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TK_XV7hDe3s
* 찬송 431장
<민수기 20:1> 1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본문 앞부분인 19장과 지금 시작하게 되는 20장과는 단 한 장 차이이지만 시간적으로는 38년의 시간이 경과해 버린 때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첫 구절을 보면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라고 되어 있는데 지난 13장에서 광야생활 2년 후에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낸 적이 있었지요. 그 때의 장소가 본문에서처럼 가데스였습니다. 정탐에 실패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정탐 기간 40일을 한 해로 계산해서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내게 하셨지요. 정탐할 때에 이미 2년이 지나 있었고, 이제 38년이 흘러서 광야 마지막 해인 40년째에 이른 겁니다. 본문에서 첫째 달이라고 하는 것은 40년째 첫째 달이라는 얘기이지요. 그리고 광야 방황 길을 시작한 곳이 정탐에 실패했던 가데스였는데 이제 광야 방황 끝에 결국 다시 가데스로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 그 38년동안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수기에서는 말하지 않고 있지요. 당연히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겠지만 똑같은 반복이어서 더 말할 필요가 없었던지, 특별하게 소개할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가 없어서인지 민수기에서는 그 38년의 세월에 대해 침묵합니다.
다시 가데스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 무수한 세월이 흘러어도 방황을 처음 시작할 때와 별 다를바 없었다는 의미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본문 다음에 펼쳐지는 물 때문에 불평하는 모습이 또 나오는 것을 보면 38년을 지났어도 백성들은 전혀 변한 게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요.
백성들도 지루했겠지만 이 답답하고 고집스럽고 전혀 변화되지도 않는 이런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모세와 아론과 여성지도자인 미리암은 또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저 역시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몇 개의 교회를 거쳐왔습니다만 오랜 세월을 시무했어도 금방 지나간 것처럼 변화와 성숙함이 있었던 교회가 있는가하면 아무런 변화와 성숙함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웠던 교회도 있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내가 살아온만큼 성숙함의 무게가 느껴지고 소중한 의미와 가치가 담겨진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지루하고 답답한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누나였던 미리암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왔던 모세의 가족들이 이제 때가 되어 하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는 거죠. 조금 있으면 모세의 형 아론이 죽는 일이 있고, 조금 더 있으면 이제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는 얘기가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나옵니다. 비슷한 연령대의 출애굽 1세대들도 그렇게 다 죽어가기 시작했겠지요. 출애굽 1세대들 중에는 지도자였던 모세도 아론도 미리암도 광야에서 다 죽고 정탐을 보낼 때에 정직하게 보고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끔 흥얼거리는 대중가요 중 하나가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입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인생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세상에서 멋지게 성공하고, 또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해보기를 모두가 바라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요즘 버킷 리스트라고 해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목록을 적어놓고 그것을 다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만 그거 다 해보기도 쉽지 않고, 또 다 해봐서 버킷리스트를 완성했다 해도 그것이 내 인생이 완성된 인생인 것은 아니지요. 대부분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다가 결국 때가 되어 세상을 떠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흐름에 밀려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먹을 거 없고 마실 물이 없고 삶이 힘들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해대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에게는 광야생활 40년이 아니라 400년을 살았다해도 그 세월은 무의미합니다. 단지 풍요와 안락함과 육신의 행복과 자기 욕망을 펼쳐보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둔다면 그 모든 것을 다 성취했다 해도 영원한 미완성의 인생이고 별 중요한 의미도 없이 끝나는 인생일 뿐이지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지냈지만 끊임없이 불평해대는 백성들과 그들을 이끌어갔던 모세와 아론과 그 누이 미리암이 가졌던 마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은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지요.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인도해가고 이끌어가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수한 반대와 불평과 도발과 모든 마음 아픈 상황들을 그 오랜 세월 참고 인내하면서, 그러면서도 백성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백성들을 이끌어 왔습니다. 같은 광야생활을 하고 있어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사는 자와 세상과 땅과 자신의 안일함에만 빠져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전혀 다른 거죠.
우리가 왜 예수를 믿고 따르려고 합니까?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살고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인가요? 우리는 세상의 한계를 알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이고, 이런 세상에서 사는 우리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광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위에 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겁니다.
이스라엘 출애굽 1세대도 광야에서 죽었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미리암도 광야에서 죽고 아론도 그리고 모세도 차례대로 죽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의 죽음과 미리암 아론 모세의 죽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내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은 편안하게 잘 죽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잘 살아온 삶이 나의 죽음도 의미있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가장 저주스런 죽음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의 살아오셨던 모든 삶 때문에 오히려 가장 의미있는 죽음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의 그 온전한 삶이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과 영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살다 죽을 것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을 택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게 죽음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의 내용으로 더 충만히 채워가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이스라엘 출애굽 1세대도 광야에서 죽었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미리암도 광야에서 죽고 아론도 그리고 모세도 차례대로 죽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의 죽음과 미리암 아론 모세의 죽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내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은 편안하게 잘 죽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잘 살아온 삶이 나의 죽음도 의미있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가장 저주스런 죽음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의 살아오셨던 모든 삶 때문에 오히려 가장 의미있는 죽음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의 그 온전한 삶이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과 영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살다 죽을 것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을 택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게 죽음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의 내용으로 더 충만히 채워가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위에 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내게 죽음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는 아름다운 삶으로 주님만 의지하게 이끌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