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현재 총체적 불신 사회다. 대통령이 산유국의 꿈이 실현될 것이라고 호언해도 불과 며칠 만에 절반을 훨씬 넘는 국민이 이를 믿지 않는다. 국회 청문회장에 나온 장·차관과 장군은 증인 선서를 거부해 대놓고 거짓말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개혁의 최우선 대상으로 꼽혀온 검찰은 물론 사법부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진다.
무소불위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은 '검찰의 애완견'이라는 조롱의 대상이 됐고, 최고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은 뉴스 신뢰도 꼴찌를 기록했고, 국민의 방송이라던 KBS도 신뢰도가 급전직하 중이다. '진리의 전당' 대학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대통령 부인의 논문표절 심사를 2년이 넘도록 질질 끌며 결과 발표를 뭉개 온 대학의 총장은 교수와 학생들의 거부로 연임이 좌절됐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고 불의를 꾸짖을 '신뢰와 권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마지막 희망으로 종교와 성직자를 쳐다본다. 유신독재 시절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이 민주화를 부르짖는 학생 시민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었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종교 지배층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종교 지도층은 없습니다."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단언했다.
해방신학은 원래 예수가 하던 신학인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2000년을 외면당하다가 1960년대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메데인 주교회의(1968년 제2차 남미 주교회의)를 계기로 부활한 것이다. 남미의 신학자들이 예수운동과 정치·경제적 상황을 연결해 예수를 관찰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신학의 요점은 교회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교회의 중심은 목사나 신부가 아니고 가난한 신도이다, 개인의 죄보다는 사회악이 더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으로, 이런 기초에서 출발해 예수와 예수운동을 새롭게 보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남미의 현실과 깊이 관련돼 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남미에 진출해 토착종교를 없애고 대륙 전체를 가톨릭화 했다. 이후 남미는 정치적으로는 왕정 혹은 독재 정부,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 500년 이상을 지속해 왔다. 남미의 가톨릭은 군사독재 정부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에 남미의 일부 주교와 신부,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톨릭이 백성을 위로하고 고통에서 해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억압하는 데 협조하고 있다는 각성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해방신학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을 겪는 세계 각 지역으로 전파돼 새로운 신학 흐름을 형성하게 됐다. 예를 들면 필리핀·인도·남아프리카·미국 등지에서 그 문화와 시대에 맞게 해방신학의 아이디어를 적용하려는 노력이 생겨나 흑인 해방신학이나 여성 해방신학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했다.
해방신학이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신학 운동으로 세계 각지에 퍼져갔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그 신학적 근거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해방신학이 예수의 삶에서 크게 발견한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가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억압하는 세력에 예수가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신학자들은 사랑·평화·화해·용서와 같은 단어를 많이 썼는데, 해방신학에서는 저항이란 단어를 부각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 항쟁을 하고, 당시 유다 사회의 지배층인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에 맞서 논쟁하고 다툰 것에서 권력층에 저항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예수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싸웠고, 이로 인해 정치범으로 처형됐다는 점에서 오늘날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의 정당성이라든가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지금 한국에 온다면 당장 탄핵 촛불집회에 나가서 마이크 잡고 대한민국의 목사 신부들 다 나와라, 40명이나 되는 주교들 나와라, 나와 함께 불의한 윤석열 정권과 싸우자, 하면서 선두에 설 것으로 저는 상상해 본다.
윤석열 정권이 민주주의 이념에,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건 너무 증거가 많다. 윤석열 개인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속이나 미신에 빠졌다는 풍문도 많지만, 그걸 떠나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주는 여러 행동에서 천주교 신앙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태원 참사 후 현장에 들른 윤석열이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 '뇌진탕 이런 게 있었겠지'라며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남의 일처럼 말하는 장면이 TV 화면에 잡혔다. 또 최근 발간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는 이태원 사고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는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을 한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윤석열 정권이 지금까지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가난한 사람은 외면하고 부자들을 위한 선심만 쓰고 있다. 사회적 약자나 참사를 당한 유가족을 무시하고 소수의 권력 주변만 챙기고 있다. 굳이 예수의 가르침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민주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반인륜적 행태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전국 순회 시국미사를 통해 윤석열 탄핵을 거론했고, 불교 스님들도 야단법석 시국법회를 열어 탄핵을 요구했다.
윤석열 정권의 무능과 무도한 행태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지난 22대 국회의원 총선 결과로도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돼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이나 지학순 주교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종교 지배층'만 있을 뿐이다. 신부나 목사가 권력의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의한 정권의 패악질을 보고도 모르는 체 침묵하거나 구경만 하거나 아니면 혼자 조용히 있거나 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언론이 진실을 말하면 백성들은 빛 속에서 살 것이고, 언론이 거짓을 말하면 어둠 속에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권력에 영합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기득권 언론들의 행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한국의 교회나 성당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즉, 예수운동의 원형을 되살려보자는 것이다. 1세기 예수운동의 특징은 첫째, 다양성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여러 신학적 흐름이 이때 쓰인 신약성서에 온전히 담겨 있다. 둘째는 일치다. 의견이 달라도 서로 싸우거나 배척하지 않고 같은 공동체에 있으려고 많이 애썼다. 그리고 세 번 째는 평등이다. 1세기 예수운동 공동체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식인과 평민,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의 사회적 차별이 거의 없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이처럼 높은 수준의 평등이 실현된 공동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당시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는 명목의 정치범으로 처형당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뒤로 물러나고 대신 죄의 용서나 화해가 등장했다. 현대의 해방신학은 바로 이 부분을 다시 찾아내 가난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제대로 섬긴다면 돈을 버는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거나 이용할 수가 없고, 돈을 번 이후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내 맘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김근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연세대 철학과에 들어갔다. 곧바로 신학대학으로 가는 것보다는 철학을 공부한 다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광주가톨릭대에 입학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신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현실문제에 관심이 컸다. 광주가톨릭대를 2년 다닌 후 독일 마인츠 대학교 신학과에서 신약성서를 전공했다. 독일 유학 시기에 김근수는 신부의 길이 아닌 신학자의 길로 진로를 바꾼다. 그리고 해방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대변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살았던 중남미 엘살바도르로 향한다. 독일에서 공부한 신약성서에다가 남미의 해방신학 관점을 연결하고 싶었다.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지금까지 10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슬픈 예수> <행동하는 예수> <가난한 예수> 등 그의 전공분야인 신약성서와 해방신학 관련 해설서다. 집필에만 몰두하던 그가 최근엔 대사회적 발언을 활발히 하고 있다. 시국집회에 참석하는가 하면 언론매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유튜브 방송에도 출연 중이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가운데 제 가슴을 찌르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굶어 죽어 가는데 한가하게 커피 마시며 신학 토론만 해서야 되겠느냐는 겁니다. 제가 성서를 연구하고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작은 몸짓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