겠다"는 통보만을 해왔다. 협상은 깨진 듯했고 '일본영화 여주인공을 맡은 첫 한국 여배우'라는 기대감을 허공으로 날리는 기분으로 다음날인 11일 귀국했다.

우리를 떠나보낸 뒤 구로쓰치 감독은 정말로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설득하려한 안영희씨에게 노출신이나 일본영화 촬영에만 전념해 달라는 요구를 거부한데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리면서 "나영이는 나와 영화를 할 마음이 없다"고까지 단정했단다. 뱌랑끝에 볼린 듯했다.

하지만 <백기획>은 마지막 협상 여지가 남았다는 판단에서인지 포기하지 않고 캐스팅을 결정짓는 최종시한인 13일까지 도에이 영화사측을 설득했다. '고진감래'라 했든가. 안영희씨의 중재로 구로쓰치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고 도에이 영화사도 "감독이 원하는데 어찌하랴"라며 시나리오에서 상반신 노출신 대신 등를 보이는 선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한일 문화교류 원년의 문을 열다

1월 13일 영화 <에이지>에의 출연이 확정되자 다음날 <일간스포츠>가 국내 언론으로는 첫 보도를 냈다. 일본신문들도 내가 일본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에 대해 “한국여배우가 처음으로 일본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은 것은 한일 문화교류 원년에 의미있는 일”이라면서 크게 다루었다.

나는 지금도 당시의 일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한국 여배우가 일본영화의 여주인공을 맡는 것이 그토록 어렵고 의미있는가를.

노출신 문제로 실랑이가 한참일때 구로쓰치 감독은 “점찍은 홍콩 여배우가 있는데 옷을 벗을 수 있으니 자기를 캐스팅해 달라고까지 했다”면서 노출신을 끝내 거부하는 나를 힐난하기도 했다.

이런 말까지 했던 구로쓰치 감독이 왜“나영이가 아니면 영화를 포기하겠다”면서 자기고집을 꺾은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일본영화 <에이지>에 출연하는데 가장 큰 거림돌은 노출신이었다. 일본영화에서 여배우가 옷을 벗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란다. 자기들 가치관대로 나에게 옷을 벗을 것을 요구했고 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내가 배우이니 벗으면 그만인데 왜 벗지 않겠다고 고집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묻어나는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 탓이다.

한국 여배우가 일본영화에 출연해 옷을 벗는다면 한국사람들은 뭐라 생각 할까. 돈 몇푼에 일본사람들의 노리개가 됐다느니 민족 자존심을 내팽개쳤다는니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생각있는 여배우라면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노출신 요구를 받아들였겠는가.

구로쓰치 감독은 1월 13일 등을 드러내는 선에서 노출조건을 최종타결 지으면서 통역을 맡았던 안영희씨에게 여운있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사실 극중 매화가 중국여자여서 홍콩 여배우를 캐스팅하면 손쉬웠다. 이나영은 스케줄이나 노출조건, 키(165㎝) 등 내가 고집한 세가지 조건에 단 한가지도 맞는 것이 없었는데 나는 결국 이나영을 택했다”

그는 꽤나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그러나 나는 이나영과 영화를 찍을 수 밖에 없다”고 독백했다고 한다.

그는 왜 나를 고집했을까. 내가 ‘매화’역에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 여배우가 꼭 필요해서일까.

일본 영화를 찍으면서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인데 일본 영화계는 한국시장 진출에 큰 뜻을 두고 있는 듯했다. 이들이 한국시장을 발판으로 광대한 중국시장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어찌됐든 구로쓰치 감독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면서 편하게 찍을 수있는 홍콩 여배우를 마다하고 단 하나의 조건도 맞지않는 나를 택했다.

나의 소속사인 백기획은 ‘한국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일본영화의 여주인공을 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일 문화교류 원년에 어렵사리 일본 영화 시장을 노크했고 일본영화사들의 한국진출 의도와 맞물리면서 나는 신데렐라같은 행운을 잡은 셈이다.

1월 20일 아침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이날 오후 2시 도쿄회관에서 내가 출연할 영화 <에이지>의 제작발표회가 있었다. 이날 제작발표회에는 100여 명의 언론인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특히 SBS TV 특파원의 모습도 보여 흐뭇했다. 영화 <에이지>의 제작발표회는 1시간 30분동안 진행됐는데 모든 분위기가 남자주인공인 나가부치에게만 쏠렸다. 나가부치는 9년만에 영화에 출연하기에 기자들의 질문을 독차지했는데 나에게도 몇가지 질문이 있었다. 그중 하나만 소개하겠다.

아사히 TV 기자는 내가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 나는 “감정은 어느 나라든 어떤 언어에서든 똑같다. 직감력으로 연기하기에 일본어를 모른다해도 문제는 없다”고 답했다.



