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dreaming...Eighteenth-꿈속으로
*
쪽지 한 장을 두고 집을 나와버렸다.
집을 나와 학교 동아리방에서 몇일을 보냈는지 모른다.
영하는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영하에게 한 말들은 모두 변명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영하에게 누구보다 중요하고 도움이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유도훈 그 사람뿐이었다.
'♬'
혹시나 영하가 아닐까 싶어 벨소리가 울리는 폰을 들여다 보았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누굴까.
"여보세요"
[나 최미란이야.]
"또 무슨일이야."
[영하씨 집에서 나왔다며? 쿡. 무슨 심보야?]
"그걸 일일이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왜? 도훈이랑 영하씨랑 잘되는 꼴 보니까 마음이 아프니? 조금만 더 기다려. 더 마음 아프게 해줄테니까]
"무슨 꿍꿍이야!!"
[글쎄~? 나 지금 영하씨랑 영화 보러 갈거거든, 속이 타 미치겠지? 그럼 나중에 또 전화할게.]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 "
최미란이 영하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그러면 내가 영하의 곁을 떠난 이유도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어떡하지... 도훈이 형을 만나야겠다.
전에 혹시나 싶어 받아 놓은 도훈이형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저... 강승민입니다..."
[아~ 영하씨 친구! 왠일이예요?]
"저... 형...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 네. 어디서 볼까요?]
그렇게 도훈이형과의 약속을 잡고 시내의 한 카페로 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이만큼 시간이 흐른동안 최미란 그 여자가 영하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모른다.
저 멀리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훈이형이 보였다.
나는 바로 일어나 손짓을 했고, 도훈이형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왔다.
"무슨일이예요? 표정이 좋지 않네요."
"저, 형... 후아,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똑똑히 새겨들어요. 저 너무 원망하지 마시구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내가 최미란보다 먼저 선수를 쳐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영하의 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했다.
그래야 도훈이형이 영하를 마음 편히 만날 수 있었고, 영하가 행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하나 차례차례 도훈이형에게 6년 전 그 일부터 최미란이 나를 협박해온 일,
그리고 최미란이 영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려고 하는지, 마지막으로 최미란과 영하가 지금 함께 있다는 것.
모두 도훈이형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형의 궁금하다는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원망으로 가득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에게 아무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실이 영하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꼭..."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저번에 영하씨와 같이 우리집에 온 건, 영하씨 때문인가요. 아니면...
하인이 때문인가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정말로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던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 때까지는 영하가 도훈이형과 만나지 않길 바랬다. 그래야 내가 영하의 곁에 오래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기때문에 지금 도훈이형의 질문에는 어떠한 답을 내릴수가 없었다.
나의 고개는 자꾸만 숙여져갔다.
"죄송합니다... 지금... 영하랑 최미란이 같이 있대요... 빨리 영하한테 연락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죠. 찻값도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꼭...... 영하한테 잘해주십시오..."
고개를 떨구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훈이형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느낄수는 있었다.
'이제 그건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라고 말하고 있었겠지... 아무렴 괜찮다. 앞으로 영원히 영하가 모르고 산다면...
*
[남자보다... 최 미란이랑 같이 있다는게 더 걱정되요. 그러니까 얼른 집에 가요.]
이게 무슨 말이지? 뜬금없이 최미란씨랑 함께 있는 것이 더 걱정된다니.
최미란씨가 과거의 도훈씨 와이프였다는 사실을 내게 말할까봐 그런걸까?
이미 다 알고 시작한건데, 도대체 뭐가 걱정이되서 그러는걸까?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요. 최 선생님은 직장동룐데~ 헤헤. 그럼 영화만 보고 집에 갈게요."
[지금 당장 가면 안되요?]
"네? 왜 그래요?"
[지금도 벌써 9시가 넘었잖아요! 여자는 일찍일찍 다녀야 하니까.]
"에이!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저는 얼굴이 무기라서 괜찮습니다요! 아아, 최선생님이 기다리겠어요~
나중에 영화 끝나고 집에 갈 때 전화 할게요? 기다려요."
[알았어요. 집에 빨리 가야되요. 알았죠? 최미란이랑 같이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밖에서 따로 만나지 말고. 알았죠?]
"알았어요~ 그럼 영화 보러 들어갈게요~ 안녕!"
도훈씨가 왜 이러는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전 부인과 같이 있다는 것이 탐탁치 않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심스레 영화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영화에서 웃긴 장면이 나왔는지 사람들을 와하하 웃고 있었다.
자리를 찾아 들어갔는데, 최미란씨가 보이지 않았다. 곧 있으면 오겠지 싶어 영화를 보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최미란씨에게 문자를 해보았다. '언니'라는 칭호를 써주면서...
'언니. 어디예요? 영화가 벌써 중간이나 왔어요.'
내가 문자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최미란씨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영화를 혼자 봐야했다.
나를 버리고 간 최미란씨가 괘씸해서 걷다가 보이는 돌마다 뻥뻥 차며 집으로 향했다.
"쳇, 진짜 도훈씨 말대로 밖에서는 절대 만나지 않을거야! 흥흥!"
"뭘 그렇게 궁시렁궁시렁대면서 와요? 영하씨가 아무생각 없이 찬 돌에 똥개가 맞아 죽겠어요~"
"어? 도훈씨!"
어느새 내 앞 50M쯤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도훈씨가 있었다.
