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841) - 2021 조선통신사 옛길 대장정 기행록(7)
- 웅혼한 기상이 서린 중원을 지나며(충주 관아 – 수안보 온천 25km)
4월 11일(일), 오전 7시에 숙소 앞의 순두부음식점에서 아침을 들고 지척에 있는 충주 관아로 나가니 낯선 인사가 정문에서 일행을 맞는다. 원주에 사는 최장호 씨, 체육진흥회의 홈페이지에서 서울 - 부산 대장정 기행록을 통해 이날 아침에 충주관아에서 출발하는 것을 알고 기다리는 중이란다. 원군을 얻은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오전 8시에 관아를 출발, 수안보 방향으로 향하였다. 충주고등하교, 종합운동장, 건국대학교를 지나 임경업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에 이르니 오전 9시가 지난다.
임경업 장군은 조선 중기 인조 때에 이괄의 난과 정묘‧병자호란 등에 큰 공을 세운 명장이자 기둥, 그러나 조정의 암투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장살(1644년) 당하였다가 1697년(숙종 23년)에 누명에서 벗어나 이곳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숙종 32년) 충민(忠愍)의 시호를 내렸다. 1727년(영조 3년)에 이곳의 이름을 충렬사로 지었고 1978년에 정부의 지원으로 성역화 된 명소다. 사당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부인 완산 이씨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한 끝에 자결하여 후에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는 기록이 눈에 띤다. 가슴이 뭉클, 고결한 인품의 한 쌍이로다.
9시 반쯤 충렬사를 나와 중원의 젖줄인 달천을 끼고 한참 걸으니 차량들이 질주 중인 충주-문경 간 큰 도로에 들어선다. 비좁은 갓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노라니 또 다른 손님이 손을 흔들며 승용차에서 내린다. 주인공은 청주에 사는 아내와 장조카, 걷기 일행을 응원하러 나선 길이다. 행진에 방해가 될까봐 잠시 조우, 준비해온 과일 등을 내려놓고 점심 대접 후 곧바로 떠난다. 성원과 격려에 감사의 박수!
도로변의 단골음식점에서 점심을 들고 12시 40분에 오후 걷기, 1km쯤 걸어가니 경찰중앙하교 교문에 이른다. 교문 입구에 걸린 플래카드의 문구, ‘젊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를 믿는다.’ 때마침 주말, 자전거로 질주하는 청년들의 기상이 믿음직하다. 그렇다. 우리는 청년을 믿는다. 젊은이여, 대지를 품으라.
점심 후 두 시간여 걸으니 14시 40분 경 수안보 온천지에 이른다. 걸은 거리는 25km. 하루 동안 같이 걸은 최장호 씨와 작별인사,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편히 가세요!(최장호 씨는 일행인 홍길옥 씨와 특별한 인연, 체육진흥회의 무박 120km 걷기 때 저녁에 조우하여 밤새 함께 걸은 사이, 그때는 마스크 쓰고 어두워서 상대방의 인상착의도 모른 체 헤어졌는데 점심시간에 걷기행사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가 동행자인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전날 충주 시내를 안내한 이상기 향토문화전문가가 시간 맞춰 등장, 수안보에서 차량으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충주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지로 안내하여 석조여래입상과 주변 유적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사적 제317호로 미륵대원지에 있는 본존불, 높이가 10.6m나 되는 큰 불상인데 보존중인 석굴에 물이 스며들어 석굴 전체를 해체하여 수년 째 복원공사 중이다. 규모가 크고 월악산 정상을 조망하는 지형상의 특이점 등 탐구할 가치가 큰 예술품이라고. 경내에 있는 석불과 석등, 탑, 대형거북받침대 등에 대한 해설이 흥미롭고 절 터 안에 있는 원 터, 새재와 함께 충주-문경을 잇는 하늘재의 오르막도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탐방이었다. 값진 역사 유적과 중원의 기상을 새기는 귀한 기회를 주선한 이상기 원장에게 감사드린다.
이틀간 우리 일행을 안내한 이상기 원장이 조선시대통신사현창회보에 실린 여러 자료들을 메일로 송부하였다. 그중에는 전날 충주 관아에서 일행을 맞은 박성갑 현창회 부회장이 쓴 그의 선조이기도 한 ‘제2차 통신사 부사 운계(雲溪) 박재(朴榟) 선생이 남긴 통신사 관련 세 가지 기록’이라는 제목의 글도 들어 있다. 제7차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일행은 2년 전 충주에 들렀을 때 박재 선생의 묘소를 찾은 인연이 있다. 참고가 되리라 여겨 박성갑 부회장의 글 서두를 소개한다.
‘제2차 통신사 부사 운계(雲溪) 박재(朴榟)의 통신사 관련 세 가지 기록
통신사 관련 세 가지 기록을 남긴 박재 선생은 1617년(광해군9년) 2차 회답 겸 쇄환사 부사로, 상사(上使) 오윤겸(吳允謙), 종사관(從事官) 이경직(李景稷)과 함께 428명의 인원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다. 5월 28일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11월 13일 돌아왔으니, 거의 6개월이 걸린 셈이다. 제2차 통신사는 오사카 평정 축하와 피로인 쇄환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국교가 정상화되었고, 조선인 포로 321명을 고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일본 방문 시에는 일본의 문인들과 필담창화를 통해 상호 교류하고 일본에 조선의 문화를 전수하기도 했다. 일본사행(日本使行) 후에는 그 내용을 『동사일기(東槎日記)』와 『회답사일기(回答使日記)』로 남겼다. 또 떠나는 사신을 위해 친구와 친지들이 글을 써서 남긴 『송박재봉사일본서첩(送朴榟奉使日本序帖)』이 있다. 이들 책은 당시의 조선의 문화와 일본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첫댓글 권사님의 내조가 빛을 발하였네요.^^
의미있는 대장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건강도 꼭 챙기시고요.
가족은 역시 울타리입니다.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다행인데 감기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