낯 뜨거운 연기 NG없이 한번에



며칠뒤 아사히 TV는 '아시아 최고 미인 20선' 을 제작하면서 나를 뽑아 특별인터뷰도 했다.

제작발표회를 끝내고 이날 오후 연기자와 스탭 전원이 모여 인사를 겸한 리허설을 가졌다. 나는 영화 <에이지>의 시나리오를 미리 받아 읽었기에 일본 배우들과 인사를 나눈뒤 바로 연기 연습을 했다.

리허설을 하면서 일본 배우들의 진지한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어떤이는 단역임에도 주연이나 조연 못지않게 열심히 연습했다.

이날 리허설은 밤늦게까지 계속됐고 MBC TV 수목극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촬영을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귀국길에 올랐다.

한편 영화 <에이지>는 1월26일 첫 촬영에 들어갔는데 나의 촬영 스케줄은 2월1일부터 잡혔다. 국내서는 MBC TV 수목극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 출연해야하기에 영화 <에이지>를 촬영하려면 현해탄을 수시로 건너야했다. 이런 스케줄을 만들어내려면 MBC TV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연출을 맡은 박종 감독님의 허락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MBC TV 수목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연출자인 박종 감독님은“일본 영화 <에이지>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면서“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일이 많은 편이어서 <에이지>의 촬영스케줄을 잡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2월 1일 촬영을 시작해 3월26일 촬영을 끝내기까지 한국과 일본을 6차례나 오가야하는 강행군이었다.

영화 <에이지>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매화는 돈을 벌기위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온 중국여자이다. 그는 야쿠자에게 붙들려 돈을 벌지도, 모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도망치려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어느날 야쿠자의 손님으로 온 에이지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에이지는 야쿠자 조직을 배신하고 매화를 탈출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매화는 야쿠자에게 죽음을 당하고 에이지는 매화의 복수를 위해 홀로 야쿠자와 맞선다는 얘기다.

첫 촬영지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거리에 있는 이와구니라는 곳이었다. 첫 신은 ‘매화’인 내가 야쿠자에게 납치되고 도망가다가 잡히는 장면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큰 눈이 내렸다. 당초에는 헬기를 동원해 촬영하려했으나 눈이 내려 차질이 빚어졌다.

하지만 이와구니 사람들은 영화배우 나가부치와 이나영이 이곳을 찾았기에 행운이 깃들어 20년만에 큰 눈이 내렸다며 반겼다.

구로쓰치 감독은 ‘상서로운 눈’이라는 주위사람들의 말에 따라 눈밭에서 촬영을 강행했다. <에이지>를 찍으면서 재미있던 에피소드 몇가지를 소개하겠다.

야쿠자 무라카와파에 붙잡혀 보스의 애첩이 된 나는 어느날 나이든 일본 정치인의 수청을 드는 장면을 찍어야했다.

그 사람이 나의 등뒤에서 양팔로 껴앉는데 너무나 징그러웠다. 낯선 남자 에게 안겨보기는 처음이라 잔뜩 겁먹고 소름끼치는 표정이었던데다 그 남자 역시 너무도 진지했기에 NG를 걱정했는데 단 한번으로 촬영을 끝낼 수 있어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그런데 구로쓰치 감독은 이런 나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듯 연기력이 대단하다고 연신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에이지’역을 맡은 남자주인공 나가부치 츠요시와 연기했던 장면은 지금도 강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가부치 츠요시(43)는 일본에서는 대단한 인물이다. 78년 가수 데뷔 이래 <준코>(80년) <굿바이 청춘>(83년) <로쿠나몬자네(나는 대단한 놈이 아니다)>(86년) <간빠이>(88년) <돈보(잠자리)>(88년) <게키아이>(89년) 등 무척 많은 히트곡을 냈다. 최근에는 싱글판 <늑대 한 마리, 노래하면 사무라이>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88년 일본 후지 TV 드라마 <돈보>에서 아웃사이더 ‘오가와 에이지’ 역을 맡아 인기를 누린 것을 계기로 영화에 진출, 89년 구로쓰치 감독과 함께 찍은 영화 <오르골>이 대히트했다. 이후 <샤본다마(비누방울)>(91년) <런>(93) <보디가드>(97) 등 TV 드라마에서 출연, 주로 고고한 영웅을 연기해 팬들을 열광시켰다.

<에이지>의 촬영을 위해 두번째로 일본으로 건너간 2월10일 도쿄의 세트장에서 나가부치를 만났는데 1월20일 제작발표회에서 맞대면 한 후 처음이었다.

