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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일 [위령의 날 미사]
연옥을 믿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연옥은 무척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성인들은 지옥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만큼 큰 자비의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연옥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연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완전해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친구 생일잔치에 가서 느꼈습니다. 다만 양말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나왔을 뿐인데
잔칫상이 마치 지옥과 같았습니다.
창피해서 맛있는 거 먹는 거보다는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지옥에 가지는 않더라도 양말을 기울 시간을 주어야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실 것입니다.
만약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핑계를 대든지 잔칫상에 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이 없으면 감히 성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더라도 연옥에 대한 교리가 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르틴 루터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지옥이 두려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해성사하고 보속을 해도, 죄는 여전히 짓고 보속을 고통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의 행위보다는 믿음이라는 말씀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행위를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일단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어야 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이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처음에는 성경에서 제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의 정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정도면 충분할까요?
우리 믿음은 하느님 자녀, 곧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믿음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짓는 법이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행위 또한 완전하셨습니다.
이렇게 연옥을 생각하지 않으면 완전해야만 해서 그 완전의 정도를 낮추기 일쑤입니다.
전에 전교 1등 하는 고3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전국 1등을 하라고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아들이 어느 날 성적표를 받았는데 학교에서도 1등이 아닙니다.
아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성적표를 위조하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알까 봐 자기가 죽느니 어머니를 죽이는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적표는 실천입니다.
실천이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줍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실천이 나오지 않으면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의고사와 같은 성적표가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고 또한 그 목표를 낮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전국 1등을 못 하더라도 사회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공부만 하면 나머지는 다른 것으로 보충하면 될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자비로운 여지를 주는 부모 앞에서 아이는
목표를 낮추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실천과 믿음의 균형을 맞추며 나아갈 것입니다.
한때 조류 인플루엔자나 신종플루, 코로나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였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그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게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으면 치료될 수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주어야지, 무작정 완전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식이라면 정말 사랑도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연옥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연옥을 목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연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진을 멈추지 않게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일 [위령의 날]
마태오 11,25-30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불꽃놀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입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하루 삼시 세끼 섭취하고 연명하는 데 만족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있고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는 것,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강론>
(2024. 11. 2. 토)(마태 5,1-12ㄴ)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곧 나를 위한 기도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1)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인데, 이 말은, 이 세상 너머에 ‘내세’가 있음을 믿는 믿음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만일에 내세가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허무할 것입니다.
종교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내세를 믿는 믿음은,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믿음과 하나인데, 우리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내세로 건너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내세로 건너가면, 현세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갈라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우리 교회의 교리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는 영혼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영혼들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지금 연옥에서
보속을 하고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의 보속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줄여주기 위한 기도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만 믿고,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부 종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천국으로 직행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고, 반대로 지옥으로 직행할 정도로 악한 것도 아니어서,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 부족했던 보속을 채워서 천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옥은 완벽한 성인도 아니고, 완전한 악인도 아닌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자비의 장소’이고, ‘사랑의 장소’이고, ‘은총의 장소’입니다.
<‘희망’으로 표현하면, 천국은 희망이 다 이루어진 곳, 더 바랄 것이 없는 곳’, 완벽하게 행복한 곳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희망은 하나도 없고 절망만 있는 곳입니다.
연옥은 희망이 남아 있는 곳이고, 틀림없이 이루어질 그 희망의 실현을 향해서 나아가는 곳입니다.
따라서 연옥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2) 우리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들,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 연옥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들 가운데에는 이미 천국에 들어간 이도 있을 텐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고, 또 누가 알려 주지도 않기 때문에, 일단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분명히 천국에 들어갔다고 객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경우는, 교회가 공적으로 성인이라고 선포한 경우입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기도하는 영혼들 가운데 어떤 영혼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진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또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기도 대상에서 누군가를 제외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지옥으로 갔다고, 즉 멸망하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말씀하신 사람이 성경에 딱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배반자 유다입니다.
배반자 유다 외에는 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릅니다.
큰 죄를 지었더라도 죽기 전에 회개한 경우가 있을 것이고, 그 회개 때문에 지옥행을 피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이 미흡하고 부족한 회개라고 하더라도.
3) 연옥에서 보속하는 일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라고 전해집니다.
그 고통은 바로 ‘내 안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와 자책, 그리고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겪은 이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에서 오는 고통, 특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주님께 죄송한 마음... 그런 고통들이 상상보다 훨씬 더 영혼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실 현세에서 이미 그런 고통을 경험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 경우에는 사는 것이 곧 연옥이고, 보속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삶’이 천국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지옥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는 사랑이고,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연옥 영혼들이 언젠가는 천국에 들어가게 될 텐데, 천국에 가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로 기도해 주는 것이 곧 ‘성인의 통공’입니다.
‘성인의 통공’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