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에 대하여>
7시30분 숙소인 소노벨 청송을 나와 주왕산쪽으로 향합니다
차를 공원관리사무소에 세우고 대전사 쪽으로 향합니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네요
주왕산은 청송읍에서 동남쪽으로 13.5㎞ 지점에 있습니다.
산세가 아름다워 경상북도의 소금강으로 불리는데, 유서 깊은 사찰과 유적지들이 많아 1976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주왕산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가 당나라에서 반정을 하다가 실패하여 이곳에 와서 은둔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산 이름을 주왕산으로 하면 이 고장이 복될 것이라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하네요.
신라의 왕자 김주원(金周元)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하여 주방산(周房山) 또는 대돈산(大遯山) 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산세가 웅장하고 깎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이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아서 석병산(石屛山)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주왕산은 국립공원 지정 면적이 약 106㎢으로 전체 면적의 97%가 임야지 입니다.
주방계곡·용추계곡·절골 등의 계곡이 있으며, 특히 주방계곡에는 기암(旗巖),·아들바위를 비롯하여 주왕굴(周王窟)·시루봉·망월대(望月臺)·신선대(神仙臺)·연화봉(蓮花峯)·급수대(汲水臺)·학소대(鶴巢臺)·향로봉(香爐峯)·복암폭포(腹岩瀑布)·연화굴(蓮花窟)·좌암(座巖) 등이 있습니다.
사찰로는 대전사(大典寺)와 백련암(白蓮庵)·주왕암(周王庵) 등이 있는데 대전사는 최치원(崔致遠)·나옹화상·도선국사(道詵國師)·보조국사(普照國師)·무학대사(無學大師)·서거정(徐居正)·김종직(金宗直) 등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네요.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승군(僧軍)을 모아 훈련 시켰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대전사 . 유명한 사찰이죠
대전사 뒤쪽으로 보이는 바위가 장군바위로 정상까지오르자면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는데 시간관계상 못올라갔습니다
17일 주왕산 "시와 국악의 만남"이라는 프랭카드가 보이네요
공연이 있는모양
주왕산 계곡쪽으로 올라갑니다
아들바위
주왕계곡 입구에서 100 여미터 위쪽에 위치해있으며 바위를 등지고 다리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돌이 얼마없는것으로 보아 아들낳기는 힘든것 같습니다
다람쥐가 겨울을 나기위해 땅속에 도토리를 저장하는 듯
우연히 카메라에 포착
급수대 주상절리(주왕산 최고의 주상절리)
주앙산 국립공원을 이루고있는 대표암석은 응회암입니다
응회암은 화산이 폭팔할 때 뿜어져나온 화산재가 굳어져 만들어진 암석입니다
주상절리는 주로 빠르게 식는 암석에서 형성되어 기둥모양의 틈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급수대는 이러한 주상절리를 잘 살펴볼수 있는곳이라고 하네요
시루봉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측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사람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시루봉에는 옛날 어느 겨울에 한도사가 이 바위 위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바위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합니다
용추협곡으로 들어갑니다
용추란 용이 하늘로 승천한 웅덩이를 뜻하고,
협곡은 급경사를 이루며 암석이 양쪽으로 높이 서있는 좁고 깊은 골짜기를 말합니다
주왕산의 용추협곡은 백악기후기(1억년~6500만년전) 화산폭팔로 분출된 화산재가 두껍게 쌓이고 굳어져서 만들어진
응회암이 오랜시간동안 풍화, 침식되어 만들어졌습니다
동서분과 인증샷
동서분은 88세로 아직까지 정정하시여 주왕산쯤이야 가볍게 넘습니다
용추폭포
용추란 용이 하늘로 승천한 웅덩이를 뜻하고,
협곡은 급경사를 이루며 암석이 양쪽으로 높이 서있는 좁고 깊은 골짜기를 말합니다
주왕산의 용추협곡은 백악기후기(1억년~6500만년전) 화산폭팔로 분출된 화산재가 두껍게 쌓이고 굳어져서 만들어진
응회암이 오랜시간동안 풍화, 침식되어 만들어졌습니다
학소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절벽위에는 청학과 백학 한쌍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로 불리웁니다
먼 옛날 백학이 사냥꾼에게 잡혀 짝을 잃은 청학은 날마다 슬피울면서 바위주변을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픈사연이 전해져 네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학은 간데없고 그들의 보금자리 터만 절벽 위에 남아 옛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주왕산성
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주왕이 주왕산으로 숨어들어온후 당의 요청을 받은 신라군사를 막기위해 대전사 동편 주왕암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쌓은 돌담으로 길이가 약 12km(30리)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성터의 자취만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