도쿄 세트장에서 첫 인사를 나누고 나가부치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영화를 크랭크 인하고도 보름만에 만나게 돼 미안하다. 만나고 싶었다”면서 첫 인상과 달리 중년의 여유있고 중후한 멋을 느끼게 했다.

이날 저녁식사에서 나가부치는 나에게 이색적인 주문을 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시간나는대로 조깅을 함께 하자는 권유였다. 옆에 앉아 있던 구로쓰치 감독도 “영화에서 연인이니까 두 사람사이에 연인의 감정을 살리려면 격의없는 대화가 필요하다”면서 거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가부치와 나, 매니저 한승완 오빠 등 5명은 도쿄 요요기 경기장 트랙을 돌면서 조깅을 했다. 조깅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나가부치가 다가오더니 “어깨가 약간 처졌는데 영화배우로는 어울리지 않는 자세이다. 이번 기회에 고치는 것이 어떠냐”며 스트레칭을 해보자고 했다.

여러 자세의 스트레칭 가르쳐주었는데 잘못된 자세를 바로잡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다음날에도 조깅을 했는데 그는 나에게 선수용 조깅화 한 켤레를 선물했다. 어떻게 나의 발사이즈를 알아냈는지 잘 맞았다. 그는 또 “설연휴인데도 집과 식구를 떠나 있어 안됐다”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야쿠자 영화의 주인공을 맡았다는 선입견으로 처음에는 퉁명스럽고 무섭고 잔인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3~4일 함께 지내고 보니 생각보다는 센스있고 예절바르고 선한 남자였다.

촬영장에서 배우들은 배역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유독 나가부치만은 나를 “매화”가 아닌 “나영아”라고 불렀다. 자기 동생같단다. 이렇게 해서 그와 나는 오빠 동생 사이가 됐다. 이후로 나가부치는 나만 보면 어깨를 툭치며 서툰 우리말로 “나영아. 잘 있었어”라면서 친근감을 보여줬다. 나가부치의 고향은 가고시마라는 곳이다.

나가부치는 자기 고향을 찾은 나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가고시마에서는 모찌(떡)를 대 꼬챙이로 찔러 엿을 발라 먹는 요리가 유명하다. 나가부치는 자기가 어릴때 좋아했던 음식이라며 정감나는 대접을 해주었다.

또 그는 촬영도중 짬을 내 자기 차에 나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했는데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하면서 가고시마의 이곳 저것을 안내해 주었다.

가고시마는 온천이 유명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온천신을 찍게 됐다. 영화속에서 내가 야쿠자에게 권총으로 살해당해 강물에 떠내려가는 장면이었는데 이 신을 가고시마에서 찍기로 되어 있었다. 2월 중순의 이곳 날씨는 바람이 많고 쌀쌀한데다 강물도 차가왔다.

영화 제작진은 강물의 수온을 재는 등 이궁리 저궁리 끝에 강물에 나를 넣기는 무리라는 판단에서인지 일단 실제 강물에서의 촬영신은 보류했다. 그리고는 촬영지에서 가까운 가고시마 온천으로 이동해 따뜻한 온천물이 흘러내리는 장소에서 내가 죽어서 떠내려가는 장면을 찍었다.

나의 매니저인 한승완 오빠가 이 장면을 스틸사진으로 찍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내가 나가부치에게 “워 아이 니(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 역시 이곳에서 찍었다. 이 말은 영화에서 나에게 주어진 몇 안되는 대사인데다 중국여자인 ‘매화’역을 하면서 내가 배운 유일한 중국말이기도 했다.



2월22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촬영스케줄 관계로 이틀 늦은 24일에야 생일상을 받았는데 일본사람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환대는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그날 밤늦게 나가부치 츠요시를 비롯한 출연 배우들과 구로쓰치 감독 등 모든 스태프들이 다모여 나의 생일축하 파티를 해줬다. 부페식으로 저녁식단을 마련했고 홀가운데에 커다란 케익을 놓았는데 ‘이나영’이란 큼지막한 우리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또 홀입구에는 한글로 ‘이나영 생일 축하’라고 씌어진 플랭카드가 걸렸고 참석한 모든 이들이 우리말로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넸다. 또 모든 이들이 각자 한가지씩의 선물을 준비해 나에게 건냈다.

특히 20살 생일이 성인식을 겸한다는 우리나라의 관습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두들 생일축하와 함께 “나영이도 이제는 성인”이라며 악수를 청해 나를 감동시켰다.

일본 영화인들은 배우들에게 오직 촬영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신변 잡다한 일 하나하나에 세심한 신경을 써주었다. 촬영할 때 배우가 원하는 모든 것이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돼어 있고 옷 하나에도 신경을 써주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그네들은 편한 일본어 대신 짧지만 영어로 서로 의 뜻을 전달했다.

