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 때.. 하나님은 졸고 계시나요? "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에게 왜 고난을 주실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고 전지 전능하다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바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왜 고난을 당하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고난을 받는 동안 하나님은 졸고 계실까요?
자살예방센타에서 사별자의 슬픔을 수기로 펴낸 책에서 발췌한 어느 아버지의 글을 공유합니다.
아들과 이별한지 6년이 지났지만, 남은 우리 가족은 시간이 멈춘 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누가 아들 이야기를 하거나 지나가다 비슷한 아이를 보거나 청첩장을 받을 때면 한동안 멍 해집니다.
당시 아들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졸업을 앞둔 터라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당한 충격은 슬픔과 분노를 넘어 트라우마가 거대한 쓰나미처럼 몰려왔습니다.
사실 이런 일을 겪을 때는 죽음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매일 죽어야지 하면서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남은 가족들도 당장 죽을 지경이라 누가 누구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던 저 자신을 매일 탓하고 자책하며 지냈습니다.
아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 구로동으로 이사를 했었습니다. 휴일이면 싫어하는 아이를 달래서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아이는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산중턱에 올라오니 서울대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저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아이에게 했습니다.
“네가 다녀야 할 대학이다. 잘 봐둬라. 너도 꼭 아빠의 후배가 되어야 한다”
아이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그렇게 말하면 아이가 자극을 받아 “나도 아빠처럼 꼭 서울대에 갈 테야” 하고 결심할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은 아버지였습니다. 힘들게 산에 올라가서 아이의 마음까지 무겁게 만들었으니까요.
아이를 잃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그저 아들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아이가 어릴 적 자동차문에 손을 다쳐서 울고 있을 때도 아버지인 저는 “얼마나 아프니?” 다독이며 달랬어야 했는데..
“사내자식은 그깟 일로 울면 안돼.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안 아플꺼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아이를 강인하게 키우는 방법이고 약한 아버지의 마음을 노출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많이 아프지? 내 새끼~”하면서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지만….
그 놈의 타임머신은 왜 개발이 안되는지요….
트라우마를 극복한다는 말은 최소한 저에게는 과분한 표현이었습니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목마르게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 친한 친구한테 전화가 왔고 교회에 같이 나가보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사랑하는 내 아들을 데려갔냐?"고 그 친구에게 욕을 퍼부으며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미안함이 몰려오면서 저도 모르게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요일 예배에 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술독에 빠져 있었던 저,
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책에 빠져 있었던 저는 달라졌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술친구 대신 성경공부를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몇 년 후 호스피스 활동도 하면서
나 같이 사별을 경험한 사람들을 위한 강연도 다녔습니다.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갈수 없다는 말로 두 번 죽이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죄값을 받은 것이라고 더 큰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후 아이들에게 더 일찍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지만, 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생이 있고,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삶을 더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가족들과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을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했던 마음이 치유되었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저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주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면 '왜 아들을 일찍 데려갔냐'고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변화시키시고 남아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만들고 무엇이든 두렵지 않게 만든 것이 아들의 선물이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도, 부귀영화를 허락하시는 분도 모두 주님이심을 깨달은 저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성경은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면서 왜 우리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실까요?
[시편 121:4]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왜 우리가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실까요?
고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요?
◆첫째,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줍니다.
아프리카 어느 곳에는 묵직한 돌을 짊어지고 가야만 건널 수 있는 얕은 강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강의 물결이 너무 세서 그냥 건너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너무 편하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먹고 잘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묵직한 돌을 짊어지는 것 같은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다.
◆ 둘째, 고난은 인생을 아름답고 귀하게 해줍니다.
인공진주 양식을 할 때 부드러운 조갯살 속에 깔깔한 모래를 넣어 조개가 큰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을 이겨내고 귀한 생명의 즙을 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또 싸면 그 모래알은 점점 크면서 굳어져서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진주로 변합니다.
모래알을 통해 조개가 진주를 만들 듯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불을 통해 단련되고 굳건하여 져서 온전하게 됩니다.
◆ 세째, 고난은 그릇된 삶에서 돌이키게 하고 죄를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탁하게 합니다.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시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돌들이 있기 때문에 시냇물은 흘러가며 노래를 창조하듯,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의 아픔을 통해서 인격이 자라납니다.
◆ 넷째,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며, 온전하게 하며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고난 뒤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공기를 마스크 없이 내 입과 코로 마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좋은 사람들을 언제든지 편하게 만나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길을 내시는 분이며,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단지 내가 원하는 방법이나 길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십니다.
[로마서 8:17~18]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받고 고통을 당할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다듬고 계십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소망을 오직 주님께 두며 주님만 바라봅니다.
고난 속에서도 세상의 소음에 귀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음성에 집중하며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소서.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함으로 나에게 닥친 고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나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온전한 예수님의 참제자로 거듭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 공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