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루에서는 끈 하나로 의사소통은 물론 문자까지 표현해냈다.그들은 키푸(quipu:결승문자)로 불리는 매듭을 이용하여 문자나 숫자를 나타냈다고 한다.뿐만 아니라 복잡한 기록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까지도 나타냈다.
그들은 이웃에게 곡물을 빌려줄 때,계산은 주로 매듭의 코수로 했고,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기 위하여 가는 끈(길이 약 1m)에 적당한 간격을 두어 각각 1, 10,100,1000 을 나타내는 매듭을 지었다.
품목을 나타낼 때는 색채를 이용했다. 곡물의 경우는 녹색,황금은 노란색, 은은 회색으로 했으며 빨간 끈은 병사의 수를 나타냈다.
매듭을 사용한 계수법은 고대 페루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하와이의 원주민을 비롯하여 인도,타이완의 고산족(高山族),기타 일부 도서지방 등에도 전해온다.물론 매듭은 수량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문자 구실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매듭의 약속
우리 나라에도 의사소통의 도구로 매듭문화가 있었다.옛날 주막이나 두부를 파는 가게에서는 처마에 단골손님의 매듭 끈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외상으로 두부 한 모라도 가져가면 매듭을 하나씩 맺어 표시했다.예나 지금이나 외상장부가 많은 상점이 손님 또한 많기는 마찬가지.
그 옛날 주막거리를 지나다가 외상장부 매듭이 많이 걸린 집은 그만큼 인심이 후했던 곳으로 한량들의 걸음을 모았을 것이다.
등짐을 지고 팔도를 누볐던 보부상들도 통신이나 정보교환을 위해 매듭을 이용했다.
이들은 약속된 방식으로 매듭을 지어 특정 장소나 요소에 걸어놓음으로써 교신했는데,주로 칡덩굴을 이용했다.
여기에는 인근 고을의 경제상황, 원님의 수탈상 등의 정보가 교환됐다고 한다.
매듭언어는 주로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 사이에서 쓰였다.얼마 전까지도 이 문화는 시골의 외딴 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대부 등 상위 계층에서 매듭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보다는 장식·의례·장부(帳簿)·의장(儀仗)·복식·편물 등의 기능으로 전환됐다.이로 인해 매듭은 예술적으로 더 한층 발전했다.
한때 역사 저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전통매듭은 현재 인간문화재 김희진씨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그에 따르면 전세계에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매듭예술을 지닌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한다.노리개,보자기,국악기의 장식용으로 단지 종속품인 듯 해도 매듭이 없으면 ‘꽁지 빠진 닭’처럼 보이는 물건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윤복의 미인도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매듭장식을 두 손으로 여며 쥐고 다소곳이 서 있다.조선 후기 여인들의 성장한 차림새에는 언제나 매듭장식이 빠지지 않아 인상적이다.신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노리개에는 화려한 매듭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대삼작 노리개는 가장 크고 화려한 것으로,궁중 예복에 치장했다.은애기 칠보 노리개,옥투호삼작 노리개 등은 조선 여인네들의 가슴을 가장 설레게 하던 장신구로서 인기 품목이었다.남자들도 먹통,쌈지, 시계집,안경집,도포 끈 등에 매듭을 지어 멋을 내곤 했다.
●죽은 자를 묶는 매듭
매듭은 아름다움 이상의 의미도 갖추고 있다.꼬인 운명을 푸는 주력물(呪力物)등 액막이로서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동시에 구속을 상징한다.
그래서 매듭을 푸는 행위는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사람에게나 집안에 불행이 겹치면 팔자나 가운이 꼬인 것으로 판단해,그 꼬인 운명을 풀기 위해 집안에 있는 모든 매듭을 푸는 것으로 액땜을 시작했다.
출산을 한 뒤에 치는 금줄도 매듭의 일종이다.금줄은 대문 앞에 외로(왼쪽) 꼰 새끼에 푸른 솔가지와 불을 상징하는 고추와 숯을 꽂아 쳤다.
속계(俗界)로부터 새 생명이 태어난 성계(聖界)를 격리시켜 산모와 아이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생겨난 풍습이다.금줄은 매듭과 같은 봉쇄효과를 가진다.
봉쇄의 절정은 동심결(同心結)매듭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것은 시신을 묶을 때 사용하는데,절대로 풀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다.죽은 이의 영혼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유래됐다.
고대 이집트 미라의 가슴에도 금으로 만든 매듭이 있다.이 역시 영혼이 시신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봉쇄주력(封鎖呪力)이다.
그런데 최근 아주 강력한 봉쇄주력을 걸어야 할 대상이 등장했다.일본인이다.최근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일본사의 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해 구석기 유물을 날조했다.
또한 다니 쥰세이(72)라는 도자기 상인이 이천에서 제작된 청자를 매입한 뒤,스스로 “고려 청자를 완전하게 복원했다”며 세계적인 박물관,도시,왕궁 등에 고가로 판매해 온 사기 행각이 ‘니혼게이자이신문’ 에 낱낱이 드러났다.
역사를 연구하거나 잃어버린 옛 문화를 복원하는 것은 일종의 매듭짓기다. 매듭을 맺고 푸는 것처럼 우리의 찬란한 예술품을 국제 예술 시장에 마음껏 풀어낼 것을 기대해 봅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