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92편: 태종 이방원의 숙원사업
(왕권강화를 위한 외척 발호의 시작)
드디어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는 날이다. 사은사 심온, 부사 이적, 주문사 박신으로 구성된 사신이 명나라로 떠나는 날 한양이 술렁거렸다. 대궐은 물론 도성이 들떠 있었다. 왕비의 아버지가 영의정이 되어 사신으 로 떠나니 축하의 물결이 넘쳐홀렀다.
그중에서 제일 축제 분위기는 단연 세종의 정비 공비가 있는 중궁전이었다. 심온의 딸 공비가 세종이후 보위를 이어갈 맏아들 향(문종)을 낳고, 위(수양대군)를 낳은 후, 셋째(안평대군)를 회임하고 있었으니 중궁전은 경하의 연속이었다.
사은사 일행이 경복궁 남쪽 광화문을 빠져나와 육조거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구름처럼 몰려온 환송객들이 길을 메웠다. 장안의 백성들이 다 나왔는지 구경나온 사람들 때문에 사신행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육조거리에 늘어선 사헌부와 이조, 예조, 호조, 형조, 병조, 공조 관원들도 일손을 놓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황토현을 마주보며 행렬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 무렵, 늘어선 군졸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황토 마루에 올라 구경하던 백성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행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가까스로 길을 트고 서전문을 지나 경교 다리에 이르니 경기감사 조치보가 마중 나와 있었다.
경기감사의 환송을 받은 심온 일행이 북으로 향했다. 반송정에서 의주에 이르는 의주대로는 조선팔도 간선도로 중 으뜸이었다.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보다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길을 가마 타고 가는 사은사 행차길은 영광의 길이었다. 모든 사대부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반송정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의 환송을 받은 심온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세종 이도가 보낸 환관 최용과 중전이 보낸 환관 한호련이 심온을 연서역까지 배웅하기 위하여 사신 일행과 함께 무악재를 넘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환관 황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 태종 이방원에게 보고했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세가 못 되어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습니다." 황도의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임금의 장인에 영의정을 겸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이해하면서도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요란한 행차는 국구로서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었다. 태종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에 반하는 신하들의 행동을 역적 이상으로 간주했다. 혁명동지이자 개국공신 정도전이 신권을 앞세워 이복동생 방석을 감싸고 돌 때 용납하지 않았다. 건국 26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왕권이 무너진다면 목숨걸고 세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해 보였다. 태종 이방원의 숙원사업 왕권강화를 위하여 외척 발호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생리적으로 척리를 싫어했다. 훗날, 심온사건 후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에는 참여할 수 없도록 하라'는 원칙을 만든 장본인이 태종이었다. 왕자의 난 때 동지로 활약했던 자신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한 것도 같은 맥락
이었다.
이러한 태종 이방원에게 심온의 뒷모습은 불길한 그림이었다. 초석을 다지기 위하여 아들 세종에게 선위한 자신의 선택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왕비의 아버지고 자신의 사돈이지만 심온의 뒷모습은 묵과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93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