여자한테 바람맞고 애인을 만나는 상황이라니, 참 웃겼지만 그래도 도훈씨가 너무 반가웠다.
세상에서 혼자가 된 내게 빛과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도훈씨가 정말 반가웠다.
나는 도훈씨에게 당장 달려가 와락 안겼고, 도훈씨는 나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런데 편하지가 않았다. 매일 안기던 민이의 품이 아니라서 그런걸까? 너무나 불편했다.
마치 내게 맞지 않는 44size의 마이를 입은 것과 같이 말이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의 걱정어린 따뜻한 한 마디 조차, 나에게는 높은 하이힐을 신어 불편한 것 같이 느껴졌다.
분명, 도훈씨를 봤을 때 정말 반가웠는데, 이렇게 안기고 도훈씨의 따뜻한 한 마디가 이렇게 불편하다니 말이다.
"아, 아니요. 전화 끊고 영화보러 들어갔는데 최미란씨가 없는거 있죠!!"
"최미란씨? 하하하하... 뭐야. 왜 최미란씨라고 해요?"
"아아... 아무튼!! 최 선생님이 연락도 없이 먼저 가버려서 나혼자 영화 다 보고 왔어요...
최 선생님이 밉다.밉다 생각하다보니까, 머릿속에서 최미란씨라고 막말을 해버렸네요. 하하..."
"귀여워. 근데 영화 마치고 집으로 오는길에 전화 한다고 해놓고 왜 전화 안 했어요?"
최미란씨가 너무나 괘씸헤 땅에 있는 돌만 뻥뻥차다보니 도훈씨에게 전화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이렇게 애인이 있고, 애인에게 꼬박꼬박 전화하던 시절이 너무나 옛날 일이라 익숙치가 않았던 것도 있었다.
늘 내가 전화를 걸 사람이라고는 민이밖에 없었고, 내 전화를 받아주는 사람도 민이밖에 없었다.
지금 민이는 무얼하고 있을까?
"영하씨!"
"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왜 전화 안 했냐고 내가 물어봤는데..."
"최미란씨가 밉다,밉다 생각하다가 전화하는 걸 깜빡했어요! 헤헤~ 근데, 나 데려다 주려고 온 거 맞죠~?
그럼 얼른 집으로 갑시다!"
"훗... 어떻게 알았지~? 신기하네. 영하씨 천재구나!"
"당연하죠! 한.천.재! 똑똑히 기억해두세요~ 헤헤"
"그런데 오늘은 밤인데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같이 걸어가려고 차 안들고 왔어요. 괜찮죠?"
"네! 저 걷는거 엄청 좋아해요~ 자! 나의 뒤를 따르시오!"
그렇게 나는 앞장서서 집으로 향했고 도훈씨는 말 없이 나의 뒤를 졸졸 쫓아 왔다. 걷다가 조금 지쳤는지 목이 말랐다.
뭐 마실것이 없나 두리번 거리다가 저 멀이 편의점이 보였다. 나는 도훈씨에게 편의점에 가자고 몸을 돌렸는데
"도훈씨 뭐하세요?"
"네? 하하... 그냥."
내가 몸을 돌릴 때 가로등 때문에 그림자가 움직였는지 내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도훈씨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내가 도훈씨의 발쪽에 그림자가 비추도록 움직였다. 그럴때마다 움직이는 도훈씨의 발놀림.
정말 내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왔나보다.
"뭐예요~! 지금까지 내 그림자 하나도 안 밟고 온거예요?"
"네. 하하~ 대장의 그림자는 밟으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멈춘거예요?"
"우리~ 편의점가요! 너무 걸어왔더니 목이 말라서..."
"그렇게 씩씩하게 걷더니. 영하씨 몸이 건강하지 못하구나!"
"아니예요!! 난 건강한데..."
"알았어요~ 알았어요~ 우리 물 사먹으러 갑시다~"
이내 토라진 내 옆에 서서 나의 어깨를 감싸는 도훈씨였다. 이 순간이 얼마나 설레였는지.
지금까지 내 그림자도 밟지 않던 사람이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다.
아까 도훈씨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모두 미안할 정도로 너무나 행복했다.
편의점에 들어서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옥수수차를 샀고 도훈씨는 검은콩차를 샀다.
그렇게 우리는 물을 마시며 나란히 걸었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동네 모퉁이를 지났을 때, 분식집이 보였다.
"악! 떡볶이 먹고 싶다!"
"떡볶이요?"
"네네! 떡볶이 2인분이랑 순대 3인분랑~ 캬! 소주 한 병!"
순간 멈칫했다. 내가 도훈씨의 마음을 알았고, 도훈씨가 나의 마음을 알게된 그 날. 나에게 이쁜 옷을 골라주고는
올 때, 떡볶이 2인분, 순대 3인분, 소주 한 병을 사오라던 민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도훈씨랑 같이 있는데 정신이 팔려서 민이가 부탁한 심부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미안해졌다.
혹시 모르니까 떡볶이 2인분, 순대 3인분, 소주 한 병 사들고 가야겠다.
"영하씨?"
"아아... 너무 환상이라 상상좀 하느라구... 헤헤. 사가서 집에서 먹어야겠다~"
"에이. 혼자 먹게요?"
"네? 아뇨. 민이랑 같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민이'라고 말하자 마자 도훈씨의 표정이 싹 변했었던 것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