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7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마태오 5,38-42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오늘 복음은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악인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밭을 노립니다.
나봇은 아합에게 포도밭을 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벨 여왕이 나서서 일을 꾸며 나봇을 죽게 합니다.
나봇은 반항도 못 해보고 포도밭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말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 독재자가 나타나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데모라도 해서 저항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대로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지배하에 있었지만, 로마에 세금을 내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악인에게 맞서면 같은 수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주인공은 사이코패스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본인이 그 사이코패스보다 더 악랄한 존재가 됩니다.
같이 놀면 같은 존재가 됩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독재정권을 뒤집어엎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권을 잡으니 더 악랄한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쿠데타를 해 보니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들고일어서지 못하게 하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싹부터 잘랐습니다.
그리고 무려 49년 동안 20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독재정권을 유지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를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악인과 맞서면 나를 따르는 이들도 그를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중에서 많은 이들은 마음에 미움을 가지게 될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민중이 귀족과 종교에 대해 들고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런데 몇몇 선동에 일반 시민들은 수많은 사제와 귀족들의 머리를 단두대에 올려 잘라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미움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들도 모르게 범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와 맞서지 않고 그를 감싸셨습니다.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기기 위해 입맞춤하실 때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끌려가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유다를 감싸신 이유가 ‘하.사.시.’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에 잘 드러납니다.
“적어도 마지막 시간까지, ‘죄악’을 숨겨 두어, 제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로 그들의 몸을
더럽히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7-224).
만약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드러내셨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당신 제자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였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나쁜 생각이 깃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악인에게 맞서면 안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하고 분별하는 장소입니다.
더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수록 더 정화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 저항하거나 맞서기보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으셨는지 먼저 배워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7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5,38-42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강론>
(2024. 6. 17. 월)(마태 5,38-42)
<선은 악보다 강하고, 언제나 항상 선이 악을 이깁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1) 이 말씀에서, 대사제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있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19-23)”
이 이야기를 번역되어 있는 대로만 읽으면, 예수님께서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당신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행동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바리사이들 같은 분이 되어버립니다.
우선 먼저 우리말 성경의 번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 존댓말이 없긴 한데, 우리말로 옮길 때
예수님 말씀을 존댓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사실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왜 나에게 묻느냐?” 라고 말하는 경우는 실제 현실에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니 실제로 대사제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전 경비병을 향해서 하신 말씀도 엄하게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씀으로 번역했다면, 또 존댓말로 번역했다면 분위기와 느낌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 대신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포기하여라.’, 또 ‘앙갚음하지 마라.’ 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신 것은 맞습니다.
2) 재판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한
모욕과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면서, ‘메시아야,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하였다(마태 26,67-68).”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베드로 사도는 그 일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1베드 2,23).”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2-3).”
3) 사도행전에 예수님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
그 곁에 서 있던 자들이 ‘하느님의 대사제를 욕하는 것이오?’ 하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저분이 대사제인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네 백성의 수장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23,1-5)”
대사제가 바오로 사도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이 신성 모독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대사제가 율법대로 재판하지 않는 것을 항의했습니다.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은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5절의 말도, 사과하는 말이 아니라 대사제를 꾸짖는 말입니다.
대사제답지 않게 행동함으로써 대사제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은 대사제 자신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와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합해서 생각하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악행을 당해도 그냥 참으라는 뜻이 아니고, 악에 굴복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같은 악행으로 앙갚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19.21).”
우리는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정의와 선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반드시 ‘선’이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