도에이영화사측은 미용 의상 스케줄관리 등 나의 뒷바라지를 한국말을 잘하는 도요카와라는 코디 언니를 배정했는데 정말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그는 눈물흘리는 신에서 내가 눈물이 안나와 식염수를 달라고 하니까“감정을 살려보라”면서 끝내 식염수를 주지않을만큼 나의 연기도 챙겨주었다.

일본 영화 <에이지>의 촬영세트장에 들어서면 나는 늘 “캡이야”를 연발 했다. 집이나 빌딩세트 층층마다 설치한 조명등을 비롯 건물밖의 가로등이나 주변 건물의 야경 등을 섬세하게 만들어놓았다. 작은 소품하나에도 세밀한 손길이 미쳤다.

배우를 아껴주는 일본영화 제작풍토는 부러웠다. 그네들은 자기일에는 너무도 철저했다. 특히 배우들에게 연기외에는 어떤 잡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물통을 들어야할 일이 있었는데 어떤 스탭 아저씨가 자기일이라면서 만류해 겸연쩍기까지 했다.

내가 생선회를 간장에 찍어 먹는 신이었는데 여러번 NG가 났다. 그때마다 그네들은 간장을 바꿔줄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해줬다. 또 생선회도 내가 좋아하는 종류를 가려 회접시의 한가운데 놓아 부담없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잊지못할 일은 노출신에 대한 그들의 약속이었다. 노출을 꺼리는 나를 위해서 원피스차림의 촬영이 끝나면 숄로 어김없이 나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네들은 약속만큼은 철저했고 정말로 친절했고 늘 웃는 얼굴이었다.

현해탄을 6차례나 오간끝에 3월26일 일본 영화 <에이지>의 촬영을 끝냈다. 쫑파티를 못한채 헤어졌는데 나는 일본 배우들이나 스탭진들로부터 “수고했다”면서 꽃다발과 여러가지 선물을 받았다.

두달동안의 짧은 일본 체험기는 막을 내렸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일본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 이나영이 부쩍 컸다는 사실이다. 세상보는 눈도 길렀고 연기력도 탄탄해졌다. 자신감을 챙긴 것도 큰소득이었다.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오늘이 <이나영 스타스토리>의 마지막 회이다. 나는 지금 크나 큰 행복감에 젖어 있다. 한낱 무명 연기지망생이었던 때가 엇그제인데 어느덧 ‘신데렐라’라는 찬사와 함께 현해탄을 넘나드는 스타로 컸다.

이제는 ‘이나영’을 알아보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한일 문화교류 원년의 해에 일본영화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첫 한국여배우라는 행운도 잡았다. 모든 것이 팬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일본 영화 <에이지>를 찍으면서 ‘가장 일본적인 매력을 가진 한국여성’이라는 평를 받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본 연예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개인화보집을 갖게 됐다. 또 일본 영화 출연교섭이 잇따르고 있다.

나의 상품성이 높아진 탓에 일본 CF업계는 나를 주목하고 있다. 코닥필름이나 아사히맥주 등에서 출연을 청하고 있다.

국내서도 영화 출연길이 트여 이달 말부터 <애린>를 촬영한다. 또 <011> <섹시마일드> <700> 등 광고에 출연, CF스타로도 주목받을 만큼 나의 일감은 많아졌다.

이제는 풋내기 연기자가 아닌 팬들의 꼼꼼한 시선을 느껴야하는 공인으로 컸다. 그런만큼 책임감을 느끼기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나에게 소망이 있다면 늘상 새롭게 느껴지는 연기자로 팬들 곁에 남고 싶다.

일간스포츠 독자여러분. 아름답게 커나갈 이나영을 지켜봐 주세요. 그동안 포근한 애정으로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연히 네이버에서 찾게 된 내용이에요.^^

[지나가던 나그네]

내 삶의 활력소 나영공^^

[ppucca]

정말 잘봤습니다. 제가 네멋보고 이나영언니에 대해 굳히는 계기가 되었거든요..아일랜드는 그 연장선상이었고...역시 다른 여자 연기자들보다 자기가치를 높일줄알고 뭐가 중요한지 제대로 알고있는거 같아요. 멋져요. 이나영!!

[Ol나영에게 반해]

우ㅡ 와! ㅋㅋ 저두 '나그네'님처럼 내 삶의 활력소 나영누님 ㅎㅎ!

[- いかるす -]

오늘~ 이글을 읽고 이나영씨에 대해 많은걸 알게됐네요 ^^

[복수씨,우리그냥막살아요.]

역시 올리길 잘했죠? ㅋㅋㅋㅋ 스스로 칭찬하는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